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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96화 (196/242)

196화

선뜻 걸음을 떼기 시작했던 처음과는 달리,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맥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제아무리 뜻이 맞지 않아 뛰쳐나왔다 하더라도, 산채에는 아직 동료들이 남아 있을 터.

돌아가는 것을 저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필시 무언가 숨긴 것이 있겠지.’

추궁해 봐야 할까.

메릴린을 흘끔,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고민에 잠겼다.

안 그래도 겁을 집어먹고 있는 남자를 곧바로 추궁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입을 더 꾹 다물지도 모른다.

‘좀 더 지켜보는 게 낫겠어.’

숨긴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설사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혼력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지금의 도로테아’는 메릴린 한 사람 정도는 챙길 수 있을 터.

모처럼 키엘의 눈에서 벗어난 상황이니 우선은 감을 따라 움직여 보는 수밖에.

결론을 내린 도로테아가 연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는 맥의 등을 쿡 찔렀다.

“아직 멀었어요?”

“이익. 이 꼬맹이가!”

도로테아를 향해 얼굴을 구기며 짜증스레 으르렁대던 맥이 곁에 있는 메릴린의 눈치를 보며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그, 조금만 가면 건물이 보일 거다.”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 그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해 보였다.

메릴린 또한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채고서 의아한 듯 물었다.

“상대가 그렇게 질이 나쁜가요?”

좀 전에 그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이라면, 불안해하지 않을 만도 한데.

그가 언급했던 ‘괴물 같은 인간’과 관련 있는 것일까.

“누, 누님.”

“저 누님 아니라니까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둘러 주시겠어요?”

“그게 아니라…… 누님께서 앞장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쩔쩔매며 건넨 부탁에 메릴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것이 실은 제가…….”

얼굴을 붉힌 맥이 무언가 고백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연 순간이었다.

멀뚱멀뚱 대화를 듣고만 있던 도로테아가 별안간 날카로운 눈을 하며 우거진 수풀로 가득한 어느 방향을 응시했다.

누군가가 소리 없이,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을 몸놀림이었다.

“메릴린.”

도로테아가 두 손으로 강하게 메릴린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순간, 조용하던 수풀에서 벼락처럼 튀어나온 인영이 맥을 덮쳤다.

“케에엑. 켁!”

날렵하게 달려든 남자는 재빠르게 맥의 목을 움켜쥐었다.

덕분에 굵직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는커녕, 숨이 막힌 맥이 버둥거리며 내는 쌕쌕 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었다.

‘정확하게 목을 쥔 것은, 소란을 줄이겠다는 뜻.’

도로테아는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체격을 갖춘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달려드는 움직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메릴린이 숨을 들이켰다.

‘저 사람, 훈련을 받지 못한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라. 경지가…….’

데인? 혹은 그 이상일까?

적어도 속도만큼은 그녀보다 훨씬 우위일 터.

아니, 애초에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는 부분에서 상대가 되질 않았다.

잔뜩 긴장한 메릴린과는 달리 도로테아는 흥미로운 얼굴로, 켁켁대는 맥의 뒷목을 쳐, 조용히 기절시키는 남자를 지켜봤다.

이윽고 축 늘어진 맥이 발치에 스르르 쓰러졌다.

재빠르게 상대를 제압한 남자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렇지만 메릴린이나 도로테아, 두 사람 모두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의 얼굴은 은색 가면으로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으니까.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가면 아래 보이는 것이라고는 영롱한 빛을 내는, 호수처럼 맑고 푸른 눈동자뿐이었다.

마주한 도로테아의 얼굴에 미소가 스몄다.

“어…….”

메릴린은 이상할 정도로 친숙함이 느껴지는 남자를 보다 어색한 듯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오래전, 저렇게 맑고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 기시감이…….

“그, 어…….”

어쩐지 얼어붙은 입술을 겨우 연 메릴린이 남자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희는 그 사람한테 안내받아서 산채로 향하던 길이었는데요.”

