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227화 (227/242)
  • 227화

    황도로 떠나는 날 아침, 다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가, 잘 가거라.”

    “아버지와 행복하게 살려무나.”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게다.”

    도로테아는 생글거리며 그동안 낯을 익혔던 병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어린 남매에게 정이 들었던 병사들이 애틋한 작별의 인사를 쏟아 내는 사이, 우드는 의아한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요, 아빠?”

    도로테아가 흘끗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우드는 대답 대신 슬쩍 말을 흐렸다.

    “아니…….”

    이곳에 있어야 할 법한 몇몇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메릴린 영애가 보이질 않습니다만.”

    “아아, 영애라면.”

    필립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답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셔서요.”

    “…….”

    “누군가 영애의 오라버니가 병역 비리로 고발당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 같더군요. 그 탓에 가문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오라버니께서는 유치장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도.”

    우드는 열등감으로 가득 차 종종 메릴린에게 헛소리를 지껄이던 오빠라는 작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자라는 이유로 그 못난 인사를 매번 감싸고돌던 남작이라면, 확실히 그런 짓을 벌일 만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긴 해요.”

    필립이 루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병역 관련해 비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빠른 신고 덕에 오히려 뇌물이 오고간 정황까지는 잡히지 않아 재산 몰수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누군가 그 사실만 쏙 빼고 알려 준 것 같더군요.”

    우드가 당연하다는 듯 도로테아를 바라보며 인상을 쓰더니, 스탠의 두 귀를 살짝 틀어막고 딸내미를 타박했다.

    “네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받아 주는 참한 영애를 왜 그리 괴롭히는 거냐. 그녀가 아니면 널 감당할 사람도 없건만.”

    “아버지가 되어서 딸을 좀 믿어 줘야 하는 거 아냐? 이번만큼은 내가 아냐.”

    “네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한다고 그래.”

    생긋 웃은 도로테아가 힐끔,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루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 참한 영애에게 기절당한 어떤 자존심 센 분이 부린 심술이 아닐까 하는데.”

    “…….”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우드가 재차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저 멀리 뿌연 안개 너머로 알 수 없는 거대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이곳에 머무르며 이런저런 괴기한 현상들을 경험했던 이들은 다들 경계 어린 눈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형상을 노려보다, 그 모습이 선명해지고 나서야 긴장을 늦췄다.

    “데인, 도대체 무슨 일이냐.”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사냥물들을 잔뜩 짊어지고 오는 손자를 타박했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짐승들을 내려놓은 데인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답했다.

    “가는 길에 식량이 부족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건 과하다. 너무 많아. 짐을 줄여도 모자란 판에…….”

    후작의 한숨에 데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들고 가 봐야 이틀도 안 되어 동이 날 겁니다.”

    늘 조카를 지지하고 함께했던 에이든도, 이번만큼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사냥이야 7황자 전하께서 하시면 될 일이지. 건량도 넉넉히 챙겼고. 괜히 짐을 늘려 봐야 어느 세월에 황도에 도착하겠느냐. 그냥 보내는 게 나을 듯싶은데.”

    “안 됩니다.”

    데인이 짐짓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루크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리 능력 있고 똑똑한 데다 어디 내놔도 부족할 것 없는 녀석이라고는 하지만, 사냥처럼 험한 일을 시킬 수는 없잖습니까.”

    “…….”

    성년이 되기도 전에 전장을 돌며 온갖 명성과 악명을 획득했던 ‘그 황자’에게 건넬 말은 아니었기에 다들 귀를 의심했다.

    에이든마저도 저 녀석이 어젯밤 무언가 잘못 먹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눈치였다.

    본인이 만들어 낸 어색한 침묵 속에서도, 데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황자 가까이로 다가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자괴감 갖지 마라. 원래 전장에서의 처음은 다들 그런 법이니까. 돌아가면 집안 어른들께 안부 인사 전하고, 얌전히 기다려. 내가 너를 위해 승전보를 가져다줄 터이니.”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모습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7황자가 그동안 하이클레어 가문과 여러 번 얽힌 것은 사실이나, 이토록 친근한 모습을 내비친 것은 처음이 아니던가.

    그보다 7황자를 바라보는 데인 하이클레어의 눈빛은 뭐랄까…… 남달랐다.

    ‘애정이 담기지 않았어?’

    ‘흡사 친동생을 보는 눈빛인데?’

    ‘지금 쓰다듬으려고 한 거지? 전하께서 매정하게 뿌리치셨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좀 보라고.’

    나이대가 비슷한 두 남자 간의 훈훈한 우정이라고 보기에는, 루크의 두 눈에 살기가 아주 그득했다.

