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이 빌어먹을 놈의 새끼가! 왜 못 처먹은 개새끼처럼 빌빌대?”
거친 발길질에 스탠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소년의 눈앞이 흐릿해져 왔다.
오늘따라 그를 덮친 지독한 갈증과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눈앞이 핑, 하고 돌았다.
남자들 중 하나가 그의 발치에 육포 조각을 던졌다.
“이거나 씹어라.”
이를 악문 소년은 남자가 이쪽을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머니에 육포 조각을 쑤셔 넣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창고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조그마한 소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받은 멀건 국으로 하루를 버텨야 할 텐데, 입맛이 없는 듯 소녀는 좀처럼 음식을 섭취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육포만큼은 관심을 보였으니까.’
씹는 척 어설프게 우물거리는 소년을 바라본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윽고 소년의 주머니에서 손도 대지 않은 육포 조각을 발견한 남자가 거칠게 스탠의 입속으로 육포를 쑤셔 넣었다.
“이러니까 힘도 못 쓰고 빌빌거리지! 이 모자란 놈의 자식이!”
“어이, 적당히 해 둬. 뻗어서 오늘 치 일도 못 하면 어쩌려고?”
옆에서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리는 이의 말에 주먹질을 멈춘 남자가 씨근덕거렸다.
스탠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제 입에 든 것을 씹었다.
‘괜찮아. 그만큼 빨리 끝내고 돌아갈 수 있겠지.’
질겅질겅 씹어 댄 육포 덕인지,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 싶었는지 남자가 스탠의 뒷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자, 이제 돌아가서 일해. 또 쓸데없이 허튼 짓을 하면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다!”
귀가 얼얼해지는 으름장에 스탠은 다시 좁은 토굴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양동이로 도무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새까맣고 끈적거리는 샘물을 한가득 퍼 올렸다.
이 좁은 토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몸집이 작은 스탠뿐이었다.
‘이상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손에 달라붙은 끈적끈적한 액체는 저들이 건네준 특수한 통이 아니면 시간이 지난 뒤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도대체 이게 뭘까?’
뭐길래 다들 퍼 나르지 못해 안달이지?
하루라도 쉬었다가는 큰일 난다는 듯, 재촉하는 태도를 보면 무척이나 중요한 것일 텐데.
제 손 사이로 미끄러지듯 흐르는 검은 물을 바라보던 소년이 한숨을 쉬었다.
“스탠, 이 빌어먹을 자식아! 누가 쉬라고 했냐!”
움직임이 굼뜬 것을 알아챈 남자의 재촉에 소년이 다시 손을 뻗었다.
스멀스멀, 그의 손을 스친 검은 물 일부가 바닥에 흘렀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흙바닥을 느릿하게 흐르던 검은 물은 땅 속으로 흡수되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 * *
마지막 통을 모두 채운 뒤 소년을 끌어올린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요즘 아내와 냉전 중인 탓에 기분이 좋지 못한 빌리가 스탠에게 일방적으로 화풀이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빌리를 말리거나 스탠을 감싸지 않았다.
그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돌릴 뿐.
“네놈은 말이야. 우리가 써 주지 않으면 어차피…… “
매섭게 쏟아지던 빌리의 말이 멈추자, 스탠이 고개를 들어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저거 그 계집애 아냐?”
“응?”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터덜터덜 걸어오는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스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라!”
소녀는 느릿하지만 꾸준한 걸음으로 다가오다 소년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휘청거리며 달려가는 스탠의 뒤에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꼴에 챙기기는.”
“저도 사내라 이거지.”
“같은 처지끼리 잘도 만났구나. 정신이 온전치도 못한 계집이라더니.”
뒷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소년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를 보며 다급히 입을 뗐다.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누가 네게 여길 알려 줬어?”
“멜.”
그녀가 아무렇게나 주워들은 이름을 올리자 스탠의 얼굴이 대번 어두워졌다.
보아하니 그 또한 몇 번이고 괴롭힘을 당한 전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척 보아도 그리 좋은 성미를 타고 나진 않았지.’
누가 보아도 심술이 찬 관상이었다.
업을 쌓은 것은 어미라고는 하나, 타고난 성미로 보건대 그 또한 어미보다 더한 길을 걸으면 걸었지 나은 길을 걷지는 않았으리라.
“네가 준 육포를 먹고 싶어 했어.”
“그, 그걸 뺏겼어?”
속상한 듯 울상을 짓는 스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악스런 손이 그를 밀쳐 냈다.
