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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95화 (195/242)
  • 195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쓰러진 고목을 멍하니 바라보던 메릴린이 황급히 속삭였다.

    “이건 너무 요란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리리가 소리를 차단해 두었으니, 다른 이들은 듣지 못했을 거예요.”

    허공에 반투명한 모습을 슬쩍 드러낸 리리가 자랑스레 가슴을 내밀었다.

    “이런 종류의 뒤처리는 제법 익숙한 아이라서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말을 덧붙이려던 메릴린이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정령이 ‘뒤처리’에 익숙한 건데.

    아니, 애초에 소리까지 차단해 가면서 이렇게까지 일을 키워야 하나?

    메릴린은 까르르 웃으며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리리를 찜찜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쟤는 진짜 정체가…….”

    물음을 던지던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남은 말을 삼켰다.

    빙긋 웃고 있는 도로테아를 보건대, 답을 듣게 되어도 심란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고민만 커질지도.’

    어떤 답이 들려오든 간에 받아들이기 힘들기는 매한가지일 터였다. 차라리 미지의 세계로 남겨 두는 것이, 그녀의 정신을 위해서도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도로테아는 다른 생각에 잠긴 메릴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효과는 확실해 보이네요. 감히 덤빌 생각조차 하지 못하잖아요.”

    껄렁거리며 다가와 시비를 걸던 산적의 다리는 어느새 조신하게 모아져 있었다.

    메릴린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남자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봐요.”

    물음에 화들짝 놀란 그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수그렸다.

    잔뜩 위축된 어깨를 바라보는 메릴린의 눈에 이해의 빛이 서렸다.

    아마 지금쯤, 이 남자 또한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때가 가장 불안할 시기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며 회한에 잠김과 동시에, 이제껏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눈앞에 파바박 스쳐 지나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왜 이제껏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을까.

    좀 더 괜찮은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을 테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린 메릴린이 온화한 눈빛을 보낼수록 남자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갔다.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공포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장정 셋이 모여야 겨우 껴안을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나무를 손으로 날려 버린 여자는 자신을 보며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 그녀의 옆에 조용히 붙어 있는 어린 소녀는 그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으므로.

    “저기, 이봐요?”

    재차 이어진 메릴린의 부름에 남자가 벼락을 맞은 듯 자리에서 펄쩍 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그런 격한 반응을 본 메릴린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조심스레 말을 붙였는데 반응이 너무하지 않나.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남자를 본 메릴린이 한숨을 쉬며 도로테아를 힐난했다.

    “이럴 줄 알았어요. 당신이랑 엮이면 이렇게 된다니까요.”

    어깨를 으쓱한 도로테아가 모르는 척 메릴린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언니.”

    “……독하다, 정말.”

    여기까지 와서도 그 연극을 유지할 셈인가.

    끙, 하고 고개를 돌린 메릴린이 중얼거렸다.

    “나한테도 귀족 영애로서의 체면과 평판이라는 게 있단 말예요.”

    볼멘소리를 듣던 도로테아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애초에 그 체면은, 산적과 맨손 격투를 하겠다고 나설 때부터 이미 저 멀리 날려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음을 언제쯤 깨달으려나.

    더 놀렸다가는 겨우 화가 풀린 ‘언니’가 또 토라질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도로테아는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그치만 이 방법이 제일 빠르고 효과도 확실하잖아요.”

    애초에 상대의 전의를 상실하게끔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도로테아는 설명을 요구하는 메릴린의 시선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저자의 몰골을 봐요. 차림새도 차림새지만, 신발만 보아도 이렇게 깊은 숲에서 오래 살아온 인물은 아니에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도시를 벗어나 이런 곳으로 숨어들었다면 뻔하죠.”

    도로테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메릴린의 고개가 남자를 향했다.

    “당신.”

    “예, 옙!”

    “징집 대상자였나요? 명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거고요?”

    “……?!”

    메릴린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반응에서 진실을 읽어 낸 메릴린이 얼굴을 굳혔다.

    ‘징집을 피해 달아난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평민들을 약탈하는 산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을 듣긴 했었지만.’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남자를 훑었다.

