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적어도 해가 떠 있는 낮에 왔더라면 이것보다는 나았겠지. 근사한 차와 맛있는 간식을 내어 줄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
“괜찮아. 사실 차린 게 없을 것 같아서 먹고 오긴 했어.”
한밤중에 멋대로 쳐들어온 도로테아는 뻔뻔하게도 관대한 척 개의치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황궁의 요리사가 특별히 더 대단한 것도 아니고.”
하나뿐인 손녀가 다른 무엇보다도 오로지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후작은, 귀족 영애로서의 본분을 잊은 그녀를 꾸짖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손녀의 입에 더 맛있는 것을 먹여 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하긴 후작을 탓할 문제가 아닌가.’
가문 사람들 모두가 어미 새처럼 도로테아의 입에다 먹이를 물어다 주기 바쁘니.
말없이 웃은 윌리엄이 헛기침했다.
“말조심해야지. 폐하께서 들으셨다면 좋아하지 않으셨을 거야.”
일개 후작의 식탁 위에 오르는 요리들이 황궁의 것보다 낫다는 광오한 말이 황제의 귀에 그리 좋게 들릴 리 없었다.
“너는 신경 쓰지 않잖아.”
“그래, 내게는 그리 상관없는 일이지.”
고개를 끄덕인 윌리엄이 미지근한 물병을 만지작거렸다.
고작해야 음식일 뿐인데 어느 것이 더 낫고 덜하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나’를 만족시키느냐는 것일 뿐인데.
그리 아득바득 비교해 가며 내세울 필요 없는 문제였다.
‘아마도 폐하께서는 내 이런 점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 거겠지.’
물론 가장 큰 것은 건강 문제겠지만, 그의 성정 또한 황제로 하여금 다른 형제들의 계승권을 우선시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그의 태도는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을 제멋대로 주무르겠다는 야심도 없었지만, 많은 이들을 굽어살피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자애도 없었으니까.
생각을 마친 윌리엄이 불쑥 눈앞의 소녀를 불렀다.
“테아.”
“응?”
“나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
입가에 쓴웃음을 매단 채 꺼낸 다소 진지한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이제까지는 반 장난식으로 밀어붙이는 말들을 못 들은 척 넘겨 왔지만, 한 번쯤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 자리는 살아남기에 급급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했던 인물이 운 좋게 차지해서는 안 되는 곳이니까.”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야 늘 보였지만, 의사 표현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윌리엄이 이렇듯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방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무래도 윌리엄은 늦은 밤 자신을 찾아온 그녀의 목적을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어두운 틈을 타 황제를 쓱싹하고 얘를 자리에 앉히는 것이 영 어려운 일은 아니긴 해.’
물론 그렇게 했다가는 수습이 문제겠지만.
도로테아는 그의 작은 오해를 풀어 주는 대신 미적지근한 물이 담긴 잔을 톡, 하고 쳤다.
그 조그마한 자극에 잔에 담긴 물 위로 파동이 번졌다.
“나는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말한 적 없어.”
“…….”
“다만 적어도 가능성만큼은 열어 두어야 할 뿐이지.”
적어도 눈앞의 이 조용한 황자님은 ‘자리’의 무게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제 형제들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치를 과대 포장하는 행동력 좋은 머저리보다야.
“우리는 모두가 각자 원하는 방향을 갖고 있으니까. 네가 원하는 방향과 내가 원하는 방향이 다를 수도 있겠지.”
도로테아의 말에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뿐이야. 너 또한 네 나름대로 노력하면 되는 거고.”
결국 나를 놓아주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군.
허탈하게 웃은 윌리엄이 그제야 도로테아를 흘끗 살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의 태도가 몹시 느긋했다.
그를 설득하려고 찾아온 것이라면 지금보다는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을 텐데.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니?”
“파비안 벨로크가 실종됐어.”
툭, 하고 뱉은 말에 잠시 멈칫했던 윌리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가문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치안대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소식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야.”
“그가 나를 의심해.”
이번에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윌리엄의 안색을 살피던 도로테아가 물었다.
“몇몇 귀족들도 나를 의심하는 눈치고.”
우스운 일이었다.
정체 모를 세력에게 제국의 상류층 계급이 농락당했던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져 우스갯거리가 된 지 고작해야 1년이었다.
