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모처럼 차려입은 도로테아가 호화로운 티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을 홀리던 그 시각, 2황자의 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그의 궁 후원에는 값비싸고 화려한 꽃들은 없을지언정, 계절과 어울리는 소박한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후원에 핀 꽃들조차도 궁의 주인을 닮아 가는지, 뚜렷한 존재감 대신 은은한 향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한편에 놓인 나무 테이블 앞에 앉은 플로렌스는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조르르륵.
차를 따르는 손길이 몹시도 능숙했다.
‘4황자 전하께서도 누군가 시중드는 것을 즐기시지 않지만, 차를 우리는 사소한 일까지 도맡아 하시지는 않는데…….’
그녀의 시선이 찻잔이 놓인 오래 된 나무 테이블로 향했다가, 이내 높이 솟아 있는 황금빛 궁의 기둥으로 향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멀리 보이던 화려하고 웅장한 황궁의 전경은 동경 그 자체였다.
상상 속의 황궁에서는 사시사철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맛있는 음식들이 쉴 새 없이 차려져 있고,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며, 눈부신 보석들이 궁마다 한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의 오빠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곤 했다.
“언젠가 너도 예쁜 드레스를 입고 궁에서 열리는 화려한 무도회에서 춤출 수 있게 될 거야.”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황궁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타고난 황자의 정비가 되었고, 어린 시절 상상해 왔던 화려한 무도회와 고급스런 살롱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그녀의 오빠, 케빈의 말대로.
‘지금쯤 나를 찾고 있을까.’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선연했다.
“너무 불안해할 것 없습니다. 비록 테아가 그대를 이곳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다치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
유약한 인상의 황자가 단언했다.
문득 윌리엄에 대한 4황자의 평가가 떠올랐다.
“형님은 믿을 만한 분이지만, 기댈 수 있는 분은 아니지.”
그녀는 아직도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기댈 수가 없다니.
‘기댈 수 있는 사람’이란 어떤 인물을 의미하기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 사이 윌리엄이 작은 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참으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납치한 입장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만큼 정중한 말에 그녀가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일이 이렇게 되어 참으로…….”
“테아는.”
윌리엄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서 말을 이었다.
“그 아이에게 악의는 없습니다. 단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그 방법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말을 하던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납치한 대상에게 납치범을 두둔하는 말을 꺼내다니.
그건 지나친 합리화로 여겨졌다.
반면 말꼬리를 흐리는 윌리엄을 바라보는 플로렌스는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두둔하려는 윌리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아닌 것을 알면서도 상대를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감는 일이 있으니까.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자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쓴다니.”
중얼거리는 플로렌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 점은 어쩐지 제 오빠와 닮았네요.”
어느새 비어 있는 찻잔에 다시 조르륵 차를 부어 마시는 윌리엄은 자못 심란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영애는…….”
그녀가 머뭇거렸다.
도로테아를 무엇이라 표현하기가 참 애매했다.
그리 오랜 시간 보지 않았지만, 짧게 마주했을 때 관찰했던 그녀는 뭐랄까.
“영민한 사람으로 보였어요. 아무런 피해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진심 어린 위로에 윌리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수척한 안색을 감추지 못한 동생의 아내를 위로했다.
“헨드리 또한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아이였습니다. 성격이 쾌활하고 명랑한 덕에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 일에 능숙했지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두 사람 모두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생각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만 빼면.’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이토록 불안할 리가 없지.
걱정을 가득 담은 두 사람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했다.
플로렌스가 불쑥 진지하게 물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던져진 질문에 두 사람 모두 황망한 얼굴로 침묵 속에 잠겨 들었다.
그렇게 둘은 꽤 오랜 시간을 미동도 없이 앉아 아끼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 * *
후작가의 티 파티에는 인형같이 사랑스러운 도로테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결코 호의적이라 볼 수 없는 마음으로 초대에 응한 이들조차 정원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다.
장미 덩굴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입구에서부터 계절을 잊은 듯 한쪽에 가득 피어 있는 크로커스 군락, 햇볕에 반짝이는 나뭇잎들과 적절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아름드리나무까지.
정원으로 날아드는 형형색색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기분을 더욱 들뜨게끔 만들었다.
“마치 이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군요.”
“맞아요. 박람회와는 또 다른 인상인걸요.”
후작저를 찾은 이들은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이색적인 풍경에 푹 빠져 있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표정을 관리하셔야 합니다. 파트너 없이 참석하신 것만으로도 말이 나올 텐데, 적어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셔야지요.”
“그러니 처음부터 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평소에 비해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던 4황자가 예민하게 쏘아붙이자, 케빈은 더 말을 보태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호탕하고 사람 좋아 보이던 황자는 자신의 비가 사라진 이후 좀처럼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제멋대로 어딜 돌아다니는 건지.’
기껏 붙여 둔 호위마저 따돌리고서 사라진 플로렌스도 문제였지만,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4황자는 더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심지 있는 인물을 고르는 것인데.