    전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자원하여 나서는 이들은 드물었다. 공을 세워 높이 오를 수 있는 것 또한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우드처럼 걸출한 인물도 변경백이 아니었다면 백인장은커녕 평생 기사들 아래에서 고기 방패로 쓰이다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부분은 그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기만을 바라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것이리라.

    남은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러니, 징집에서 도망가고자 하는 그 마음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약탈로 이어져서는 안 될 일이지.’

    적어도 탈영병들은, 사람을 죽이다 살기에 물들어 피폐해진 정신 때문이라 변명이라도 한다지만.

    저자는 원치 않는 상황에서 도망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곤궁함을 해결한다는 걸 핑계로 약자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흉기를 휘두르고 협박을 자행하지 않았나.

    상념에 잠긴 도로테아를 대신해 메릴린이 다시 그를 추궁했다.

    “대답하세요. 제 추측이 맞나요?”

    “그, 그것이…….”

    남자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연신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덜덜 떨려 나오던 목소리는, 결국 끝까지 답을 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왜 혼자예요? 이런 깊은 숲에는 무서운 짐승들도 나올 텐데, 여기서 혼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도로테아의 물음에 메릴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옳았다.

    징집을 피해 도망쳐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면, 분명 함께 다니는 무리가 있을 터.

    홀로 이곳에서 살아남기에는 힘든 환경이었다.

    ‘보아하니 그리 대단한 무위를 지닌 것도 아닌데.’

    메릴린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본 남자가 체념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와 제 무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채 반년도 되지 않은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산에서 채집이나 하고 사냥을 해서 먹고살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런데요?”

    “예상외로 상황이 좋지 않아지면서, 영지에는 강제 징집령이 추가로 발령되었고 더 많은 이들이 숲으로 도망쳐 들어왔죠.”

    “점점 무리가 커졌겠군요.”

    “그러다 보니, 저희도 숲에서 사냥하거나 채집하는 것으로만 먹고살기에는 퍽퍽해져서요.”

    “그래서 여자를 보고 다짜고짜 위협을 하며 끌고 가려 했다는 건가요?”

    “…….”

    어이가 없다는 듯한 메릴린의 물음에 남자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도로테아는 남자의 그런 어수룩한 말을 모두 믿지 않았다.

    반년째 이 깊은 숲에 자리를 잡았다더니, 그의 옷과 신발은 모두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이었다.

    도심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필품을 부족함 없이 갖추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물물 교환처럼 평화로운 방법은 아닐 터.

    ‘다만 궁금한 것은, 어째서 홀로 이곳을 어슬렁거렸다는 거지.’

    그녀는 이런 자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이들은 결코 홀로 다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무리를 지어 다님으로써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섞여 들었다.

    “그렇게 몸집이 커지다 보니, 어디선가 소문을 들은 다른 무리들이 저희를 찾아왔지요.”

    “다른 무리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다짜고짜 저희더러 자신들 아래에 들어오라는 겁니다. 제대로 된 무기를 쥐여 주고 힘을 기를 수 있게 해 주겠다나요.”

    “그건…….”

    “그러더니 본인들의 규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강요하고, 산채를 뜯어고치는 일에 저희를 마치 일꾼처럼 쓰는 겁니다.”

    남자의 말을 듣던 메릴린이 슬쩍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규율을 세우고, 무기를 쥐여 주며 훈련을 시킨다? 산채를 뜯어 고쳐 방비에 신경 쓰고?’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대개 산적들은, 몸집이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근거지를 기점으로 그곳에 자리를 잡지 다른 무리를 찾아가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는다.

    남자의 말을 듣자면 마치 산적들을 복속시켜 제대로 된 병사로 키우고자 시도한 것 같은데.

    생각을 마친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고 자연스레 물었다.

    “그래서요?”

    아이의 당돌한 물음에 멈칫했던 남자는, 이내 메릴린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로서야 어이가 없는 일이지요. 심지어 무리를 이끄는 게 계집이더라고요.”

    “여, 여자요?”

    메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래서 다들 분노해서는 덤벼들었는데…….”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 뒷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나, 분노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을 보아하니 그는 ‘승복하지 못한’ 쪽이려나.