귀족들은 그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묻어 버리려는 듯 더욱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유행에 매달려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가십거리를 소비하느라 온종일 귀와 눈이 피곤할 정도로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는 삶이 무료한 그들에게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이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신경 쓰지 않는 것 아니었어?”
“필요할 때는 신경 써야지.”
폐태자 세력의 몰락으로 가장 크게 위상을 높인 것은 하이클레어 후작가였다.
황실의 정통 계승권을 지지하고 있던 기존 공신 가문들이 주춤하는 사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신흥 귀족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武)를 숭상하는 기사들의 지지도는 물론이고 제국민들의 지지 또한 심상치 않았다.
기존의 상류 계급이 위협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네가 직접 범인을 잡겠다고 나선 거구나.”
도움을 청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가의 사병들을 움직이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그의 근위대를 내주는 정도의 도움은 흔쾌히 줄 수 있었다.
“범인이라면 이미 알고 있어.”
도로테아의 짤막한 말에 윌리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꼬맹이들의 진술이 아니어도 파비안을 납치한 범인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토록 사람들로 붐비던 박람회장에서 파비안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나, 건물 주변을 서성이는 모습을 목격한 인물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건물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간단한 이야기지.’
박람회를 주최한 황자에게 의심의 화살을 날릴 수 없기 때문에 간단한 일이 복잡해진 것뿐.
멈칫했던 윌리엄이 나직이 물었다.
“내가 그를 고발해 주길 원하는 거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도로테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신중한 인물이야.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는 바로 꼬리를 자르고 달아날걸. 그렇게 되면 인질의 안위도 장담할 수가 없어.”
설령 극단적인 결과로 마무리된다 하더라도 도로테아의 잘못은 없겠지만…….
인간이란 본디 눈앞에 빤히 보이는 일보다도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바를 더 믿는 법.
애꿎은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만나 본 백작은 생각 이상이더라.”
생각 이상으로 고루하고 모자란 인간이었다.
제국이 얼마나 안으로 곯아 있는지 여실히 증명하는 인간이었달까.
도로테아의 신랄한 평가에 윌리엄은 말을 얹는 대신, 자리에 앉아 차분히 물었다.
“그래서 지금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뭔데?”
빙빙 겉도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쭉정이에 불과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도로테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마주한 윌리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별거 아냐. 그냥 좀 사람을 하나 맡아 줄 수 있을까 하고.”
“사람?”
“범인은 뻔히 보이지만 막무가내로 뺏어 오기에는 곤란한 상대거든. 납치한 사실을 공론화할 만큼의 증거도 없고 말이야.”
“…….”
“그래서 그냥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 내가 필요한 건 파비안 벨로크니까, 그녀와 교환할 수 있을 만한 인질을 잡으면 그만이잖아.”
태연하게 읊는 말을 곱씹어 본 윌리엄이 멈칫했다.
반짝이는 남빛 눈동자를 마주한 그가 느릿하게 물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인질을 교환하다니?”
“범인에게 가치 있는 사람을 납치했다고.”
“…….”
사랑스러운 얼굴로 꺼낸 폭탄 발언에 이성을 겨우 부여잡은 윌리엄이 머릿속을 정리했다.
파비안 벨로크가 실종된 지 이틀 만에 범인을 알아낸 도로테아는, 그 범인이 생각보다 녹록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차라리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자 새로운 인질을 납치했다는…….
“테아.”
좀 더 상식적으로 될 수는 없을까, 우리.
도로테아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갈 윌리엄의 복잡한 머릿속을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이 궁은 추적 마법에서 보호받는 대단위의 진이 설치되어 있고, 같은 황족이라고 해도 어지간해선 수색할 수 없는 공간이지.”
그 말뜻은, 제아무리 같은 황족이어도 ‘형제의 궁’을 수색하기까지는 오랜 절차와 시간이 걸린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제아무리 윌리엄과 도로테아의 친분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4황자비를 여기에 숨겼을 거라는 발상은 좀처럼 하기 힘들기도 하고.
“여기 숨겨 두는 게 제일 안전할 거 아냐.”
2황자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을 꼽으라 한다면.
“추적 마법이라면, 범인이 마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소리야?”
도대체 어떤 위험한 일에 뛰어든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하이클레어 후작가가 인질 한 사람의 안위조차 책임지지 못할 리 없는데.
