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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170화 (170/242)
  • 170화

    마을 사람들은 마치 죄를 지은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조그마한 소녀 앞에 일렬로 섰다.

    다들 스스로도 어째서 도로테아 앞에 선 순간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찔끔하게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최소한의 양심은 존재했던 것일까.

    ‘살았으면 좋겠다’던 스탠의 말을 들었던 몇몇 사람들은 차마 소년과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노인이 물었다.

    “우리에게 아직도 볼일이 남은 게냐?”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도로테아는 가진 것 대부분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에게 신의 눈물을 요구하고, 고아를 부려 먹을 수 있게끔 중독시키도록 종용한 이들이 누군지 알고 싶어요.”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것은 인간이 탐할 수도, 애초에 다룰 수도 없는 힘이에요. 당신들이 끊임없이 퍼 올렸던 검은 물은 액(厄) 그 자체. 보통의 인간은 다룰 수 없겠지만…….”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엉뚱한 이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위험한 도구가 될 터.

    “땅의 정기를 어지럽히고, 인간의 혼을 타락시키며, 부정한 것들을 끌어들이는 매개로 쓰이죠.”

    조곤조곤히 일러 주는 말에 사람들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레함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는 소녀를 바라보다, 할린에게로 힐끔 시선을 주었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할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 나 그렇게 보지 마요. 나도 여기 같이 왔잖수. 저 어린애도 그렇고, 여긴 수상한 것투성이라 뭐부터 조사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구.”

    투덜대는 할린의 말에 이어 제타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들 단체로 미친 것이 아니라면, 뭔가 켕기는 것이 있긴 한 모양입니다. 조사해 봐야 할까요?”

    “…….”

    그레함의 눈이 줄에 묶인 이들을 향했다.

    탈영병들의 신변을 확보했으니 자신들의 임무는 끝난 셈이었다. 설령 마을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비대에 넘겨 영주가 직접 처리할 일일 터.

    지금이라도 빨리 복귀를 택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지만…….

    “그게 대체 뭐가 나쁘단 말이냐!”

    그레함의 눈이 큰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좀 전까지 소녀를 향해 보내던 애타는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들은, 저희들이 지켜 낸 그 목숨보다도 잃은 재물과 터전을 더 가슴 아파 했으며 자신들의 죄를 들먹이는 소녀의 말에 분노했다.

    좀 전까지 제 아내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던 빌리가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어차피, 어차피 저놈은 비참하게 살다 죽을 목숨이었어. 집도, 먹을 것도, 제대로 된 보호자도 없는 놈이 어딜 가든 비슷한 신세일 것 아니냐. 그런 아이를 거두어 쓴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본인도 동의한 일이잖냐!”

    도로테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왜 비밀로 하셨어요?”

    “…….”

    “스탠에게 준 음식도, 그가 하는 일도. 스탠은 그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잖아요?”

    알고 있었으니까.

    끝끝내 소년이 맞이하게 될 결말이 얼마나 비참할지, 소년이 가져다 준 ‘검은 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두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인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으니까.

    “하나만 희생하면 우리 모두가 편해지는 일이었어.”

    “그 애도 동의한 일이 아니냐!”

    동의하게 만들었지.

    당신들이, 그 길 외에는 없는 것처럼 아이를 길들였으니까.

    도로테아의 새까만 눈에 고개를 떨군 마을 사람들이 담겼다.

    연민도, 동정도, 이해도 없는 무감각한 눈빛.

    들여다보면 볼수록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그 시선을 참아 내지 못한 누군가가 손에 쥔 곡괭이를 높이 들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응?”

    남자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소녀와 소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다들 멈추십시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제타가 소리치며 아이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궁지에 몰린 쥐나 다름없는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으앗!”

    민간인을 향해 차마 검을 휘두르지 못한 할린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이들의 기세에 잘못하여 검을 놓쳤다.

    그대로 날아간 검은 하필이면 줄줄이 묶인 상태로 앉아 있던 한 탈영병 앞에 떨어졌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탈영병들 중에서 눈치 빠른 이 하나가 잽싸게 검을 주워 들어, 자신과 연결된 포승줄 하나를 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할린이 머리를 쥐어뜯는 사이, 그레함이 재빠르게 달아나는 탈영병의 뒤를 쫓았다.

