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휴전 협상과 관련한 회의가 한창일 무렵, 도로테아는 천으로 덮인 시신들로 즐비한 강가로 걸음을 옮겼다.
우드는 무거운 얼굴로 끝도 없이 늘어진 시신들을 훑어보았다.
“이들 모두가 히사르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이겠지?”
“대부분은 그렇겠지. 다행히도 변경백이 퇴각을 염두에 두고 병력을 빼돌린 덕에 이 정도로 그친 거야.”
변경백은 이미 결과를 예측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요새를 지키던 이들 모두가 전멸했을 터.
그나마 영리하게 패전을 준비했기에 이 정도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대로 패장이 되어 제국으로 돌아갔다면, 패전 책임을 추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귀족들에게 맹렬하게 물어뜯겨 너덜너덜해졌을 테고.
끝끝내 모두가 차가운 단두대 위에 서야 다들 만족한 얼굴로 배를 두드리며 뒤돌아섰겠지.
애초에 병이 깊었으니, 그가 군을 제국으로 돌린 것은 단지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썩고 썩은 제국의 수뇌부를 밀어내지 않으면, 그들을 모조리 끌어내리지 않으면.
그리하여 적어도 전쟁의 고통과 끔찍함을 아는 이를 황제로 추대하지 않으면.
역사가 반복되리라는 끔찍한 생각이 그의 등을 떠밀었던 것이 아닐까.
‘딱히 틀린 것도 아니고.’
눈을 내리깐 도로테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이 정도의 희생으로 끝낸 것만 보더라도.”
너무 뛰어났기에 그 결말이 행복할 수 없었지만.
시신들 사이를 거니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드는, 그 뛰어난 인물이 누구를 뜻하는지 알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조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이들은 혼조차 남아 있지 않은 빈껍데기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고개를 끄덕인 도로테아가 거뭇한 색을 띤 강물을 바라봤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녹아내린 일부 장기 탓에 강물 위에는 기름때가 둥둥 떠올라 있었다.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의 지독한 악취 속에서도 도로테아는 폴짝폴짝 시신을 뛰어넘으며 마치 놀이처럼 그곳을 누볐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병사들조차 얼씬하지 않는 이곳에 굳이 걸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무엇을 기다리는 거지?”
조심스런 물음에도 답은 없었다.
알 수 없는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며 연신 발장난에 여념이 없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멈춰 섰다.
그녀가 응시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우드의 시야에 무언가 희끄무레한 존재가 보였다.
강의 상류를 따라 오염된 물을 헤쳐 가며 걸어오는 사람의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는 핏자국이 낭자한 넝마를 걸친 채 기진맥진한 기색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멈칫했던 우드가 재빠르게 다가섰다.
“누구냐.”
고개를 든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 이곳이 어디요?”
“연합군이 있는 사령부다. 너는 누구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꺼낸 말에 남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드를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물었다.
“연합, 군이라니요? 무슨 연합군을 말하는 겁니까?”
꾀죄죄한 얼굴을 살피던 우드가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다시 요구했다.
“네 소속을 밝혀라.”
“저, 저는…….”
남자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가 싶더니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누군가의 흉갑 위에 걸쳐져 있었어야 할, 기사단의 훈장이 귀퉁이가 찢어진 채 그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날렵한 사슴이 장식된 훈장을 알아본 우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히, 히사르 요새에서 변경백 각하 아래에 있던 병사입니다. 줄곧 요새에 포로로 남아 있다 어젯밤이 되어서야 풀려났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우드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닿은 살갗이 마치 사람의 체온이 아닌 것처럼 서늘했다.
요새부터 시작해 줄곧 강줄기를 따라 걸어온 것이라면, 줄곧 차가운 강물에 체온을 빼앗겼을 터.
서늘한 몸과 파란빛이 감도는 입술까지. 모두 이해가 갔다.
“……이자를 기다리고 있었나.”
도로테아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우드를 툭, 쳤다.
“그만 가야지.”
이런 건 미리 좀 알려 줄 수 없나.
한숨을 삼킨 우드가 추레한 차림의 남자를 들고 천천히 열띤 회의가 한창인 막사로 향했다.
멀리서도 쉬이 들릴 만큼, 여러 귀족들의 고함 소리가 막사를 뒤흔들고 있었다.
* * *
후작은, 잔뜩 겁에 먹고서 목을 움츠리고 있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강물을 가득 메운 참혹한 형상의 시신들과, 눈앞에서 녹아내린 전령.
그리엄과 로헨 왕국의 생존자들이 증언한, 말로 옮길 수조차 없는 끔찍한 금술(禁術)들.
그런 참상을 적나라하게 목격했으니 사기가 떨어지는 당연지사였다.
“폐하께 진실을 고하기 위해서라도 회군을 택해야 합니다.”