저택에 틀어박혀 별다른 활동을 않던 도로테아가 성대한 티 파티를 열었다는 것은, 그녀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비록 4황자를 지지하는 신흥 귀족과 상인층이 있다고는 하나, 정통성을 중요시 여기는 귀족들의 지지 또한 필요하다.’
비록 2황자나 7황자와 잦은 왕래가 있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나마 ‘중립’을 자처하고 있는 하이클레어 후작이니, 마음을 얻기만 한다면 4황자의 세력에 큰 도움이 되겠지.
‘목표를 위해서라도 가까이할 필요가 있고.’
의욕 없어 보이는 4황자를 향해 그가 몇 마디 덧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부딪혔다.
“이런.”
고개를 돌리자 난감한 표정의 필립 하이클레어가 보였다.
“송구합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군요.”
“괜찮습니다.”
언짢기는 했으나 상대가 먼저 저자세로 나오는데 그가 사과를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딘가 묘하게 여유가 없어 보이는 필립을 흘끗 바라보던 케빈이 물었다.
“급한 일이신가 봅니다.”
“아아, 테아가…… 아닙니다. 모처럼 저택을 찾아 주신 손님 앞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로군요.”
말을 꺼내다 말고 허둥지둥 수습하는 그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서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무는 것을 놓치지 않은 케빈이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좋지 않은 후작 부인을 대신해 손님들을 맞이하는 후작가의 사람들 가운데,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만이 처음 모습을 보인 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무언가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그때 하인에게서 무엇인가 전달받은 필립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다른 짐마차라도 구해 보거라. 빨리!”
“그렇지만 그리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마차는 흔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다녀와야 하는 거리 또한 만만치 않은 터라…….”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케빈이 불쑥 끼어들었다.
“마차가 필요하십니까?”
갑작스런 물음에 눈을 크게 떴던 필립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몹시도 초조한 티를 내듯 눈이 자꾸만 정원 밖 문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제가 도와 드릴 수 있겠군요. 상단에서 운영하는 마차를 몇 대 빌려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케빈은 그의 제안에 솔깃한 기색을 보이는 상대를 향해 느긋하고 여유롭게 조건을 내걸었다.
“제아무리 제가 상단주라고는 하나, 거래처에 쓰이는 장거리용 짐마차를 여러 대 대여해 드리려면 다른 거래처에 양해를 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실망한 듯 짐짓 고개를 돌리는 필립에게 그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제가 직접 마차를 가지러 간다면 그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겠지요.”
그의 목소리가 한층 은근해졌다.
“물론 후작가에서 마차를 빌려야 할 만한 ‘급한 일’이라는 것이 결코 남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연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의 제안에 필립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목표물이 성공적으로 미끼를 물었다.
* * *
그의 곁에 서서 귀찮도록 행동을 간섭하던 케빈이 사라지자, 4황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미로 같은 정원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붉은빛의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군락 앞에 멈춰 선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박람회에서 뵈었던 때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라, 하마터면 몰라뵐 뻔했네요.”
뒤를 돌아본 4황자의 얼굴이 흐려졌다.
“후작 영애로군.”
우아하게 몸을 굽혀 예법에 맞춰 인사하는 도로테아를 본 4황자가 손을 들었다.
“됐소. 폐하께서도 영애에게 고루한 예법을 지키라 하지 않고, 내 형님께서조차 영애를 벗으로 대우하시건만 어찌 내가 예를 갖추라 청하겠나.”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눈을 내리깔고서 나직이 말을 하는 도로테아를 본 4황자가 중얼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식적인걸.”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흘러나온 감상이었다.
재빠르게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무슨 말을 전해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대개의 경우에는 제국의 법과 규율에 순응하는 편이랍니다.”
“대개의 경우라…….”
복잡한 얼굴로 말을 되뇌던 4황자는 이내 감탄을 마지않는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초대해 주어 고맙군. 여러 훌륭한 명소들을 둘러보았지만 이런 장관은 본 적 없었네.”
사계절의 모든 풍경들을 한곳에 담아내다니.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4황자의 칭찬 어린 말에 도로테아는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정령을 밀어내며 답했다.
“이 아이가 있으니까요. 저래 봬도 물의 정령에는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힘이 있거든요.”
수 속성을 가졌으니 힘을 쓸 수 있도록 충분한 음기를 나눠 준다면 가능했다.
“대단하군.”
“저 아이들로선 안 된 일이지만요.”
“음?”
“꽃이 피기까지의 오랜 시간을 빼앗겼으니까. 따스한 햇볕을 쬐는 기쁨도, 시원한 물을 마시는 행복도, 밤의 추위를 견디어 내는 시련도 없이 오로지 오늘만 피었다가 빠르게 져야 할 테니까.”
자연을 벗어난 대가는 그만큼 더 큰 희생으로 치러야 하는 법이다.
도로테아의 경고성 짙은 말에 4황자가 픽 웃었다.
“다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을 걸세. 이런 정원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길 테지.”
인간의 목숨조차도 신분과 계급에 따라 귀천을 가리는데 한낱 미물에 불과한 꽃의 생명 따위야.