그제야 꾹 다물려 있던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저자는 규칙을 어긴 채 산채를 벗어나 도주한 인물입니다.”

“도주…… 했다고요?”

“숲을 드나들며 채집을 하던 주변 영지민들을 겁박하여 금품을 뜯어내고, 나아가 여인들에게까지 손을 대려 했습니다. 처벌이 결정될 때까지 감금해 둘 예정이었지만, 보초들이 한눈을 판 틈을 타 도주한 터라.”

“그럼 그냥 추방해 버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

이곳까지 굳이 찾으러 왔단 말이야?

메릴린의 떨떠름한 말에 도로테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외부에 이곳의 상황과 위치가 알려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요?”

도로테아를 지그시 바라보던 남자는, 소녀의 말에 옳다, 그르다는 답을 하는 대신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기절한 맥의 멱살을 쥔 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메릴린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조심스런 부름에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괜찮다면, 저희가 그 산채를 방문하고 싶은데요.”

“…….”

“그, 물론 갑작스러운 일일 테지만…….”

산적들이 모여 있는 산채를 방문하면서 전갈(傳喝)을 미리 보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자신을 길가의 돌멩이처럼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태도에서 자꾸만 느껴지는 기시감이, 그녀를 이끌었다.

“따라오십시오.”

더듬거리는 메릴린의 말에 걸음을 멈췄던 남자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메릴린은 그런 그의 뒤를 조심스레 쫓으며 흘끔, 도로테아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힘겨운 기색 없이 제법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을 경계하느라 느릿하던 맥의 걸음과는 달리, 남자의 걸음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어린아이가 숨이 가쁘지 않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피피.”

나직한 부름에 품에서 자고 있던 다람쥐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아무래도, 해후가 길어질 것 같구나. 흔적을 지워, 나를 찾는 이들의 걸음을 최대한 늦춰 주렴.’

찌- 찌-.

다람쥐는 믿음직한 울음소리와 함께 소녀의 품에서 튀어나가 우거진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등 뒤로 들리는 작은 짐승의 울음소리에 순간 흠칫했던 남자는 조그마한 생명체가 멀어지는 기척에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메릴린의 거친 숨소리에 그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사박사박, 어린아이의 발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였다.

*   *   *

얼마나 걸었을까, 우거진 수풀 속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던 산채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차 가까워질수록, 메릴린의 얼굴에 서린 경악이 커졌다.

‘말도 안 돼. 이게 산채라고? 이렇게 큰 규모에, 수성까지 할 수 있게 목책과 망루까지 갖춰진 곳이?’

정문 옆으로 좌르륵 세워진 목책은 설령 침입자가 쳐들어온다고 한들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물론 몇 달에 걸친 공사를 통해 쌓아 올린 요새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부족함이 있을 테지만, 적어도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구축한 방어 시설임은 틀림없었다.

문을 지키던 이들은 가면을 쓴 남자를 보자 곧바로 손을 들어 예를 표했다.

몸에 배인 절도 있는 인사에 메릴린의 놀라움이 더욱 커졌다.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탈출한 죄인을 추적해 데려오는 길이다.”

흘끗, 맥을 내려다본 남자가 혀를 쯧 하고 찼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맥을 보던 문지기가 고개를 들어 메릴린과 도로테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들은 누굽니까?”

“죄인이 접촉하고 있던 외부인. 손님으로 대우할 예정이니 임시 통행증을 건네주도록.”

“예.”

절도 있는 것은 인사뿐만이 아니었다.

드나드는 이의 목적을 묻고, 상황을 설명하고 외부인을 들이는 과정.

그 모든 것이 체계적이었다.

도로테아는 제 목에 걸린 나무 통행증을 만지작거렸다.

누군가가 손으로 직접 새긴 듯한 통행증에서는 미미하게나마 어떤 ‘인위적인 기운’이 흘렀다.

