236화
실로 오랜만에 많은 가족들이 모여 즐기는 만찬 자리였다.
다른 이름과 모습을 한 도로테아는 식사를 즐기는 가족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콜린과 코제트는 이제 제법 다정하고 단란한 부부로 보였다.
자연스레 음식을 서로의 접시에 놓아주는 것을 바라보다, 천천히 스푼을 쥐었다.
“먹기 싫은 것이 있다면 남겨도 된단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더 달라고 부탁하면 돼.”
다이애나의 배려 섞인 목소리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제 몫의 접시를 조금씩 비우는 소녀와 소년을 바라보는 펠릭스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당황한 스탠이 나이프를 놓치자, 다이애나가 웃으며 재빠르게 그를 타박했다.
“아이들을 그렇게 빤히 보면 어떻게 해요. 당신 인상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면서.”
긴장한 아이의 실수를 덮어 주려는 부인의 의도를 알아챈 듯 펠릭스가 담담히 사과했다.
“그렇군. 미안하게 되었어. 그저 좀 신기해서.”
연신 접시로 향하는 시선을 보아하니, 무엇이 그리 신기한 지 알 것도 같았다.
하이클레어의 일원으로서 방대한 양의 훈련을 소화해 온 가문의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대사량 또한 뛰어난 편이었다.
데인보다 검술과 체력이 떨어지는 에드윈조차 또래와 비교하면 적게 먹는 편이 아니었으니.
새 모이만큼 먹는 소년이나, 딱 또래 식사의 정량을 지키는 소녀가 신기해 보일 밖에.
“아이들이 너무 야윈 것이 아닌가 싶은데.”
“괜찮을 겁니다. 건강을 챙겨 주다 보면 자라면서 식사량도 자연스레 늘겠지요.”
차분한 우드의 답에 다이애나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예정에 없이 만찬에 초대받게 된 손님이었다.
“실례지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영애는 언제쯤 뵐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자리가 불편하다는 듯 굳은 얼굴로 묻는 그리엄에게 다이에나가 부드럽게 답했다.
“폐하께 이미 들으셨듯, 아이는 지금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는 중이라 쉽사리 만나기가 어려울 듯싶어요.”
“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오로지 영애만을 보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반드시 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요.”
“다시 말을 넣어 보겠습니다. 다만, 그리 기대하지는 않으시는 것이 좋아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그리엄을 배척하거나 무시하진 않았지만 확답 또한 주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국의 황제마저 ‘그 아이가 원치 않는다면 자네를 만나라고 강요할 수는 없네.’라고 하더니, 가족들마저 ‘기도 중에는 저희조차 만나기 어렵다.’는 답변이라니.
그저 핑계라기에는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식사 자리를 빠져나오는 그리엄의 등 뒤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발랄하고 경쾌한 소녀의 목소리에 그리엄이 몸을 돌렸다.
조르르, 그에게로 다가온 도로테아가 몸을 기울이라는 듯 그를 향해 손짓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떨떠름하게 몸을 숙이자, 소녀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제가 알아요. 도로테아 영애가 있는 기도원.”
“……!”
“아저씨는 거기 가고 싶으신 거죠?”
아이의 말이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리엄이 눈에 띄게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이 다들 쉬쉬하고 있긴 하지만, 저도 다 듣는 게 있으니까요.”
어딘가 자랑스러운 듯 뽐내는 아이를 향해 그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굳은 그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 대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만이 자리했지만 도로테아는 태연하게 그를 마주한 채 생글거렸다.
“아저씨가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면, 저도 아저씨를 내일 그분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부탁?”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아저씨라면 충분히 해 주실 수 있는 일이에요.”
환하게 웃는 소녀의 얼굴에 그리엄은 어쩐지 이유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 * *
“자진하여 아이를 맡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도로테아를 힐끔, 바라본 우드가 묻자 그리엄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듣자 하니 외출을 하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제가 데려가면 어떨까 해서요.”
“…….”
“마침 오늘, 이 아이의 오빠는 기사단에서 간단한 테스트를 받을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체력 및 검에 가진 소질 등등, 스탠의 현 상태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려는 일정이었다.
우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답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 에?”
