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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76화 (176/242)

176화

그 무렵, 황도에 있는 콜린 하이클레어의 저택에는 뜻밖의 손님이 방문했다.

코제트는 저택의 안주인으로서,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는 메릴린을 상냥하게 맞이했다.

“어머나. 어서 와요, 메릴린.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환대 어린 인사에 메릴린이 더욱 괴상한 얼굴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위층에서 내려온 필립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영애.”

“그, 그러게요…….”

매끄러운 필립의 인사와는 달리 웅얼거리듯 답하던 메릴린이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이렇게 맞아 주시니, 저로서는 기쁠 따름이에요. 다들 평안하시지요?”

한결 또렷해진 목소리로 건넨 안부 인사에 코제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들 잘 지내고 있답니다. 아, 남편이라면 곧 올 거예요. 며칠 내내 회의에 참석하느라 바쁘긴 했지만, 오늘은 일찍 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무는 메릴린을 지켜보던 필립이 능숙하게 팔을 내밀어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모처럼 저택에 발걸음 하셨으니 저와 잠시 얘기를 나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접실로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주시겠어요, 어머니?”

아들의 말에 코제트가 하녀장을 불러 지시를 내리는 사이, 응접실로 향한 두 사람은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메릴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고 보니 슬슬 레어 가문에도 징집령이 들어갔겠군요.”

필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움찔했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징집령이 떨어졌죠. 제 머저리 같은 오빠도 거기에 포함되었고요.”

“확실히 황도의 징집 대상 중 귀족 가문 자제들은 저희 아버지가 관리하고 있지요. 영애의 부탁이라면 아마도…….”

“아뇨!”

메릴린이 큰소리로 황급히 필립의 말을 잘라 냈다.

“그런 부탁을 할 생각은 없어요.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녀는 격한 부정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그런 부탁을 한다고 해서 들어주실 분도 아닌 걸요. 게다가, 안 그래도 심각한 인간 불신에 걸려 계시는 분께 그런 부탁을 드리는 건 너무 결례일 것 같아요. 그분이 세상에 가진 마지막 희망조차 저버리게 만드는 것이 제가 되길 원하지는 않거든요.”

도로테아와 함께 붙어 있었으니 알고 있었다.

콜린은 말버릇처럼 ‘인간들이란’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이란 것들은’ 따위의 말들을 내뱉으며, 몹시도 경멸스러운 기색으로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을 보고는 했다.

그의 시선이 그나마 누그러들 때는 오로지 시신을 마주할 때 뿐.

아직도 ‘죽음을 마주하는 게 콜린의 마음이 진정으로 편해지는 순간’이라던 도로테아의 말이 귀에 선했다.

오죽 인간들에게 실망을 많이 했으면 죽은 시신 앞에서야 겨우 편안한 얼굴을 한단 말인가.

“그런 분께 또 다른 실망을 안겨 드리면, 두 번 다시 인간에게 희망을 갖지 못하실 것 같아서요.”

이쯤 되면 혼인을 하여 자식을 보았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짐짓 심각해 보이는 메릴린의 얼굴에 필립이 가볍게 웃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태어나 살았던 분이 아니셔서 그래요. 그나마 요즘은 인간다워지시고 있죠.”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네요. 아니,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횡설수설 답하던 메릴린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제법 큰 결심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 들은 적이 있는데요. 콜린 경께서 보급 부대를 도울 자원 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다고.”

“네, 그렇죠.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에게는 필요한 것은 무기뿐만이 아니니까요.”

“제가 거기에 참여하고 싶어서요.”

뜻밖이라는 듯 잠시 눈을 깜빡인 필립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영애가 직접 말입니까?”

“네.”

아마 꽤 오랜 시간 고민했던 모양인지 메릴린의 눈 밑은 거뭇거뭇했다.

굳은 결심이 서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필립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가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지원 가능할 겁니다. 귀족 영애가 전장의 최전선까지 향하는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니, 다들 놀라긴 할 테지만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별난 인간 취급이야 도로테아 곁에 있으면서 이미 실컷 받아본 일이었다.

“저는 그냥,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료한 일상을 지내는 게 너무…….”

말을 흐린 메릴린이 입술을 짓씹었다.

7황자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테아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전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상 현상들이 보고되어 오고 매일같이 궁을 드나들며 대책 마련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황도에 머무는 대부분의 중앙 귀족들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차를 마시고, 유유히 음악을 감상하며, 새로 들여온 옷을 자랑하고, 무도회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거나 간간이 자선 사업이랍시고 모임을 열기도 했다.

“제 주제에 거나한 일을 해 보겠다거나,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꿈을 꾸지는 않아요.”

그런 건 귀족 영애로서 ‘해야 할 일’과는 거리가 먼 일이기도 했다.

하이클레어 가문에서 주최하는 자선 경매에 보석함에서 굴러다니던 진주 목걸이 하나만 내어 놓고 의무를 다했다며 외면한들, 그 누구도 그녀를 손가락질할 리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애도, 혼란스러운 정국에 자신의 혼사를 걱정하는 영애들은 많을지 몰라도 자신이 보탬이 될 만한 일을 고민하는 영애는 없으리라.