멀리서 훈련받는 이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연무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단순한 산적 무리가 아닌데요? 탈영병들이 유입됐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체계를 갖추기란 어려워요.”

메릴린이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비록 완벽하진 않았어도, 종종 원치 않게 병법이나 군사 훈련 대해 주워들은 것이 많은 덕에 그녀 또한 기본적인 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이건…… 누군가 작정하고 만든 요새예요.”

고작해야 징집을 거부하고 도망간 이들 몇몇이 모인다고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었다.

사병을 기르는 ‘병법 지식’을 가진 누군가의 손이 닿은 거다.

메릴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로테아는, 불안한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메릴린을 안심시키고자 다정히 손을 잡아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저는 고작해야 십여 명 정도가 모여 뭉친 어중이떠중이들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여긴 그게 아니라…….”

명백하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든 ‘요새’가 아닌가.

메릴린이 남자의 등을 흘끗, 바라보며 남은 말을 삼켰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본 도로테아가 느릿하게 답했다.

“오히려 잘된 일 같은데요.”

“네?

“이토록 든든한 아군이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죠.”

“아군이라니, 그게 무슨…….”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눈을 끔뻑이던 메릴린이 재차 물으려던 찰나였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지키던 이들이 당연하다는 듯 인사를 건네자, 남자는 질질 끌고 온 맥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가두어 두도록. 처벌은 후에 결정하겠다.”

“예.”

“그분은?”

“지금 쉬고 계실 겁니다.”

고개를 조아린 보초의 답에, 고개를 가볍게 까딱인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메릴린과 도로테아를 향해 말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 여기로요?”

남자가 문을 열자, 어두운 안쪽으로 잘 짜인 구조의 내부가 보였다.

제법 살림살이가 갖춰진 집 안으로 들어선 도로테아는, 메릴린과 함께 삐그덕거리는 층계를 올라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작은 다락방으로 안내받았다.

문을 열자, 작은 창 너머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느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늘씬한 체구의 여인은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긴장한 메릴린이 침을 삼키자, 기척을 느낀 듯 뒤로 돌아선 여인의 얼굴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가면이 씌어 있었다.

“어머나.”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메릴린은 남자에게서 받았던 익숙한 기시감을, 또다시 눈앞의 여인에게서 느꼈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두 사람을 향해 반짝였다.

“이것 참 반가운 손님이네요.”

긴가민가한 메릴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인은 천천히 손을 머리 뒤로 뻗어 가면을 벗었다.

천천히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도로테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가면을 쓴 여인이 낸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던 메릴린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반가워요, 메릴린. 그리고 이름 모를 꼬마 아가씨.”

한때 제국에서 손꼽히는 미인이자,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의 절친한 친우로도 유명했던 발레리 제르망이 그녀 앞에서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뭐, 무, 무슨……!”

혼란스러워하는 메릴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발레리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데려온 거야? 놀란 것 같은데?”

그제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은색 가면 아래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메릴린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래, 이상하게 저 눈동자가 익숙하다고 했어!’

시리도록 푸른, 얼음 호수 같은 눈동자. 군청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

마주한 이들의 정체를 확인한 메릴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휘청거렸다.

도로테아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떨리는 메릴린의 다리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 다정하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발레리는 실성한 듯 허공을 바라보는 메릴린을 보며 반가운 듯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메릴린이 이런 곳까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알다시피, 이곳은 국경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까요.”

“그, 그러니까. 맥이 말했던 새로 왔다는 그 마녀 같은 산적 두목이…….”

“맞아요. 저랍니다.”

발레리가 즐거운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로 인정하자, 줄곧 입을 다물지 못하던 메릴린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미, 미, 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아니, 심지어, 산적 두목은 또 뭐야.

게다가 발레리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시기에 제국에 있을 수가 있어요!”