적어도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일 줄 알았던 아이 아버지의 시원한 허락에 당황한 그리엄이 말을 잃었다.
아버지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버, 번화가로 가려 합니다.”
자신은 이미 한 번 아이들을 놓친 전적이 있었다.
미덥지 못한 보호자에게 소중한 딸을 맡길 리 없다고 생각해 꽤 오랜 실랑이를 각오했건만.
막상 돌아오는 것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시원한 허락이었다.
소녀를 그리엄이 있는 쪽으로 밀어 보내 준 우드는, 한술 더 떠서 기이한 조언까지 남겼다.
“금품은 되도록이면 몸 가까이 지니고 계십시오. 다른 이의 손이 닿지 않는 은밀한 곳에 숨길 자신이 없으시거든, 조금만 들고 다니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게 무슨…….”
자신이 무슨 열 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니고.
설마하니 돈을 잃어버릴까 싶어 충고하는 건가.
그리엄이 벙찐 얼굴로 우드를 바라봤다.
아이 아버지의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품속을 뒤적인 우드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그리엄의 손에 고이 쥐여 주었다.
“라벤더 꽃을 말려 넣은 병입니다.”
“이것을 왜……?”
“심장이 벌렁거리고,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어질 때가 오거든 병에 코를 가져다 대고 향을 들이켜십시오. 진정 효과가 있습니다.”
“…….”
그렇게 찜찜한 허락을 받아 낸 그리엄은 도로테아를 데리고 상점들이 즐비한 번화가로 향했다.
황도는, 그가 머물던 제국의 변경이나 다른 지역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손을 잡고 걷던 도로테아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분명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었다고 했는데. 신기해요.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요!”
그러더니 이내 걸음을 멈추고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엄은 손을 잡아끌어도, 꼼짝도 않는 소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껏 부풀려 멋을 낸 머리를 하고 자랑스레 고개를 치켜든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입은 푸른빛 드레스에 한 알 한 알 박아 넣은 진주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려도 여자아이라는 건가. 드레스에서 눈을 떼질 못하는군.’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툭, 뱉었다.
“자연산이겠죠?”
“뭐?”
“경매에 올리면 얼마까지 오르려나? 요즘 진주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농담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 뒤에도 소녀는 종종 걸음을 멈추고 거리를 구경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커피숍이 들어선 건물의 시가를 가늠했고, 상점에서 물건을 쓸어 담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리엄은 소녀와 손을 걷고 거리를 지나치며, 반대쪽 손으로 겉옷 안쪽을 뒤적였다.
여비가 든 주머니는 다행히도 여전히 두둑했다.
“평화롭네요. 이곳은.”
도로테아의 말에 황급히 손을 뺀 그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야 어떤 근심이 있든 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들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아빠가 그러는데, 다들 경각심이 없어서 그런 거래요. 그러니 정말 위기가 닥쳤을 때 허둥지둥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겠지.
그리엄은 그제야 이 평화로운 장면을 보면서 내내 속이 불편했던 까닭을 깨달았다.
클라이브가 무지한 빈민들을 부추겨 일을 꾸미고 있을 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사람들은 늘 그렇듯 화려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궁전에서는 매일같이 성대한 연회와 만찬이 열렸다.
각 지역에서 바친 훌륭한 재료들은, 솜씨 좋은 요리사의 손에서 아름다운 형태의 요리로 탈바꿈하곤 했다.
가난한 자들의 한 달 급여가, 그들의 한 입이 되어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그마저도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남기기 일쑤였다.
그들이 하층민들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갔지만,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늘 음식이 썩어 넘쳤으니까.
그들로서는, 본인들이 경험해 보지도 않은 하층민의 삶 따위를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본인들만의 세상에 갇혀 살아도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엄은 슬그머니 눈을 돌려, 어딘가 익숙한 광경들을 외면했다.
소녀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천진하게 물었다.
“로헨 왕국도 이렇게 평화로웠어요?”
“그래.”
“나쁜 술사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까요?”
“그랬겠지.”
담담하게 답하는 그리엄을 힐끗 올려다본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전에 아빠가 해 준 이야기인데요. 스펜서 영지 근처에서 로헨 왕국 출신의 기사를 만난 적이 있대요.”
