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정말이지, 인간의 집념이란 무시무시하다니까.
사신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글을 쓰다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듯, 펜을 쥔 채 쓰러져 있는 변경백의 시체에서는 썩은 내가 올라왔다.
오랜 시간 병을 앓아 온 몸뚱이는 어느 한곳 멀쩡한 곳이 없었다.
새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시신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었다.
“우선 루크를 밖으로 옮기는 게 좋겠어. 이곳에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좋은 영향을 받지 못할 테니까.”
그는 이곳에 머무르는 혼이 뿜어내는 부정한 감정에 휘말린 상태였다.
디기탈리스의 효과가 강한 편이긴 하나 애초에 루크를 아끼는 변경백이 치사량까지 썼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루크가 이 헐거운 줄조차 풀지 못한 까닭은, 그의 죽음으로 받은 강한 충격과 미련 가득한 변경백의 혼이 그를 옭아매어 두었기 때문이다.
- 뭐, 덕분에 인도되지 않은 혼을 찾아낸 것은 다행이지만.
이 장소에 떡하니 묶인 지박령을 본 사신이 골치 아픈 듯 미간을 꾹꾹 눌렀다.
자칫하면 이곳에 남아 머무르며 오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물귀신이 될 수도 있었다.
“천도제(薦度齋 : 죽은 이의 혼을 저승으로 보내어 주는 의식)를 지내 줄게.”
- 엇, 진짜?
사신이 반색했다.
콜린은 그녀답지 않게 ‘상대에게 후한 거래’를 하고, 대가 없이 능력을 쓰겠다고 먼저 운을 떼는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역시 어딘가 맛이 갔어.’
거래야 시일을 다투는 사안이라 그렇다 쳐도, 아무 대가도 없이 누군가의 천도제를 지내 줄 만큼 친절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신의 일을 덜어 줄 기특한 생각 따위라면 더더욱 아닐 테고.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
- ……무슨 부탁?
모처럼 일을 덜었다고 기뻐하던 사신이 그럼 그렇지, 하고 김이 샌 얼굴로 되물었다.
도로테아는 고개를 들어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있던 자리를 서서히 주홍빛으로 채워 나가는 새벽의 하늘은 어딘가 애처로운 느낌이 흘렀다.
“조만간 나의 할머님께서 영면을 맞이하게 되실 거야.”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모를 수는 없었다.
나날이 그녀의 곁에 늘어가는 쓸데없는 잡귀들이나, 허약해진 육신에 머물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생명력 같은 것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덧없이 스러져 가는 혼이 보였다.
하루하루 옅어지는 혼의 반짝임을 보며 마지막을 예감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곁을 지키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친 육신을 두고 먼 길을 떠나게 되면.”
그때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의 ‘도로테아’가 아무리 강해졌고, 대단한 힘을 휘두를 수 있어도.
신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결코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정중히 마중 나와서 맞아 주길 바라.”
- …….
“그리하여 불안해할 할머님께 친절히 설명해 주렴. 전생이 가고, 현생을 살아, 내생을 기다리는 인간의 삶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 드려.”
콜린의 시선이 담담히 말을 하는 도로테아에게 지그시 머물렀다.
“그녀의 손녀딸인 테아는, 누구보다 편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다 갈 거라고. 언젠가 또다시 만나게 될 내생을 기다리며 씩씩하게 살아갈 예정이니 마음 편히 놓으시라고 말이야.”
그러니 내 걱정에 늘 잠 못 이루는 그분이 편히 생을 건너갈 수 있게끔.
고단한 이전의 생을 잊고 새로운 삶을 얻어 홀연히 떠나갈 수 있게끔.
미련과 그리움은 남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기고, 당신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서 떠나도록.
늘 마주칠 때마다 애틋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못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그녀의 눈빛은 도로테아의 단단한 마음을 녹아내리게끔 만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저 편하고 필요한 마음으로 대하던 가족에게 서투르게나마 진심을 담게 된 것이.
조금만 더 일찍 마음을 깨쳤더라면.
어쩌면 몇 년은 더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많은 것들을 희생하여 구원할 만큼’ 소중하지는 않았던 할머님의 중독을 막지 않았던 것이, 뒤늦은 후회가 되어 덮쳐 왔다.