흥분한 듯한 빌리가 눈을 부릅떴다.
“그걸 다른 애들에게 먹였느냐?”
“내가 먹이지 않았어요. 그 애들이 탐을 낸 거지.”
줘도 먹지 않을 물건 따위에 아귀처럼 식탐을 부려 대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다른 남자들도 하나둘 표정을 굳힌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탠은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았다.
도로테아는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봐야 하는 남자 어른들의 흉흉한 살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레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도 엄청 놀라시던데. 얼마나 매섭게 혼내시던지, 제가 다 움츠러들 만큼 아주 무서운 기세를 보이셨죠. 마치, 먹어서는 안 될 것에 손을 댄 것처럼 구시더라고요.”
소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고작해야 육포 조각일 뿐인데.”
“…….”
“그러고 보니, 아저씨들이 이걸 먹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시끄러워!”
뜨끔한 듯 시선을 돌리고 있던 마을 남자들 중 하나가 소녀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혹여 그녀가 다칠세라 스탠이 재빠르게 앞을 막아섰다.
도로테아는 제 앞을 가로막은 소년을 힐끔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주머니께서는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게끔 ‘적절하게’ 일을 처리하셨으니까요.”
도로테아의 덧붙임에도 다들 꺼림칙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스탠은 그제야 뒤를 돌아 물었다.
“넌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글쎄.”
자신의 뻣뻣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내가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길래, 기왕 마을을 나온 김에 네게 가기로 마음먹었지.”
그녀의 눈이 스탠의 뒤로 보이는 좁은 토굴의 입구로 향했다.
“보아하니 내가 맞게 온 모양이네. 나를 이리로 보낸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으리라 여겼거든.”
마을 전체에 드리우고 있던 흉살(凶煞)의 근원이 시꺼멓게 일렁이는 조그마한 토굴.
좁디좁은 입구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 살아 있는 듯 요동치는 검은 소용돌이가 비쳤다.
“참으로 재미있는 짓을 하는구나. 흉지(凶地)에서 부정한 기운을 취해 다시 사람들 사이로 흩뿌리다니.”
산신이 죽은 산에는 흉이 깃든다.
인간의 욕심으로 파헤쳐진 땅 위로 불쑥 솟아오른 높은 건물은 정기가 흐르던 맥을 끊어 내고, 결국 말려 죽게 된 신이 원과 한을 품고서 뿌리는 흉.
오로지 수호하고자 태어난 존재가 의미를 잃고 지르는 단말마만큼 흉포한 것이 또 있을까.
신이 머무르던 땅을 등지며 날리는 살이야말로 흉살 중에서 가장 끔찍한 저주였다.
도로테아는 스멀거리는 새까만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호환마마(虎患媽媽)를 거두어 어디로 옮길 생각이었니?”
지독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얼빠진 사내들의 사이를 걸어, 토굴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라! 거길 들어가면 어떻게 해?”
뒤를 쫓아 쪼르르 들어온 스탠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로테아는 멈추지 않고 안쪽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쉼 없이 새어 나오는 새까만 악의들.
그것은 신이 이곳을 떠나며 남긴 비명 소리였다.
고통스럽고, 끔찍하며,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시끄러운.
그녀의 귀에만 들려오는 신의 울음소리.
“본체는 사라진 지 오래인가.”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려던 그녀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 만지지 않는 것이 좋겠어.”
따라 들어온 스탠이 머뭇거리며 꺼낸 말에 도로테아는 옅은 웃음을 걸친 채 뒤돌아보았다.
“왜? 너는 만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퍼다 나르기까지 했잖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손에 닿는 것조차 꺼렸으니까.
막상 닿는 순간 느껴진 것은 약간의 서늘한 기운이 전부였지만, 다른 이들이 그렇게까지 껄끄러워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답을 하지 못한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나직이 말했다.
“괜찮아.”
검은 물에 닿는 순간, 이곳에서 탄생했던 신의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온통 붉은 피로 가득 뒤덮인 대지 위에 홀로 남겨진 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자신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가여운 존재.
탄생을 축복하는 환희의 나팔 소리도, 그의 존재를 거룩히 올려다보는 인간도 없었다.
맞이해 줄 형제자매들은 모두 다 중간계를 떠난 지 오래였고, 황폐해진 땅 위로 가득 흐른 인간의 피와 온갖 사념들이 그를 덮쳤다.
가장 치열했던 전장 위에서 태어난 신은 전장에서 죽어 나간 수천, 수만 명의 악의에 잠식되었다.