그럼에도 도로테아가 굳이 이곳까지 와 부탁을 해야 한다면, 분명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는 뜻이겠지.
“테아.”
달빛 아래 서서 양처럼 순한 눈망울을 하고 고개를 기울이는 소녀는, 마치 천사가 강림한 듯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 조그마한 머리통 안이 얼마나 영악스럽고 탐욕스러운 생각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저 눈을 마주한 순간 져 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기를 든 황자를 뒤로하고 궁을 빠져나가려던 도로테아가 걸음을 멈췄다.
“있지. 파비안이 실종되고 나니까 치안대에서는 나를 찾아왔고, 가족들은 내 눈치를 봤어.”
편을 들어 준 에드윈조차도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눈치였다.
“너는 파비안의 실종이 내 의도와 상관없었다는 걸 믿어?”
나직한 물음에 침대로 향하던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너는 생각보다 관대한 사람이니까. 네게 살의를 갖거나 네 소중한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는 한 먼저 움직이지 않아.”
그녀에게 손을 댄 사람들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한 것은, 그들이 가진 ‘살의’와 ‘욕심’이 그만큼의 무게를 지녔다는 뜻이었다.
물끄러미 윌리엄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게 내가 너를 지지하는 이유야, 윌리엄.”
살아남고자 검을 들고 상대를 해하는 법을 배웠던 루크와는 다르게, 너는 살아남고자 상대에게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기에.
상대를 그 누구보다 명확하고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너니까.
* * *
파비안이 실종된 지 3일째 되던 날, 그녀의 실종 사실이 귀족 사회 전체에 알려졌다.
파비안 벨로크는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다.
귀족 영애들이 그녀의 실종에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귀족 영애의 실종은 흔히 ‘몸값’과 관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개는 실종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몸값과 인질을 교환하거나, 납치범들에게 잔인한 보복을 행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가장 드문 경우가 실종 사실이 귀족 사회에 알려지는 일이었다.
실종된 영애가 돌아왔을 때 큰 불명예를 안을 수 있는 만큼, 납치되었던 사실 자체를 감추기 바빴으니까.
드물게 몸값 흥정에 실패하여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도 가문은 그 사실을 쉬쉬하며 숨겼다.
귀족의 명예란 그런 것이니까.
그런 그녀의 실종 사실이 공개되자 다들 불안과 충격에 빠졌다.
“파비안 영애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설마요.”
“제가 듣기로는 박람회장에서 하이클레어 영애와 다툰 이후에 사라졌다던데요.”
“그렇지만, 후작 영애는 2황자님과…….”
소식을 접한 이들 대부분이 도로테아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시 파비안이 도로테아와 크게 다투었던 사실과, 하필이면 그 다툼 직후에 그녀가 아끼던 반지가 산산조각 나는 기이한 현상까지.
목격자들이 차고 넘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로서 의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상황에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은 뜻밖의 선택으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마치 보란 듯이 저택 야외 정원의 티파티로 귀족들을 초대한 것이다.
본인이 얽힌 일만 아니라면 누군가의 가십에 사족을 못 쓰는 귀족들 대부분이 눈을 빛냈다.
평소 티파티에 흥미가 없는 이들조차도 이토록 재미난 사건을 두고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마다 호기심과 의심, 호의와 악의를 품은 이들이 초대장을 들고 후작가를 찾았다.
그들 가운데에는 요즘 가장 활발히 사교계 활동을 하고 있는 4황자와, 그의 책사이자 자본 줄을 쥐고 있는 던컨 남작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오색 빛이 감도는 화려한 정원 아래, 또래의 영애들처럼 사랑스럽게 차려입은 도로테아 하이클레어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의 곁을 맴도는 정령이 흩뿌린 꽃가루를 머금은 드레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일순간 숨을 멎게 만들었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참으로 아름답군요.”
“자연의 사랑을 받는 정령사다운 자태예요.”
“생각해 보면 그녀가 벨로크 백작 영애를 납치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긴 하네요.”
겉모습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에 반한 이들이 소녀에게 향했던 무분별한 의심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래요.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그럴 리가 없죠.”
“납치 같은 무서운 짓을 할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걸요.”
수군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우드가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이란.’
실로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한 종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