“파비안 영애는, 그녀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해 어린 성녀님을 가르치고 있어요. 사도가 강요해서든 도로테아의 으름장이 무서워서든 간에, 이 상황에서 그녀는 도움이 되고 있잖아요.”

“무언가를 꼭 하지 않으셔도 테아는 영애를 아낍니다.”

필립의 부드러운 대꾸에 메릴린이 나직이 답했다.

“알아요. 그 영애의 ‘아낌’은 도가 지나치고 버겁긴 하지만, 곰곰이 뒤돌아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없는 제 인생이 딱히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은 안 들더군요.”

아버지의 주선에 따라 적당한 가문에 시집가서는 남편을 내조하며 아이를 낳고,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가문의 영광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하는 삶이라…….

그동안 도로테아 곁에 있으면서, 메릴린은 무수히 많은 ‘죽은 자’들의 사연을 들어 왔다.

그중에서는 귀족 영애들의 귀감이 될 만한 귀부인이나, 평생을 영광스런 자리에서 화려함만을 누려 온 귀한 가문의 영애들도 없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그들이 행복을 거머쥔 것은 아니었다.

“실은 이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발악이었는데…….”

제이콥의 저택을 방문해 노부인을 마주한 순간 현실을 깨달았다.

만일 자신이 도로테아가 보여 주는 ‘비일상’이 버겁다는 이유로, 그와의 ‘무난한 혼인’을 택하면 앞으로 어떤 나날들을 살아가게 될지.

메릴린이 한숨을 쉬었다.

“좋든 싫든 간에 나는 변했어요. 그녀가, 나를 변하게 만들었죠.”

순순히 사실을 인정한 그녀가 필립을 보며 놀랍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저는 필립이 이곳에 남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걸요. 당연히 영애를 찾아 떠날 줄 알았는데요.”

실종된 그녀가 어디 있을지는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립은 그 누구보다 도로테아의 속내를 잘 파악할 만한 인물이었고.

“어차피 저는 이제 혼담이 들어오기는 글렀어요.”

대낮에 대로에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 외치신 스승님의 선언 덕분에.

메릴린의 눈에 체념 어린 기색이 서렸다.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애써 꾹 참아 낸 필립이 메릴린을 위로했다.

“테아는 그저 시간을 벌어 주려 했던 겁니다, 메릴린. 사실은 도망가듯 하는 결혼이 그리 내키지 않았잖습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남작이 당신을 이용하려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을 테고요.”

“알아요.”

짤막하게 답한 메릴린이 불퉁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더더욱 빚진 기분이 싫다고요. 상대에게 사정없이 휘둘리게 되잖아요.”

이미 빚을 지기 전부터 휘둘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속말을 꿀꺽 삼킨 필립이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지원하고자 하셨다면 명단에 이름을 올리시면 그만일 것을 굳이 이곳까지 걸음하신 까닭이 따로 있으신지요.”

“아, 그거요. 저희 아버지가 알게 되면 분명 일이 어그러질 것 같아서요. 몰래 떠나려고요. 신분을 세탁하든 명단을 조작하든 해 주셨으면 해서요. 콜린 경께 부탁드리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필립에게 부탁해도 될 일이었네요.”

“…….”

신분 세탁을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 귀족 영애와 마주한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테아의 영향인가.’

심지어 필립이라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저 굳건한 신뢰가 더욱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물론 테아의 일을 도우며 그리 합법적인 삶을 살아오진 않았지만…….

‘도대체 나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있길래.’

신분 세탁 정도는 눈감고도 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걸까.

“가능은 합니다만.”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필립은 마침 코제트의 채근에 못 이겨 퇴근하기가 무섭게 응접실로 들어서는 콜린을 보며 말을 이었다.

“명단을 작성하는 것은 아버지긴 해도, 그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는 책임자는 다른 분이십니다.”

“그래요? 그럼 어려울까요?”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한 필립이 눈을 곱게 휘며 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동행하신다면 그분도 아마 흔쾌히 영애를 받아 주실 겁니다.”

“그래요?”

그분이 대체 누구길래.

메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콜린을 향해 부탁의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그녀를 바라보던 필립이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메릴린 영애.”

“네?”

“좀 전에, 제가 왜 이곳에 남아 있느냐고 물으셨잖습니까.”

필립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눈을 끔뻑이는 메릴린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 애는 늘 바쁘고 언제나 먼 곳을 보고 있죠. 나로서는 그 애를 붙잡아 둘 수도 없고, 그 애의 걸음에 맞춰 걸을 만큼 능력이 대단하지도 않아요.”

“충분히 대단하신 것 같은데요.”

빙긋 웃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는 세상과 그 애가 보는 세상은 다르니까요.”

그녀는 늘 누군가의 생생한 죽음을, 혹은 죽어 있는 존재를 마주한다.

해가 뜨는 아침부터 잠이 들기 전 늦은 밤까지.