사교계에서 제법 활발한 활동을 한 데다 청문회에도 참석하여 증언을 한 적이 있는 만큼, 발레리는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름과 얼굴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황제가 눈감아 주었다고는 하나, 죄인으로 죽은 인물이 이렇게 버젓이 제국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지 않나.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로 식히던 메릴린이 기가 막힌 듯 물었다.

“다른 국가로 망명한 거 아니었어요?!”

“돌아온 지 좀 됐어요.”

뻐끔뻐끔, 입을 다물지 못하던 메릴린이 고개를 홱 돌려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죠? 다 알고 있었죠?!’

명백한 추궁의 눈빛에 도로테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발레리와는 새로운 이름을 건네주었던 그날 헤어진 뒤로 제대로 연락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필립과는 이따금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기어코 뒷목을 잡은 메릴린이 눈을 감고 비틀거렸다.

그런 메릴린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던 발레리의 시선이 이내 그 옆에서 조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더해 주는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향한 묘한 눈길을 느낀 도로테아는 오랜만에 보게 된 ‘친우’를 향해 친근한 웃음을 보냈다.

“그런데 이 꼬마 아가씨는…….”

발레리가 막 도로테아에 대해 물으려던 찰나였다.

본 적 없는 낯선 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 가면을 벗고 있는 발레리와 프리드를 보고 흠칫했다.

‘이건 또 누굴까.’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묘하게 이질적인 기운이 도로테아의 흥미를 끌었다.

창백한 안색의, 어딘가 학자 같은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언뜻 보아도 꽤 젊게 보였다.

그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어째서 가면을 벗고 계십니까.”

“아, 설명해 드려야겠네요.”

발레리가 남자의 추궁에 여유롭게 웃었다.

“이쪽은 제 오랜 지인이랍니다. 우연하게도 근처에서 요새를 탈출한 ‘죄인’과 만나 그에게 위협당하고 있던 상황을 프리드가 발견한 모양이에요. 오랜만에 보게 된 지인이라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낯선 남자가 힐끗 메릴린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평가라도 하듯, 훑어 내리는 시선에 메릴린이 움찔했다.

낯선 이에게 받는 경계 가득한 시선이 썩 유쾌할 리 없지만, 그녀 또한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듯 잠자코 있었다.

도로테아는 메릴린과 달리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남자를 보며 말없이 턱을 괴었다.

메릴린의 존재를 모두 가늠했다는 듯 시선을 거둔 남자는 인사 한마디 없이 지나쳤다. 그러고는 발레리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가면을 매끄럽고 하얀 손으로 주웠다.

‘학자? 아카데미 출신인가?’

거칠지 않은 손으로 보건대 적어도 검을 쥔 검사나, 평민은 아니라고 봐야 했다.

본인이 관찰당하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발레리의 앞에 무릎을 꿇고 부복한 채 손에 쥔 가면을 건넸다.

“부디, 얼굴을 드러내는 일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해 주십시오. 혹여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저어됩니다.”

“주의할게요.”

“왕녀 전하의 신변이 위태로워질 만한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메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하?’

입가에 보조개가 생기도록 짙은 웃음을 띤 발레리가 메릴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메릴린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죠? 제가 테아에게 받은 두 번째 이름.”

“두 번째 이름이요?”

미심쩍은 얼굴로 되묻는 메릴린의 말에 발레리가 노래하듯, 도로테아가 ‘주인에게서 빌려 온’ 이름을 읊었다.

“헤일런 로헤나움. 살아남은 로헨 왕국 마지막 왕녀의 이름을 받게 되었답니다.”

가만히 서서, 제가 들은 말을 몇 번이고 다시 곱씹어 보던 메릴린이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든 채 자그마한 두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해 주고 있던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메릴린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겨우 화해했는데.’

아버지의 말이 옳아.

친구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로구나.

인간관계에 서투른 도로테아가 탄식하는 사이, 발레리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메릴린과 알 수 없는 소녀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관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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