말을 마친 그의 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공허한 빛을 띠었다.
“그 사람이라면 조금 다를지 모르겠군.”
누군가를 떠올리고서 아련해진 황자가 입술을 짓씹자, 도로테아는 짐짓 모른 척 입을 열었다.
“황자비 전하께오선 같이 오지 않으셨군요.”
“그녀는 몸이 좋지 않아서.”
짤막한 답에 도로테아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함께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두 분 전하께서 함께하시는 모습이 몹시 다정해 보여 다들 부러워했었거든요.”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면 내 조만간 이곳에 함께 방문하지.”
짤막하고 상투적인 답들을 이어 나가는 4황자를 향해 도로테아가 불쑥 물었다.
“두 분께서는 어찌 만나게 되셨나요?”
그제야 꽃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4황자가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먼 타국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나를 구한 것이 그녀일세. 내가 황자임을 모를 때조차도, 그녀는 열에 들떠 끙끙 앓는 내 옆에서 떠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간호해 주었지.”
“그래서 그토록 서로에게 애틋하셨나 봐요. 참 다행이네요.”
도로테아가 싱긋 웃으며 꺼낸 말에 4황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다행이라고? 무엇이 다행이란 말인가?
“황자 전하께 비전하가 그토록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면, 그분의 행방이 갖는 가치가 꽤 클 테니까요.”
“……!”
“어쩌면 제가 원하는 바와 맞아떨어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황망한 얼굴을 하고서 가만히 서 있던 4황자의 눈이 커졌다.
오늘따라 걸어 다니는 인형처럼 사랑스럽게 꾸며 놓은 도로테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선 4황자, 헨드리의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그녀를, 그녀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가?”
이성을 잃은 듯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는 그의 물음에 도로테아가 차분하게 답했다.
“안심하세요. 그녀는 지금 충분히 안전한 장소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머무르고 있답니다.”
불안으로 가득하던 헨드리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차올랐다.
제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하나뿐인 비가 납치되어 있다는 소리에 분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주먹 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준 그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도로테아를 노려봤다.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황자 전하께서 이토록 비전하를 아끼고 계시는 이상, 소홀히 대접하지 않을 테니까요.”
윌리엄이라면 아마 지금쯤 그의 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을 하고 있지 않으려나.
고문은커녕 미안하다고 고개를 조아리고 사과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뭔가?”
거친 숨소리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삐끗했다.
그만큼이나 다급하게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황자의 모습은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다.
흘끗 그를 관찰하던 도로테아가 나직이 ‘목적’을 언급했다.
“파비안 벨로크.”
4황자의 눈이 흔들렸다.
“제게는 그녀가 필요해요, 전하. 저는 티끌만큼도 다친 곳 없는 온전하고 멀쩡한 그녀를 원해요.”
쏴아아.
정원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리리가 짓궂게 도로테아의 머리카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
실종된 영애를 왜 내게서 찾느냐는 시치미를 뗄 법도 할 텐데, 4황자는 섣불리 부정하는 대신 그늘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뱉었다.
“그녀는 지금 내게 없네.”
“그렇지만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알고 계실 테지요.”
쏴아아.
정원의 가지들이 흔들리며 내는 바람 소리가 다시 한번 둘 사이의 침묵을 메웠다.
4황자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다친 곳 없이 무사하게 잘 있는 건가?”
“조금 놀라긴 하셨지만 괜찮아요. 다친 곳은커녕 아픈 곳 하나 없는걸요.”
“당장 파비안 영애의 행방을 알 수는 없네. 그녀의 위치도 어림잡을 뿐이지, 내가 접근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고.”
고개를 저으며 꺼낸 말에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그렇다면 분발해 주셔야겠네요. 사랑하는 비전하와 재회하실 수 있게끔.”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영락없는 협박에 4황자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도로테아를 훑었다.
“세간에 떠돌던 소문들은 하나같이 축소되어 있었군.”
저와 관련된 추문에 얽힌 영애의 행방 하나 찾자고 황자비를 납치해 협박하다니.
보통의 담을 갖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도로테아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과찬이세요.”
“…….”
“시간을 그리 많이 드리진 못하겠네요. 아시다시피 저를 보며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좀 많아서.”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려 한 무리의 귀족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저들 모두가 그녀의 몰락을 구경하러 모여든 불나방들이었다.
“그러니 부디 서둘러 주시길.”
복잡한 얼굴의 황자를 보며 도로테아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을 즈음,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린 도로테아가 제 외사촌이 부르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던 우드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4황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내를 납치한 흉수에게 협박당하는 황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쿡쿡 쑤셔왔다.
‘한때는 나도 이 제국을 지키고자 몸 바치던 훌륭한 군인이었건만.’
지금은 황자비를 납치한 공동 정범이라니.
“뭐 해? 안 와?”
좀 전까지 일국의 황자를 향해 비열한 협박을 일삼던 납치범이 친근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터덜터덜 따르는 걸음이 몹시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