그녀의 눈에 고스란히 비칠 죽은 자들과 그들의 남긴 감정의 찌꺼기, 살아 있는 자들의 고통은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번 그녀의 시야를 ‘빌려’ 그녀가 보는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허락받았던 날…….

필립은 제 눈앞에 비친 광경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볼 수 없는’ 소년으로서는 그녀를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저는 그 애에게 집이 되어 주기로 결심했어요. 옆에서 걷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그 애는 집을 참 좋아하니까요. 언제고 어떤 일이 있건 간에 결국은 돌아올 겁니다.”

“…….”

“그러니 저는 그 애가 안심하고 돌아올 수 있게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면서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입니다. 메릴린과 함께, 언제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필립의 말에 한참을 멀거니 아무 말도 못 하고있던 메릴린이 간신히 말을 짜내어 답했다.

“그…… 렇군요. 감사해요.”

*   *   *

어딘가 몹시,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콜린의 뒤를 조심스레 따르던 메릴린은 두드리기도 전에 열리는 저택의 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정중하게 차려입은 키엘 스펜서가 생글거리며 손수 문앞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수려한 외모의 젊은 백작이라.

여느 귀족 영애들이라면 사뭇 마음이 흔들릴 만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진정한 혈통과, 황제의 신임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러나 인사를 받은 메릴린은 별 감흥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키엘의 시선은 줄곧 이곳을 함께 방문한 콜린에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몇 번 이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메릴린과 달리 콜린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그 단호한 말 속에는 간단히 할 말만 하고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메릴린 레어 남작 영애가 큰 결심을 하셨고, 곧 떠나고 싶어 하시오. 물론 그녀의 가문이 모르게끔.”

“아하.”

키엘이 싱긋 웃으며 메릴린을 바라보았다.

어엿한 귀족 가문의 영애를 빼돌려 전장으로 보내는 일이니, 자칫하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일인데도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남작이 모르게끔 명단에 이름을 올리시겠다는 이야기지요. 그 정도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영애께서 함께해 주신다니, 저로서는 기쁘기 그지없군요.”

흔쾌히 허락한 키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고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저러나 콜린 경께서는 아끼는 어린 조카의 친구가 염려되지는 않으십니까? 곧 위험한 험지로 떠나게 될 메릴린 영애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동행하시는 것이 어떠신지.”

“와…….”

이미 수만 번 목격했으나, 볼 때마다 새로운 키엘의 유려한 ‘권유’를 본 메릴린이 감탄했다.

이런 부분에서도 핑계를 찾아낼 수 있구나.

콜린은 이미 가정이 있는 몸이라는 점에서, 키엘의 행동을 딱히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파고드는 집요한 근성만큼은 대단했다.

그런 상대의 은근한 제안을 못 들은 척 넘긴 콜린이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어느 곳으로 배치할 생각이오? 물론 현 상황에서 변경 그 어디든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겠소만, 영애에게 최전선에 나서라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물론 그렇다고 행정 업무를 덥석 맡기는 것도 곤란할 테니, 사무 보조는 어떻소?”

그녀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돈이 신기루처럼 빠져나가는 군에서 그 무엇보다 철저해야 하는 것이 행정 재무의 영역이었다.

보조 업무를 통해 행정관들의 일을 줄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콜린의 제안에 생각에 잠겨 있던 키엘이 다른 의견을 냈다.

“아니면 부상병들의 치료를 돕는 것은 어떻습니까? 비록 실력까지 제가 평가할 수는 없겠으나, 그녀가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에서 사사한 것들이 많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듣고 있던 메릴린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모였다.

얼굴을 살짝 붉힌 메릴린이 달싹이던 입술로 고백했다.

“저,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는데 치료는 좀 어려워요.”

에이든이 가르친 수많은 훈련과, 후작에게 직접 사사한 군사론 및 병법 지식 그 어디에도 치료에 관한 부분은 없었다.

“죽을 만큼 다치면 기합으로 이겨 내면 그만이라고 스승님이 늘 강조하셨거든요.”

게다가 그녀와 함께 연무장에서 굴러다녔던 것은 바로 ‘그’ 데인이었다.

“…….”

“…….”

전투에 무지한 귀족 영애를 훈련시키며 사기 친 2인조를 떠올리자 두 사람 다 할 말을 잃었다.

그나마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콜린이 다시금 물었다.

“그럼 차라리 자신 있는 방면을 말해 보는 것이 좋겠군.”

“어, 그럼. 박투(搏鬪)? 저는 육중한 무기를 휘두르는 것보다 민첩성을 살리는 게 좋더라고요. 아, 창을 휘두르는 건 나름 재미있지만요.”

키엘은 수줍게 박투술을 입에 담는 붉은 머리카락의 귀족 영애를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전장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도우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

“…….”

용맹하기로 따지자면 징집당하고 울먹이며 끌려가는 웬만한 귀족 자제들보다 훨씬 훌륭한 태도이긴 했다.

아니, 너무 지나치게 용맹한 것 같은데.

키엘 스펜서도, 콜린 하이클레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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