굶주린 신이 먹어치운 그 악의가, 신을 더럽히고 부정하게끔 만들었다.
‘그것이 네가 이름도 없는 흉신이 된 까닭이로구나.’
도로테아는 천천히, 샘에 닿았던 자신의 손을 더욱 깊이 집어넣었다.
“사라!”
스탠이 기겁한 목소리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여전히 솟아오르고 있는 검은 물에 시선을 고정한 도로테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껏 네게 이 샘을 길어 나르는 일을 맡기고, 그 대가로 먹는 것과 잘 곳을 제공해 왔지?”
아무리 잡아당겨도 꼼짝달싹하지 않던 소녀의 말에 스탠이 눈을 끔뻑였다.
“샘이 사라지고 나면, 너는 더 이상 마을에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될 거야.”
“……샘이 사라져?”
“그렇지 않으면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무엇인지도 모르는 물을 길어 나르고, 육포를 씹어 삼키고, 좁은 창고 안에서 잠을 청하는 단조로운 삶을 살고 싶니?”
도로테아의 말에 소년이 혼란스러운 듯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샘이 사라지면, 마을 사람들에게 스탠은 애물단지가 될 뿐이다.
그나마 내주던 음식도, 잠자리도 사라지게 될 텐데.
“그, 그걸 없앨 거야?”
몹시 허무맹랑한 생각이었지만 검은 물 깊숙이 손을 집어넣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 서린 잔잔한 미소를 보고 있자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응, 그러려고 해.”
단조로운 답에 겁이 덜컥 났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소년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대신 내가 있잖아.”
“…….”
“네가 원했던 것은 적선하듯 던져 주던 육포나 멀건 국도, 추위에 떨어야 할 푸석한 땅바닥도 아니었지.”
맑은 눈 위로 천천히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본 도로테아가 웃었다.
“당분간은 너의 사라가 되어 줄게.”
“사라…….”
“그러니 허락한다고 말하렴.”
이 샘을 없애 달라고, 신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가두고 있는 이 좁은 굴을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지워 달라고 말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던 소년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긋 웃어 보인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부정경(不淨經)을 외기 시작했다.
육천전안 전안신장 각위제위 부정신령
합의동심 속차강림 하옵시어 발원도량
머무는곳 오예부정 소제소멸 하옵소서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듯 솟구쳐 오른 검은 물이 그녀를 덮칠 듯 밀려들었다.
위협적으로 코앞까지 솟아오른 검은 물을 보면서도 소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신력불력 내리시어 재난소멸 하옵소서
옴- 급급여율령 사바하-
그 순간 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가 미미한 빛을 뿜어 달려드는 샘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기분 나쁜 비명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누군가가 손으로 머리를 헤집는 것 같은 끔찍한 두통에 소년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를 힐끗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아남고자 비굴해지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힌다고 해서 동정을 얻지는 못해. 악의를 지닌 자들에게 얕보이는 순간 그들의 개로 전락하고 마니까.”
“…….”
“때로는 뻔히 보이는 결과 앞에서도 이를 드러내야지. 평생을 굽실대며 살 수는 없잖아.”
“사라?”
‘사라’의 눈이 활처럼 휘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어려운 말들을 술술 읊어 댄 소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귀한 숙녀의 얼굴이.
“그러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야.”
“…….”
“네가 주었던 넘치는 호의에 대한 보답이란다.”
천천히 손끝에 어린 푸른빛이 소년의 혼에서 탁하고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제껏 물을 길어 나르며 닿았던 악의로 물들었던 혼의 얼룩이 천천히 사라졌다.
주변의 땅이 요동치는 가운데, 스탠은 자신의 이마에 닿아 있는 소녀의 손끝에서 희미한 온기를 느꼈다.
이윽고 눈을 뜨자, 불길하기 짝이 없던 샘은 멎어 있었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검은 물은 그 어디에서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토굴이 있던 자리를 망연자실하게 보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도로테아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확인시켜 주었다.
“기뻐하렴. 재앙이 깃든 ‘흉지(凶地)’가 사라졌으니.”
이제 이 땅 위에도 푸른 싹이 돋고 열매가 맺을 수 있게 되었단다.
이 땅에 터를 잡은 이들은 이제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걷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겠구나.
기생충처럼, 숙주에 들러붙어 빌어먹던 삶을 이제 청산할 때가 온 게지.
그렇게 말한 소녀가 자애로운 웃음을 만면에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