    곁에 있던 병사들이 놀라 후다닥 달아날 정도로.

    일방적인 애정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애정의 대상이 황자인 것은 차마…….

    “꾸물거릴 시간 없으니 출발하겠습니다.”

    콜린의 냉랭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았던 상황을 정리했다.

    우드가 남매를 양쪽 옆구리에 끼고 마차에 올라타자,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는 동안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리엄이 마지막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차지했다.

    로헨의 생존자들은 이곳에 있는 내내 꺼림칙한 시선들을 받았고, 어울리지 못한 채 겉돌았다. 덕분에 모처럼의 훈훈한 작별 인사에서도 한 걸음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여 딱히 서운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황도로 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만나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황제는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 로헨의 흥망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오히려 이 기회에 그냥 속국으로 복속시켜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제위 내내 골치를 썩게 만들었던 북방 유목 민족을 견제할 훌륭한 방패를 얻게 되는 셈이니.

    그러니 황제가 아닌,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만나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같은 정령사로서 많은 것들을 전수해 줄 수 있다.’

    대대로 로헨에서 배출해 오던 정령사들이 남긴 서책도, 계약한 정령과 교감하는 법도.

    “도로테아 영애는 그리 야박하지 않답니다. 경께 이득이 될 만남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발레리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말대로,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에게 최대한 빠르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영애의 가족들과 친분을 쌓아야 한다.’

    그리엄의 시선이 파리한 얼굴로 마차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콜린과, 그런 그에게 연신 정성을 기울이는 필립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는 정령사의 시선을 받는 당사자는 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우드는 키엘에 이어 그리엄까지, 별난 인간들의 ‘넘치는 관심’을 받는 사신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입을 뗐다.

    “아르투아 영지를 거쳐 갈 생각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필립이 가볍게 답하자 우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굳이 그쪽을 거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듣자 하니 아르투아 가문에서 적잖게 영지민들을 쥐어짠 탓에 민심이 흉흉하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문의 실각으로 황도에서 파견한 행정관이 영주 역할을 대리하고 있을 터.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여정에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루크는 상식적인 제안에 답하는 대신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생글거리던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위험해지면 아빠가 지켜 줄 거잖아요. 저는 아빠를 믿을래요.”

    두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눈을 반짝이는 도로테아의 말에 우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느 길을 거치든 상관없는 7황자가 굳이 이 길을 택했을 리 없으니, 분명 도로테아의 입김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가증스러운 녀석.’

    우드는 그녀의 말에 모른 척 스탠을 토닥였다.

    “염려 말거라. 너는 내가 꼭 지켜 주마.”

    “어, 사라도…… 지켜 주셔야 하는데요.”

    “그래, 뭐…… 기회가 되면.”

    건성 어린 답에 스탠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빠가 지키기 힘들어 보이면 본인이 동생을 지켜 줘야겠다며 다짐하는 눈치였다.

    그 훈훈한 광경을 바라보던 그리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콜린을 바라봤다.

    발레리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가장 따르고 존경하는 숙부가 아니던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

    콜린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꿰뚫어보기는커녕,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정령사를 모른 척 외면했다.

    *   *   *

    마차는 제법 수월하게 아르투아 영지로 들어섰다.

    “저, 황자 전하.”

    능숙하게 마차를 몰던 마부 겸 호위 기사는 무슨 영문인지 갑작스레 거리 한구석에 마차를 세우는가 싶더니 불쑥 제안을 건넸다.

    “송구하오나, 진로를 바꾸었으면 합니다. 이곳을 관통하는 것보다는, 다른 영지로 넘어가 에둘러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어딘가 꺼림칙해 보이는 안색을 들여다본 루크가, 아이들의 잠을 깨우지 않게끔 창을 가리던 천을 조심스레 걷어 냈다.

    “…….”

    줄곧 마차 안에 있어 미처 보지 못한 끔찍한 거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건들이 가득 진열대어 있어야 할 가게의 진열장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유랑 도적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박살 난 문 안쪽으로는 검붉은 핏자국이 낭자했다.

    거리에는 즐비한 쓰레기를 치우는 이가 없는 탓에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을씨년스러운 거리의 풍경을 확인한 우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기사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전장을 경험한 기사조차 거부감을 나타낼 정도로 영지의 상황은 을씨년스러웠다.

    “전하, 그렇게 하시지요.”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곳에는 영주마저 부재한 상황이 아닙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 골치 아플 겁니다. 가뜩이나 어린 아이까지 있으니 안전을 우선시했으면 합니다.”