“각국에도 이 끔찍한 사실들을 알려야지요!”
“이대로 진군하다 아까운 병력이라도 잃게 되면 어찌합니까?”
“저들은 시체를 다룬다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아군을 적군으로 맞이하게 생겼습니다!”
주섬주섬 주워 담는 말들은 하나같이 일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띤 눈동자에 가득 서린 것은 결국 두려움이었다.
축제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보검을 허리에 찬 남자의 말에 침묵하던 후작이 키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작은 어찌 생각하는가?”
“글쎄, 저라면…….”
느긋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서서, 다툼을 관망하고 있던 키엘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쿰쿰한 냄새와 함께 막사로 들어온 우드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신이 히사르 요새에 붙잡혀 있던 포로라고 주장하는 병사를 데려왔습니다.”
“……!”
“그의 말로는, 현재 히사르 요새는 거의 텅 비어 있는 상태라는군요.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로헨 왕국에 있는 본진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요새를 점령하고 있던 병사들이 모습을 감췄다고 합니다.”
“포로라면…….”
“변경백의 수하였다는군요. 요새의 경계를 맡았던 보초로, 함락된 뒤 감옥에 갇혀 있다 감시하는 자들이 사라진 것을 알고서 어찌어찌 탈출해 왔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루크가 몸을 일으키나 싶더니 재빠르게 막사를 빠져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채 우드의 말을 되새기던 귀족 중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일, 만일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
“여러 가지가 이해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프란츠 자작이 조심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저들은 오래전부터 일을 꾸며 왔습니다.”
야만인들을 부추겨 국경을 침탈했고, 황자들 간의 분열을 일으켜 내전을 유도했다.
그 뒤, 황태자가 실각하여 제국 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병력을 움직여 요새를 함락해 버리지 않았던가.
“만일 본국에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기세가 저들에게 있는데, 굳이 휴전을 제의할 까닭이 없지요. 필시 요새에 주둔시키던 병력을 빼야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어차피 요새를 빼앗길 상황이라면, 차라리 휴전으로 마무리 짓는 편이 저들 입장에서는 덜 치욕적일 테니까요.”
눈을 끔뻑이던 귀족들 중 몇몇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저쪽이 우위라면 굳이 먼저 휴전을 제안할 이유는 없지.”
“요새를 주겠다는 말도, 실은 병력을 물릴 생각이었기에 꺼낸 것일 수도 있겠소.”
하나둘, 말을 보태자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발을 빼려던 이들의 눈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텅 빈 요새.
지키던 병력이 빠져나갔다면, 어쩌면 요새 탈환이 훨씬 더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휴전 협상 제의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머릿속으로 열심히 손익을 계산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침묵 속에서, 후작은 루크가 박차고 나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 *
회의를 파하고 나온 에이든이 구겨진 얼굴로 침을 뱉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작자들이오. 퉤!”
분위기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우드가 말을 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들 잔뜩 겁을 집어먹고는 어떻게든 회군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진군을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라니.
물론 ‘포로’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한 말의 신빙성을 따져 봐야겠지만, 벌써부터 선봉에 누굴 세우느냐로 기 싸움에 한창인 이들을 보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후작은 잔뜩 골이 난 아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황자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포로’라 여겨지는 추레한 차림의 남자는 그의 막사에 뉘여 있었다.
“상태는 좀 어떻…….”
곧바로 용건을 건네던 후작이 포로 곁에 있는 조그마한 소녀를 보고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든 소녀의 맑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음, 여기 있었느냐.”
하필이면 자신을 포로라 주장하는 정체도 모호한 작자와 아이를 함께 두다니.
후작은 우드를 나무라듯 바라봤지만, 정작 그는 정신을 잃고 잠든 포로를 지그시 바라보느라 누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우드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작이 찢겨져 나간 휘장을 만지작거리는 황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얼굴이 낯익어. 변경백 휘하에 있던 병사임은 분명하다.”
“그의 말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까?”
“요새가 비었음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봤을 때 문제가 생겼음은 확실하지.”
담담하게 답하는 루크의 말에 후작이 침묵했다.
황자가 보증했으니, 적어도 포로의 말 중에 몇 가지는 확실해졌다.
물론 여전히 불안한 요소는 있지만 흔들리던 연합군을 다잡아줄 만한 소식이긴 했다.
“휴전 협상에 대해서는 내가 폐하께 직접 고하도록 하지.”
“……황자 전하께서 말입니까?”
“연락구는 먹통이 된 지 오래고, 전령은 돌아오지 않고 있질 않나. 가뜩이나 황도로 돌아가면 폐하께 고해야 할 소식들도 많고.”
“그렇긴 합니다만.”
후작이 미심쩍은 얼굴로 황자를 훑었다.
그가 먼저 전장을 이탈해 황도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할 줄이야.
