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113화
“그래서, 테아. 이것들이 다 뭐라고?”
“남자의 정기에 좋은 것이라고 했어요. 윌리엄.”
“…….”
윌리엄은 황망한 얼굴을 하고 제 식탁 위에 올라온 수많은 산해진미들을 훑었다.
그중에서도 ‘정력’에 좋다고 소문난 것들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너무 과한 보양은 안 하느니만 못한 거란다. 몸이 좋지 않을 때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가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윌리엄은 운이 좋게도 그 ‘과한 보양’이 온전히 몸보신이 될 수 있게끔 활력을 촉진시키는 능력을 갖춘 인물을 곁에 두고 계시니까요.”
그러는 김에 나도 겸사겸사 보양을 하는 것이 좋고.
도로테아가 소의 피를 굳혀 만든 말랑말랑한 식감의 푸딩을 향해 숟가락을 푹 집어넣었다.
어차피 제국에는 정령사가 드물었고, 따라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려진 건 극히 희박했다.
그녀가 무엇이든 ‘정령사이기 때문’이라고 우길 수 있는 자신감도 그에 기인한 것이다.
“나는…….”
“윌리엄, 편식을 하니까 몸이 좋지 않은 거예요. 저도 한때 몸이 아팠지만, 골고루 맛있게 먹은 덕에 아주 건강해졌었거든요.”
“…….”
도로테아가 이 궁을 드나들게 된 지 며칠 만에 황궁의 예산을 관장하는 내무부에서 성명서를 올리며 그녀를 규탄했다.
그러나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고 갔는지, 황제는 그녀의 씀씀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픈 황자에게 돈을 들이는 게 그렇게 못마땅하냐며 예산을 걱정하는 이들을 몰아냈다.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는 몰라도, 덕분에 최근 이쪽을 향해 심상치 않은 이목이 쏠리고 있었다.
윌리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테아, 나는…… 이런 관심이 익숙하지 않아. 원하지도 않고.”
평생을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쓸모없이 밥이나 축내는 약한 황자로서 살아왔다.
형제들에게는 황권에 위협이 되지 않으니 그저 내버려 둬도 좋을 존재로서.
욕심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며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럴 만한 그릇도 되지 못해.”
“저는 딱히 윌리엄이 대단한 그릇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그래?”
“그럼요. 유모를 잃은 두려움으로 웅크리고 숨어든 어리광을 그저 어리광으로 받아 줄 수 있는 건 윌리엄이 어린아이일 때죠.”
지금은 이미 다 자란 어른인데도 속은 여전히 병마의 그림자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인걸.”
“그래도 당신은 손을 내밀었죠.”
황태후가 도로테아를 궁으로 불렀을 때, 자신에게 독을 먹이고 유모를 죽인 이를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제 발로 찾아 들어와 그녀를 감쌌다.
미약한 떨림을, 창백한 얼굴을, 평소에 비해 더 푸른 입술을 도로테아가 보지 못했을 리가.
“루크에게도.”
“…….”
“스스로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쟁취하려 하지 않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아주 미약한 움직임일지라도 시도했으니까.”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윌리엄에게 도로테아는 장어를 끓여 만든 수프를 제 앞으로 당기며 생긋 웃었다.
“게다가 난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인간이 참 싫어서요.”
사람을 부리면 모를까, 자연스럽게 부리려 드는 자들에게는 생리적인 불쾌감과 본능적인 적대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매우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어린 소녀에게 달콤한 양념이 올라가 있는 사슴 갈비를 발라 주는 윌리엄을 보며, 도로테아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보냈다.
“윌리엄이 여러모로 더 좋아요.”
“나는…….”
착잡한 표정의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였다.
공손한 태도로 식사 도중 들어선 시종이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내가 지나치게 방해한 것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생글거리며 웃는 1황녀는 제 아이의 손을 잡고 윌리엄의 궁을 찾아 다정한 목소리로 도로테아를 꾀어냈다.