    잠든 소년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건넨 우드의 말에 루크의 시선이 도로테아를 향했다.

    소녀는 바깥의 흉흉한 광경을 보면서도 무서워하기는커녕 말똥말똥한 눈으로 물었다.

    “다른 영지들은 달라요? 여기만 이렇게 이상한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필립이 입을 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황실이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 중이라고는 하나, 황도에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물자 보급이 어려운 편이니까. 요새가 함락되면서, 각 영지마다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과도한 과세까지 걷었으니.”

    “그럼 머무를 곳도 없나요?”

    “내 기억에 문제가 없다면 이 거리 끝에 그나마 묵을 만한 여관이 있을 거야. 거기서 다시 의논하면 될 듯도 한데…….”

    필립의 의견이라고는 하나 누가 원하는 바인지 모를 리 없었다.

    우드는 소년을 품에 안은 채 한숨을 삼키며 다시 창을 가렸다.

    도로테아는 창문을 가린 가림막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것으로 가린다고 한들 보이는 것들이 허상이 되는 것도 아닐진대.

    지금 당장 위험을 피한다고 해서, 그 위험을 자아내는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이.

    “전 더 보고 싶어요, 아빠.”

    “흉한 꼴을 보아 뭐 하게. 얌전히 앉아 있어라.”

    “아무리 흉해도 저것이 현실이잖아요. 흉하다는 이유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저 광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걸요.”

    그리엄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또박또박 대꾸하는 도로테아를 훑었다.

    또래치고 영민해 보인다고는 생각했지만, 제법 훌륭한 식견이 아닌가.

    어린아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치 차분한 목소리에 우드가 그녀를 타박했다.

    “아이처럼 굴어라, 아이처럼.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말하지 말고.”

    “음, 그럼. 아빠, 저 밖을 구경하고 싶어요!”

    생긋 웃으며 눈을 찡긋하는 아이는, 그다지 어린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그리엄이 보기에도 꽤 어여뻤다.

    그러나 정작 아이의 아버지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품 안의 소년을 고쳐 안으며 외면했다.

    “아이처럼 예쁜 짓 하라면서요.”

    “차라리 자라. 너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가장 볼만하다.”

    다른 일행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그리엄마저 움찔할 만큼 매정한 언행이었다.

    출발하고부터 내내, 딸을 향해 살가운 말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는 그리엄의 눈이 가늘어졌다.

    둘 다 본인이 거둔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품 안의 소년은 저토록 귀하게 여기면서, 소녀는 마치 눈엣가시처럼 취급할 이유가 있을까.

    이제껏 ‘필요 이상으로 어른들에게 너스레를 떨고 다니는 소녀;를 경망스레 여겼던 그리엄의 시선이 누그러졌다.

    ‘아비가 저리 매정하니, 누구에게든 사랑받고자 살가워진 게지.’

    우드는 이쪽을 바라보는 그리엄의 시선에 점차 걸쩍지근함이 묻어나는 것을 모른 채 스탠을 토닥이며 앞으로의 험한 여정을 걱정했다.

    도로테아의 태도로 보건대, 돌아가는 길조차도 아무 일 없이 평온하기란 어려울 듯 보였다.

    *   *   *

    여관은 오면서 봤던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외벽은 우중충한 색을 띠고 있는 데다,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경첩이 너덜거리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런두런 들리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여관 내부에는 드문드문 사람이 보였지만, 그 누구 하나 낯이 밝은 이가 없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그나마 음식처럼 보이는 걸 씹고 있었다.

    다들 퀭한 얼굴인 것이, 생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유령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연신 곁눈질로 여관 내부를 살피던 우드가 카운터로 다가섰다.

    “방을 좀 잡고 싶소만.”

    주인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불이고, 식사를 포함하려면 두 배는 줘야 하오.”

    “목욕물도…….”

    “먹을 물도 구하기 힘든 마당에 목욕물이 어디 있소?”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말에 우드가 입을 다물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도로테아가 뭐라 말하든 간에 다른 영지를 경유했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아이를 돌보기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방을 쓸 거요, 말 거요?”

    “……쓰겠습니다. 식사도 포함해서.”

    고개를 끄덕인 주인이 너덜너덜해진 열쇠를 건네주더니 흘끗, 스탠과 도로테아를 일별했다.

    “오늘은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짐을 풀고 있으면 간단한 요깃거리를 올려다 주리다. 애들은 먹여야 할 것 아니요.”

    방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일행이 나눠 써야 했다.