    다시 잡히게 될 경우, 어떤 처벌을 당할지 모를 리 없는 탈영병은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그 뒤를 쫓던 그레함이 상대에게 닿을 듯 말듯 거리를 좁혀가던 와중이었다.

    “……!”

    누군가가 도주하던 탈영병을 막아섰다.

    탈영병은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으나 포박된 손으로 휘두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힘이 실리지 않았고, 가볍게 제압당해 땅에 고꾸라졌다.

    “으윽.”

    탈영병을 제압한 누군가는 앞으로 고꾸라진 이의 등을 힘주어 밟았다.

    “협조에 감사드…….”

    인사를 건네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그레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마주한 상대의 얼굴이 지나치게 낯익었다.

    “……대장.”

    우드 데버.

    평민으로서 드물게 그 능력을 인정받아, 백인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남자.

    살아 있는 전설이자, 그들의 자랑이었던 상관.

    그레함이 독전대(督戰隊 : 전투를 감시하고 독려하며, 탈영병이 발생할 경우 추적하는 부대)에 들어간 이유이자, 줄곧 찾아 헤맸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헤어질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   *   *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레함을 대신해 제타와 할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맙소사.”

    “진짜 대장이잖아?!”

    도로테아는 스탠의 손을 잡아끌고 뜨악한 얼굴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지나쳐, 저벅저벅 걸어 우드의 앞에 섰다.

    “늦었잖아.”

    앳된 목소리에 그레함과 마주하고 있던 우드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앞에는 난생처음 보는 낯선 외양의 어린 소녀가 서 있었다.

    찌이- 찌.

    어깨에 매달려 있는 다람쥐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낀 채 그를 향해 무언가 말을 건넸다.

    도로테아는 미간을 좁힌 채 침묵하고 있는 우드를 연이어 힐난했다.

    “하마터면 일의 전말을 알기도 전에 모두 묻힐 뻔했잖아. 겨우 꼬리를 잡았건만, 그 단서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그 순간, 우드의 발아래에 기절해 있던 탈영병이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르작대는 남자를 한 번 더 짓이겨 밟아 준 우드가 소녀를 찬찬히 살폈다.

    칠흑같이 검은 눈이 살아 반짝이는 야위고 앳된, 소녀.

    새까만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드리워진 여자아이는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몹시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익숙한 느낌이 그의 감각을 일깨웠다.

    마주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상대를 자괴감에 빠뜨릴 수 있는 저주받은 주둥아리.

    남의 고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시할 수 있는 철저한 자기중심주의.

    “듣고 있니?”

    무엇보다도 출생의 비밀을 의심케 만드는 저 독특한 말투.

    “정말로 너로군.”

    한숨 섞인 떨떠름한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태도는 실례잖아.”

    그제야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던 그레함이 입을 열었다.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도대체 소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떻게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우드와 이토록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는 거지?

    심지어 오랜 시간 끝에 겨우 재회하게 된 우드는 눈앞에 있는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롯이 소녀만을 살피고 있었다.

    눈을 말똥말똥 뜬 소녀에게 특별히 다친 곳이 없어 보이자, 무뚝뚝한 말투와는 달리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던 시선에 옅은 안도감이 서렸다.

    흘끗, 그레함을 바라본 도로테아가 우드 곁으로 다가서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웃었다.

    “아무튼 잘 왔어, 아빠.”

    “……?!”

    안 그래도 생각보다 엮인 사람들이 많아 어떻게 수습하나 싶었는데 늦긴 했어도 적절하게 나타나 주었으니.

    역시 권속이란 써먹으라고 있는 존재지.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 말대로 저 마을 사람들이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있었지 뭐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우드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소녀의 말은 각자의 사정으로 혼란스러운 사람들 사이에 벼락을 투척했다.

    소매를 잡아당기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뱉어 내는 도로테아를 기겁하며 뿌리치려던 우드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얌전히 맞춰. 내 꼴을 보았으면 알겠지만, 당분간은 내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라고 밝힐 수 없는 입장이잖아.

    “…….”