    ‘그래서 홀로 인근에서 서성이고 있었군.’

    새로운 무리에 섞여 들지 못하고 벗어났기 때문에.

    그보다는 산적을 삼켰다는 이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처참히 깨졌습니다. 괴물 같은 인간이 있더라고요. 함께 온 일행들도 잘 싸우고요.”

    “그래요?”

    “저희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습니다. 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놈들이라니까요.”

    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이들이라니.

    메릴린의 얼굴이 퍽 심각해졌다.

    “탈영병 무리일까요? 검을 쓸 줄 안다면…….”

    “그건 아닐 거예요.”

    군의 명부는 요새 내에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무엇보다 탈영병들이라면 ‘군’을 조직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 터였다.

    그 사실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위협을 느낀 주변의 영주들은 사병을 모집해서라도 그들을 소탕하려 들 테니까.

    “그, 그자들은 저희 산채를 빼앗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창고에 있는 식량에 보물들까지 전부 차지하고 앉아서는, 저희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흠.”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마녀 같은 여자는 매일같이 저희들을 불러다 본인들의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저희가 두들겨 맞고 구르는 것을 보며 웃고 있는 것을 보면, 소름이 다 끼친다니까요.”

    몸을 부르르 떠는 남자의 눈에 공포의 빛이 서렸다.

    말을 듣고 있던 메릴린이 짐짓 진지한 얼굴로 속삭였다.

    “스펜서 백작님을 부를까요? 그냥 단순한 산적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물끄러미 산적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온전히 거짓은 아닐 테지만, 다른 이들의 등을 처먹고 살던 남자가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우선 저자에게 안내를 부탁해 보죠. 가서 상황을 좀 봐야겠어요.”

    “그렇지만…….”

    “스펜서 백작님이라면 일이 커진 뒤에 불러도 될 거예요. 말을 듣자 하니 산채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으니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생각보다 상대가 산적들을 데리고서 제대로 된 ‘군’을 만들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쓸 만한 구석이 있을 테지.

    도로테아의 눈에 쓸 만하다 여겨지면 키엘이라도 탐내지 않을 리 없었다.

    ‘그의 손에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쥐여 주기에는 아직은 좀 곤란해.’

    욕심이 많은 사람에게 도구를 쥐여 주느니, 좀 더 알아보는 것이 낫지.

    도로테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메릴린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로 다시 말을 건넸다.

    “이름이 뭐죠?”

    “매, 맥입니다.”

    “좋아요, 맥. 당신이 왔다는 그 산채로 날 좀 데려가 줄래요?”

    “예?”

    맥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서 되묻자, 메릴린이 친절하게 말을 되풀이했다.

    “날 그 산채로 안내해 달라고요. 확인할 것이 있으니까.”

    “그, 그렇지만…….”

    “가면 안 되는 까닭이라도 있나요?”

    도로테아의 물음이 정곡을 찌른 듯, 펄쩍 뛰며 뭔가 말하려던 맥이 옆에 쓰러진 고목을 바라봤다.

    깊이 파인 자국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대단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열심히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계산하던 맥이 이윽고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비장한 얼굴로 꺼낸 맥의 말에 메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말했다.

    “마, 만일 누님께서 그 마녀를 제압하시고 저희 세력을 삼키게 되시면…….”

    “뭘 삼켜요?”

    메릴린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지만, 이미 잔뜩 긴장한 맥에게는 그녀의 표정이나 대꾸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누님의 오른팔은 제가 되게 해 주십쇼.”

    “……뭔가 착각하고 계신데요.”

    메릴린이 본인은 그저 연합군 사령부를 지원하는 자원봉사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도로테아가 선수 치듯 말했다.

    “우리 언니의 오른팔이 되려면 지금보다 노력하셔야 해요. 언니는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메릴린이 정색했다.

    “내 오른팔은 지금도 멀쩡히 내 몸에 달려 있어요.”

    다른 인간 따위 필요 없다고.

    맥은 메릴린의 대꾸를 듣지 못한 듯, 제법 밝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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