심지어 작금의 제국은 황위를 이를 계승자가 결정되지 않아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공적 하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다가는 쓸데없는 트집만 잡히기 일쑤일 텐데.
그 키엘 스펜서조차 여기에 남아 공적을 노리고 있는 마당에, 굳이 돌아가 승냥이 떼의 먹잇감이 되겠다고?
후작의 눈에 의심의 빛이 서리자 조용히 있던 도로테아가 루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우드가 고개를 돌리자, 황자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회복해야 할 듯싶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곳의 의원에게 몸 상태를 점검받고 천천히 떠나시는 것이 좋겠군요.”
그 황자가 자청해서 황도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니. 괴물 같은 회복력에도 좀처럼 낫지 않을 만큼,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었다.
무리한 여정을 강행하는 것보다 좀 더 회복한 뒤 천천히 출발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후작의 말에 루크가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 밤 곧장 떠날 거다.”
“포로 심문도 보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루크를 바라보는 후작의 눈에 의구심이 어렸다.
“혹여, 제게 숨기는 것이 있으십니까?”
도로테아는 간단한 것조차 해결하지 못해 침묵으로 대처하는 황자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께서요, 곧 있을 따님 분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으시대요.”
“……?”
“……?”
“……?”
그 순간, 도로테아와 황자를 제외한 막사 안의 모든 이들은 의아한 기색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황자에게 딸이 있었던가?
도로테아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루크를 바라보자, 황자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후작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 어린 성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양녀로 맞이했던 그 아이?”
루크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과묵해진 황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후작이 천천히 몸을 굽혔다.
눈높이를 맞춘 채, 얼굴을 마주한 후작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황자 전하.”
“……?”
“어떻게든 생일을 챙겨 줘야 한다는 그 애틋한 따님의 이름이 어찌 됩니까?”
“…….”
후작과 마주한 황자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하자, 우드가 더는 볼 수 없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도로테아는 밥상을 차려 줘도 뒤엎는 황자를 보다가 조용히 누워 있던 포로의 어깨를 쥐었다.
그 순간 정신을 잃었던 포로가 파드득, 몸을 떨더니 눈을 부릅떴다.
“으, 으…….”
헛소리를 내뱉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포로의 모습에 시선을 돌린 후작은, 도로테아를 안아 들고서 조심스레 막사를 빠져나가는 황자의 뒤로 나직이 답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정히 가셔야 한다면 그리하십시오. 폐하께 전할 서신을 써 드리겠습니다.”
“…….”
“전하께서 따님께 내리신 이름은 힐데가르트, 제노사이더 힐데가르트입니다. 외워 두십시오.”
막사를 빠져나가던 루크가 조용히 대꾸했다.
“음.”
후작의 한숨소리가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듯했다.
함께 빠져나오던 우드가 덧붙이듯 말했다.
“이참에 개명 좀 시켜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성녀 이름이 그게 뭡니까.
루크는 타박 어린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막사 부근을 맴도는 희끄무레한 넋들의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넘실거리는 그것들은 하나같이 새까맣고 불길한, 부정적인 기운을 가득 안고 있었다.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도로테아가 나직이 속삭였다.
“괜찮아. 저것들은 다른 이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
보이는 사람에게는 좀 성가실 테지만.
애초에 목적이 명확한 데다, 지금으로서는 꿈자리를 더럽히는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니 그대로 둔다 해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루크가 시선을 돌리자, 도로테아는 우드를 향해 지시했다.
“필립과 콜린에게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라 이르렴.”
“……메릴린 영애는 데려가지 않을 생각인가?”
“지금은 이곳에 남아 있는 쪽이 더 나을 테니까.”
담담하게 말한 도로테아가 터벅터벅 걸어 어딘가로 향했다.
늘 그렇듯 가면을 쓴 채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푸른 눈의 기사가 그녀를 응시했다.
“발레리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잠시 들어가도 될까?”
청년은 아무런 말없이 천천히 문을 열어 그녀를 들여보내 주었다.
발레리 제르망은 밤늦게 찾아온 친구를 불평 없이 다정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도로테아는 자신을 위해 부드러운 방석을 깔아 주는 발레리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리엄을 데려가야겠어.”
“폐하께?”
“진짜 왕녀와 만나게 해 줄 생각이야.”
미지근한 물을 따르던 발레리의 손이 멈칫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그녀가 잔잔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빌렸던 이름을 돌려줄 때가 온 거니?”
“글쎄.”
도로테아가 차분하게 답했다.
“아직은 아니야.”
“그래?”
“조만간 선택을 하게 될 때가 올 거야. 그때가 되면.”
“…….”
“좀 더 솔직해져도 좋아, 발레리.”
뜻 모를 덧붙임에 발레리는 자그마한 소녀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