“기사라…….”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생존자가 있었던가.
게다가 기사라니.
전력이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리엄이 도로테아에게 그의 이름을 물으려던 차,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분이 말이에요. 되게 이상한 이야기를 했대요.”
“무슨 이야기 말이냐.”
그리엄의 손을 잡아끈 도로테아가 까치발을 하고 서서, 마치 비밀이라는 듯 속삭였다.
“로헨의 왕실에서는 정령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요.”
“뭐?”
“고위 귀족이나, 황족의 피를 타고나야만 정령사가 된다고들 했잖아요. 그거 다 거짓말이래요. 실은 정령사로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그따위 말을!”
그리엄이 창백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잘조잘 떠들던 소녀는 그의 말에 놀란 듯 자리에 서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한참 뒤, 조금 진정된 듯한 그리엄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헛소리야.”
“그러네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도로테아가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신을 태우면 정령석이 나온다니. 그런 이야기는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 없었단 말이에요.”
“……!”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멈춰 선 그리엄이 도로테아를 돌아봤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은 소녀를 바라보던 정령사는 더듬더듬 물었다.
“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듣고 뭐라 하셨지?”
“웃으셨어요. 정말 그랬더라면 너도나도 정령석을 만들어서 사용하지 않았겠느냐고요.”
그리엄의 얼굴에 한순간 안도의 빛이 서렸다.
흘끔 그를 본 도로테아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실로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클라이브가 그토록 쉽게 왕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알아야 할 일들을 쉬쉬하며 가진 특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운을 타고났다고 한들 모두가 정령사로 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령사가 될 자질을 타고났음에도 드물게 능력을 개화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령석이란, 그런 이들의 시신을 태우면 나오는, 자연의 기운이 담긴 덩어리였다. 그걸 쓰면 자질을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정령사가 될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몹시, 아주 드문 경우긴 하지만.’
왕실은 그 사실을 줄곧 숨겨 왔다.
알려져서 좋은 일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되면 ‘독점’을 할 수 없게 되니까.
‘비록 매우 적은 확률이긴 하나 하층 계급에서도 자질을 갖춘 이들은 태어났을 터.’
욕망이 하늘을 찌르는 귀족들이 그걸 나누고 싶어 했을까?
과연…… 그중 몇이나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까?
도로테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만약에 로헨 왕국의 몇몇 사람들이, 정령석을 만들어 낼 줄 알고 있었다면요. 그래서 몰래 만들어서 정령사들을 기른 것이라면.”
“…….”
“나쁜 술사들하고 뭐가 다른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대체 뭐예요?
입을 삐죽이면서 묻는 도로테아의 말에 그리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아이의 손으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악력이었지만 도로테아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살기일지, 아니면 처연함일지 모를 표정을 짓던 그리엄이 다시 한번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다 왔어요.”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신전의 기도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제인이라는 시녀를 찾아, 로헨 왕국의 정령사가 도로테아 영애를 보러 왔다고 말하면 될 거예요.”
그리엄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얀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그와 같은 진짜 정령사가 있었다.
클라이브가 직접 제국에 걸음하고도, 어쩌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을 만큼 강력한 정령사.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야말로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 * *
끝도 없이 늘어진 시체의 한가운데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얼굴에 묻은 그을음을 채 닦아 낼 시간도 없이 움직이던 메릴린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를 보며 손에 쥐고 있던 쇠스랑을 내려놓았다.
“…….”
아무리 전장에 뛰어드는 것을 각오하고 왔다지만, 사람의 시신을 마치 낙엽처럼 긁어모으고 정리하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구, 한 구 이름을 찾아 주고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 주고 싶지만…….
한숨을 삼킨 그녀가 뒤돌아섰다.
“수고했어요.”
가면을 쓴 발레리가 다가와 달콤한 음료를 건넸다.
품위라고는 찾아볼 틈도 없이 잔을 낚아채어 벌컥벌컥 들이켠 메릴린이 아쉬운 얼굴로 빈잔을 내려놓았다.
“대장!”
어느새 꽤 가까워진 라제프의 목소리에 그녀가 정색했다.
“대장이라고 부르지 말랬죠!”