    - 지각하느라 한 것도 없이 터덜터덜 나타난 네게 기껏 모든 공과를 다 넘기겠다는 거잖아. 감사히 받기나 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건, 그로 인해 어떤 공치사를 받을 수 있건 간에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네가 왜 내 딸인데?!’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우드를 올려다본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 봐라?

    “아빠.”

    간드러진 목소리에 우드의 몸이 움찔, 했다.

    “눈 떠.”

    그 허접한 육신에다가 잡신을 처넣고 살풀이하기 전에.

    *   *   *

    이성을 잃고 어린 소녀와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결국 탈영병들과 함께 묶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모든 수단이 다 막혔음을 깨달았는지 전의를 상실한 얼굴이었다.

    스스로 죄를 인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도 걷어차 버린 이들인지라 구차스럽게 할 말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살아갈 터전과 가진 대부분을 잃은 데다, 저지른 죄상마저 밝혀지고 나면 이들에게 ‘미래’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을 터.

    아이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지만……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의 잘못 탓에 자신들이 놀리던 스탠과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스스로의 욕심에 불러들인 재앙에 짓눌린 게지.”

    자포자기한 듯 보이는 노인은 반쯤 실성한 듯 웃었다.

    도로테아의 속삭임에 우드가 물음을 던졌다.

    “너희에게 샘의 위치를 알리고, 이 모든 일들을 지시한 진짜 배후는?”

    끈질긴 추궁에 노인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애초에 그리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해서 정말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을 몰랐겠느냐. 그들이 가르쳐 준 방식으로 만든 육포를 먹는 이들이 천천히 조금씩 미쳐 가는 것을 고스란히 보았는데.”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더욱더 외면하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그들과는 어찌 접촉하지?”

    “얼마 전부터 연락이 끊겼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야. 혹여 길어 놓으면 와서 가져갈까 싶어 저 아이에게 계속 일을 시켰지만,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꼬리를 밟혔음을 알았을 리는 없다.

    애초에 이곳이 ‘단서’임을 알아낸 것 또한 신이 자신을 이곳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니까.

    그렇다면 갑자기 상황이 급변한 까닭이 무엇일까.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긴 도로테아 곁에서 리리가 장난치듯 주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는 여인 중 하나의 장신구가 낯익었다.

    ‘제국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의 물건.’

    생각해 보니 최근 몇 년간 귀족들 사이에서 교역으로 흘러들어오는 이국의 물건들이 많아졌다.

    클레어 파인트의 방에 있던 장신구나, 메릴린의 맞선 상대의 집에도 비슷한 기운의 물건이 있었지.

    ‘만일 그것들이 상단을 통해 흘러든 것이라면.’

    누군가 검은 물을 이용해 물건에 부정을 묻히고, 그것을 제국 전역으로 흩뿌린다.

    그러기에는 상단을 이용하는 것이 안성맞춤이겠지.

    “공교롭게도 4황자의 아내는 로헨 왕국 출신인 데다, 상단을 운영하는 오라비가 있고 말이야.”

    연락이 끊긴 까닭도 알 수 있었다.

    덜미를 잡힌 케빈이 제 동생조차 버리고 꽁지 빠지게 달아났으니 이들에게 연락을 전할 정신이 남아 있었을 리가.

    ‘일단 샘을 막았으니 급한 불은 끈 셈인가.’

    필요한 것은 모두 알아냈으니 이제 이들에게 다른 볼일은 없었다.

    누군가는 흐느끼고, 누군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잘못을 빌었다. 또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넋을 놓았고, 또 누군가는 화를 내고 있었다.

    각자의 행동은 달라도 다들 다가올 미래의 결말을 눈치챈 듯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로테아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남의 희생을 종용했을 때부터 스스로 업을 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죄책감은 무뎌지고, 누리는 것들은 당연한 것이 되었으리라.

    강자가 되는 일에 익숙해진 자들은 약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다.

    비로소 다시금 기억해 내겠지.

    자신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초라한 시절이 있었음을.

    “우…….”

    고개를 돌려 제 권속을 찾으려는 도로테아의 눈에 묘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대장’이라 불렀던가.

    탈영병을 쫓아온 세 사람과 우드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와 긴장감이 감돌았다.

    스탠은 그 옆에 걸터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로테아는 말없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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