    콜린과 그를 챙기는 필립이 같은 방에 묵고, 루크와 그리엄이 그 옆방을, 마지막으로 가장 끝 방이 우드와 아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호위 병력은 교대로 방 하나를 쓰기로 했다.

    삐걱거리는 층계를 올라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서자 한쪽 귀퉁이가 터진 매트리스와 세탁한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를, 회색빛이 감도는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도착한 거예요?”

    눈을 부비며 일어난 스탠의 물음에 우드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직 멀었다. 길이 멀다 보니 중간중간 이렇게 들르는 영지에서 묵어 갈 거다. 오늘은 여기서 잠을 청할 거고.”

    성실한 소년은 방을 보고도 불평은커녕, 품에서 쪼르르 내려와 짐을 푸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우드의 눈이 그런 아이의 뒤를 쫓다, 문득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가장 좋은 침대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카락을 빗고 있는 여자아이를.

    “짐 정리는 안 할 생각이냐?”

    도로테아는 자신을 향해 몹시 불만스런 시선을 보내오는 권속의 말에 눈을 끔뻑이다, 재빠르게 달려와 자신의 짐을 정리해 주는 스탠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향해 웃었다.

    “다했어요, 아빠.”

    “뭘 네가 한 것처럼 말하고 있어. 전부 네 오빠가 한 것인데.”

    “그보다 들어올 때 보니 아이들을 위해 나무 열매를 끓여 만든 차를 판대요. 마시고 싶어요.”

    꽤 자연스럽게 ‘어리광쟁이 딸’ 흉내를 내는 도로테아의 뻔뻔한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우드는, 그녀가 시작한 연극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하는 아버지가 되기로.

    “꿈도 꾸지 마라.”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네가 제일 많이 먹고, 제일 열심히 마셨다.”

    “오빠가 마시고 싶다고 했으면 사 주셨을 거잖아요.”

    “당연하지. 네 오빠는 너보다 훨씬 괜찮은 아이니까.”

    도로테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제가 뭐가 어때서요?”

    “네 오빠의 발가락 때만큼도 못하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대화를 듣고 있던 스탠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 제가 심부름을 하면서 받은 용돈이 있는데…….”

    병사들 틈에서 이것저것 할 일을 찾아 하다 보니 귀엽다며 쥐어 준 돈 몇 푼을, 알뜰살뜰하게 모아 내미는 소년의 모습에 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로테아가 스탠의 손에 있던 용돈을 세어 보고는 밝게 말했다.

    “이거면 충분할 것 같아.”

    “잘됐다.”

    어린 소년의 코 묻은 돈을 강탈해 본인의 입에 털어 넣으려는 도로테아의 양심 없는 모습에 우드가 눈을 부라렸다.

    “마실 생각일랑 하지도 마라! 네 오빠는 몰라도 너는 절대 안 돼!”

    그 순간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리엄이 모습을 드러냈다.

    욕심 많은 딸에게서 아들의 코 묻은 돈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우드는 갑작스런 방문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굳은 얼굴의 방문자는 소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돈이 문제라면, 내가 내겠습니다.”

    “예?”

    “대단히 비싸고 좋은 차도 아닌 듯하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

    갑작스런 제안에 우드가 멈칫한 사이 도로테아가 쪼르르 달려가 그리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냉큼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차 한 잔뿐이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말거라.”

    무뚝뚝한 말에도 도로테아는 생글거리며 정령사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바람의 정령을 다룬다더니, 확실히 기운이 맑고 창창한 것이 제법이지 않나. 꽁꽁 감추었음에도 본능적으로 그녀를 꺼리는 통에 도통 접근하기가 어려웠는데 뜻밖에도 먼저 다가올 줄이야.

    탐나는 물건이 눈앞에 알아서 굴러 들어온 덕에 모처럼 소녀의 얼굴에 흡족함이 감돌았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검은 속내를 잘 알고 있는 우드가 나직이 그리엄을 말렸다.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 번 저 아이에게 말리면 답이 없으니.”

    “사내아이 귀한 것이야 알지만, 내가 보기엔 이 아이도 영민하니 봐줄 만합니다. 너무 차별하며 기르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로헨은 남아와 여아를 이 정도로 지독하게 구분해 기르진 않습니다.”

    “…….”

    졸지에 성별로 자식들을 차별하는 아버지가 된 우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엄의 손을 꼭 잡은 도로테아가 가증스레 종알거렸다.

    “아빠를 탓하지 마세요. 제가 오빠보다 모자라고 부족한 탓이니까요.”

    “…….”

    하루라도 빨리 황도에 도착하여 이 끔찍한 소꿉놀이를 끝내고 싶다는 바람이 그의 마음에 새록새록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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