“그렇지만, 두목은 싫다 하셔서…….”
“당연히 싫죠!”
라제프가 난감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메릴린은 걷어붙이고 있던 소매를 잡아 내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별건 아닙니다.”
친구의 목소리에 홀려 죽을 뻔한 것을 구해 준 이후로, 그는 부쩍 메릴린 곁을 맴돌곤 했다.
얼굴을 붉힌 라제프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시체를 태우다 보니, 이런 것을 발견해서…….”
그는 메릴린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동글동글한 돌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강가에서 흔히 주울 수 있는 자갈과 비슷해 보였지만, 이제 막 지기 시작한 햇빛을 받자 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분명 새까만 숯과 같은 색인데, 각도에 따라 묘하게 빚을 흡수해 반짝인다고 해야 할까.
묵직한 돌을 손에 꼭 쥐자 알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물끄러미 돌을 내려다보던 메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저 시체 더미에서 나왔어요?”
“기, 기분 나쁘세요? 강물에 몇 번이고 씻어서 가져온 건데…….”
라제프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묻자, 메릴린이 되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기분이 왜 나빠요?”
“시체에서 건져 온 거니까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메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혼이 떠나고, 껍데기만 남은 육신이에요. 물론 한때 살아 있던 사람의 육신이니 경건하게 대하면 좋겠지만 또 그리 불길하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죠.”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돌의 정체였다.
‘혹시라도 이 돌이 보석의 원석이라거나 그러면…… 내 독립자금 정도는 되려나.’
무능력한 오빠를 군역에서 빼려다 졸지에 가문이 폭삭 망했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그녀는 줄곧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메릴린.”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돌의 가치를 가늠하는데 열중하고 있던 메릴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발레리의 표정이 몹시 묘했다.
“그거 아무래도 정령석 같아요.”
차분한 목소리에 메릴린이 쥐고 있던 돌을 놓쳤다.
재빠르게 손을 뻗은 프리드가, 돌을 쥐었다.
푸른 눈의 기사가 그녀를 향해 돌을 내밀자 메릴린이 몸서리쳤다.
자칫 잘못하면 정령사가 될 뻔하지 않았나.
가뜩이나 도로테아가 ‘새로운 동료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따위의 무시무시한 소리를 늘어놓는 판에.
“그 흉물 저리 치워요!”
“정령석이잖아요. 아마 황도에 가져가서 폐하께 진상하거나, 경매에 붙이면 어마어마한 돈을 얻을 수 있을 텐데요.”
“……!”
메릴린이 덥석, 프리드의 손에 있던 돌을 다시 쥔 순간이었다.
미지근한 열기를 띠고 있던 돌에 화르륵, 불길이 일어 그녀의 손을 집어 삼켰다.
“꺄아아악!”
뻐어억!
메릴린의 주먹이 허공에 나타난 붉은 정령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직 제대로 각인조차 맺지 않은 정령을 물리적으로 건드리는 것이 어려울 테지만 메릴린은 도로테아의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본디 잡귀와 같이 불길한 기운을 제압하는 삼재부(三災符)는, 부적을 지닌 주인의 뜻에 따라 불의 정령을 삿된 것으로 인식한 듯했다.
메릴린에게 자질이 있던 것도 있었지만.
“불, 불이야! 불을 꺼야 할 것 같아요!”
메릴린은 최선을 다해 타오르는 불꽃을 밟고, 짓이기고, 물로 고문했다.
발레리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프리드가 조용히 메릴린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진정하라는 뜻에서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콜린이 잔뜩 열이 받았을 때, 에이든이 들어 올려 둥개둥개 달래면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차분해지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효과는 훌륭했다.
프리드의 둥개둥개를 받고 한결 차분해진 메릴린은, 언제 기세 좋게 타올랐냐는 듯 이제는 다 죽어 가는 불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옆에 빛을 잃고 새까만 돌이 된 정령석도.
본능적으로, 정령석이 평범한 돌이 되어 버렸음을 알아챈 메릴린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발레리가 조용히 다가와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정령사가 된 것을 축하해요.”
그 말에 메릴린이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던 프리드가 다시 둥개둥개 그녀를 흔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