눈에 담긴 아쉬움과 후회를 읽어 낸 것처럼, 할머니는 말버릇처럼 그녀를 달랬다.
“이것이 삶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란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인간이잖니.”
그러니 그녀를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게끔 만들면서까지 잡아 둘 수는 없었다.
도로테아의 부탁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내 직위를 걸고 맹세해 주지. 네 할머님은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여 헤맴 없이 명계에 도달할 거야. 네 마지막 바람처럼 근심 없이 다음 생을 기다릴 수 있을 테고.
“좋아, 그거면 충분해.”
제 무릎에 뉘이고 있던 루크의 머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도로테아가 일어섰다.
허공으로 오늘따라 더욱 낭랑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삶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라,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이 역시 그와 같다네.
떠오르는 해를 따라 주홍빛으로 물드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콜린의 곁으로, 묘한 얼굴을 한 사신이 다가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옛 동료를 흘끔, 바라보던 사신이 입을 열었다.
- 인간으로 사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지?
솔직히 말해, 의외였다.
고고한 자존심에 강제로 복속시킨 인간 계집을 죽이겠다고 펄펄 날뛸 줄 알았건만.
부정하지 않는 옛 동료를 바라보던 사신이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 명계의 주인께서는 원한다면 네 족쇄를 풀어 주고 죄도 사하여 주시겠다고 했어.
생사부를 빼앗기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의무조차도 저버린 채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콜린은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는 대신 되물었다.
- 만일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설마, 정말로 이런 결론을 내릴 줄은 몰랐는데.
그분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꿰뚫고 계셨던 건가.
한숨을 삼킨 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내버려 두라고 하시더군. 나는 한낱 인간 밑에서 부림을 당하느니 당장 돌아오겠다고 말할 줄 알았지만.
사신은 마지막 구절을 읊은 도로테아가 깊이 고개를 숙인 채 혼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며 덧붙였다.
- 지금의 네 선택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네.
저 계집의 행동을 보고 있자면 왜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들어.
내가 아주 잠깐이지만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것은 사신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몹시 생소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날이 밝자, 도로테아는 놀랍게도 ‘멀쩡하게 잠든’ 7황자를 질질 끌고서 돌아왔다.
우드는 실종된 7황자가 이토록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데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그토록 경계심 많던 황자는 누가 질질 끌고 가든, 업어 가든 간에 상관없다는 듯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수많은 개고생이 다 이 황자의 실종 때문이었건만.’
당사자는 잠을 처자고 있어?
울컥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로테아는 드물게도 몹시 유하고 관대하게 7황자를 좀 더 재워도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은 허할 거야. 정신적인 지주를 잃었으니까.”
“뭘 잃었단 말이냐. 나야말로 지금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다. 행정 따위는 해 본 적도 없건만, 비는 인력 탓에…….”
“변경백이 죽었어.”
“……?!”
투덜대던 우드의 몸이 덜컥, 굳었다.
마치 오늘 아침 날씨가 좋았어, 처럼 가볍게 던진 말에 그는 제 귀를 의심하듯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서 소녀를 바라봤다.
“누가, 죽었다고?”
“변경백. 베크만 드웰로가 죽었어.”
“…….”
“아주 오래전부터 앓아 오던 병이 중해졌거든. 그 때문에 이토록 조급하게 움직인 거야.”
판단 감각을 상실할 만큼.
아끼는 사람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서라도, 목표를 이루겠다는 그 집념만이 남았다.
죽음을 앞두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았으리라.
“루크를 제 곁에 묶어 두고, 이곳 요새를 시작으로 주변 영지들과 병합하여 황도의 황자들을 제거할 생각이었어. 군주의 자리에 오를 핏줄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면 황제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질 테니까.”
“그런 무모한…….”
“죽음을 앞둔 상태니까. 이미 잃을 것이 없는 자가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어.”
“…….”
“다만 그건 제가 진정으로 아끼는 이를, 원치도 않는 자리에 묶어 두는 일이 되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겠지.”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루크는 결국 군주의 자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제국이 안정되지 않으면, 누군가가 군주의 자리에 올라 그 막중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혹은 위정자가 그 자리에 올라 제 욕망만을 탐한다면 더 많은 목숨이 희생될 테니까.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억지로 올라 평생 의무에 묶인 채 살아가는 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나 봐.”
이미 루크는 살아남고자 발버둥에 발버둥을 치느라 딱히 삶에 의욕은 없는 상태였다.
누려 본 적이 없으니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으며, 그 삶을 지켜야 할 까닭조차도 본인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찾으려 했다.
굶주린 백성, 눈앞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병사, 몸을 날려 자신을 살리고 대신 죽은 장수들…….
살아남고자 버둥거리는 대신 웅크려 제 존재를 숨기고 힘을 비축하기만 했던 윌리엄과는 정반대였다.
도로테아의 말을 듣던 우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깊이 잠든 황자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깊은 잠이, 그가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지금도 루크의 혼은 지칠 대로 지쳐 뉘일 곳 없이 비틀거리고 있는걸.”
자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조차도 숨길 만큼, 변경백을 너무나도 따랐던 것일 터였다.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 있던 우드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보잘것없는 훈련병에 불과했던 그의 재능을 이끌어 내고, 발탁해 중히 썼던 것은 베크만 백작이었다.
“네 신분이 무엇인지보다, 네가 무엇을 할 줄 아는지가 이곳에서는 더 중하다.”
신분을 걸고넘어질 거라며 걱정하는 심복의 말에도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하여 우드는 십인장조차도 힘겨운 평범한 농민의 신분으로 백인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심지어, 백작은 작위 수여까지도 염두에 두는 듯했었다.
떠나기 직전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따라붙어 슬쩍 건네던 돈주머니를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걱정 마. 잘 보내 주고 왔으니까. 천도제까지 지내 주었으니 홀가분하게 떠났겠지.”
남은 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기긴 했지만.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분의 마지막이 끝까지 씁쓸하지 않아 다행이로군.”
우드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고맙다. 그리 마음 써 줘서.”
도로테아는 말없이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어, 자기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의 우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씁쓸한 얼굴을 한 그는 오랜 시간 그 조그만 손에 제 머리를 맡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곤히 자고 일어난 스탠은, 아침부터 제 곁에 누워 있는 낯선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떨어졌다.
“사, 사라!”
밤을 새고 돌아온 도로테아는 졸린 눈을 부비며 스탠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곤히 잠든 황자를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이 남자가 내 침대에!”
“괜찮아. 그냥 둬도 돼.”
“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바라보는 스탠을 향해 도로테아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래 내가 기르던 양이야.”
“……양?”
“그러다 잃어버렸는데, 애가 둔해 빠져서 길을 잃고 찾아오질 못하더라고.”
“…….”
“그래서 어젯밤에 잠깐 나가서 찾아왔지. 괜찮아. 기르는 가축이라 생각하는 것보다는 말을 잘 듣는 편이야.”
스탠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기르던 양? 길을 잃어? 가축이라 말을 잘 들어?
누가 보아도 인간이 틀림없는데.
자신의 여동생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멀쩡한 남자를 가축 취급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거대한 검을 허리춤에 찬 데다, 잘 단련된 듯 단단하고 훌륭한 몸을 가진 건장한 남자를 두고.
“정말 괜찮다니까. 그보다 좀 더 자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쉬며 웅얼거리다 다시 잠에 빠져드는 도로테아를 보던 스탠이 울상이 된 얼굴로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양은 아닌걸.’
하나하나 세심하게 뜯어보던 소년은 문득, 남자에게서 몹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윽.”
그러고 보니 남자가 걸친 옷은 거의 거적때기에 가까웠다.
곳곳이 찢어진 옷뿐만 아니라, 몸도 오랫동안 씻지 못한 사람처럼 고린내를 풍겼다.
‘양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을 잃고 헤맨 것만은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자신의 침대를 길 잃고 헤매다 돌아온 양(?)에게 양보한 소년은 시녀를 불러 갈아입을 옷과 물에 적힌 천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조그마한 몸으로 끙끙대며 7황자의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