“내일 이 아이의 생일 파티가 있을 예정인데, 친애하는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를 초대할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아이가 정령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거든.”
그런 것치고 어미의 손에 이끌려 온 아이는 정작 도로테아를 알아보지도 못 하는 눈치였다.
억지로 온 탓인지 퉁퉁 부어 있는 어린아이의 볼을 빤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아가씨의 초대라니, 영광이로군요. 당연히 가야겠죠.”
노골적으로 꿍꿍이가 가득한 속내를 드러낸 1황녀를 향해 웃어 보인 도로테아는, 윌리엄에게 장어 수프를 건네며 생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잘하고 있어요, 윌리엄.”
“응?”
“제가 아니더라도 궁에서 들이는 식재료의 양이 늘어났다던데요. 특히 늘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던 윌리엄이 고기를 찾기 시작했다고 주방에서 어찌나 좋아하던지.”
“…….”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혹 육식을 좋아하는 양이라도 기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생긋 웃으며 일어나는 도로테아의 말에 윌리엄이 난처한 듯 볼을 긁적였다.
도로테아가 어김없이 제 몫의 보양식을 빠짐없이 해치우고 떠난 자리에 루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여기 있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지?”
“…….”
“혹시, 널 숨겨 주었다고 내게 화풀이하는 게 아닐까?”
윌리엄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루크가 건조한 목소리로 가능성을 부정했다.
“아니, 그 애는 그냥 지금의 황태자가 싫은 것뿐이야.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을 정도로.”
“위험하다니까.”
그런 말은 어디서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전에, 루크의 눈이 늘 제게만 살가웠던 병약한 형을 응시했다.
“차기 황태자가 되면 군권을 내게 줄 건가?”
“……아니, 안 될 거야.”
“생각해 보니 그것도 꽤 괜찮은데.”
“루크, 친애하는 내 동생아. 루크?”
윌리엄은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생각에 잠긴 루크를 부르다 울적하게 식탁을 바라보았다.
도로테아가 궁을 다녀간 요 며칠 동안, 그녀가 먹는 것을 눈앞에서 보다 덩달아 과식을 하게 되었건만 아프기는커녕 점차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 정령의 힘으로 병약했던 몸이 건강해지고 있는 것이라면.
‘큰일이군.’
허리에 대검을 찬 동생과 정령을 다루는 도로테아의 조합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눈앞이 아찔했다.
* * *
도로테아는 황녀의 저택에 앉아 소란스런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에서는 귀한 황손의 생일 파티가 모두의 축복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원한다면 나와의 대화를 끝내고 저들 사이에 끼는 것도 좋겠지.”
황태자의 말에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1황녀의 위신이 설 것이다.
황녀가 설령 그런 것을 바라고 황태자와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 아닐지라도, 말 한마디 얹어 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겠지.
“괜찮습니다. 저는 사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성가시고, 시끄럽고, 생각이 짧아 쉽게 일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라는 방패 속에 숨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아이’들이 이 황궁에 얼마나 많던가.
어차피 가 봤자 그녀를 반기는 것은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 주인공의 체면을 차려 주려 힘껏 노력하는 이들이겠지.
“영애가 그렇다면야.”
황태자가 짧은 말과 함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도 차도, 그리고 내어 온 다과도 어느 하나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 없었는데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온도가 부족하군.”
차를 준비한 사용인들의 탓이라기보다는 그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 더 컸다.
그럼에도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방 안의 온도가 서늘해졌다.
다기를 데웠던 시녀가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는 식은 차를 들고 방을 나섰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오늘 그녀는 최소 감봉, 혹은 일을 그만두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말 몇 마디로 결정지은 황태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윌리엄의 궁을 드나들며 해괴한 짓들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윌리엄을 보니 제 어릴 때가 생각이 나서요. 몸이 아파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하루 온종일 갇혀 있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알고 있거든요.”
“글쎄, 그 녀석은 몸이 약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심지가 약한 것이 문제일 텐데.”
늘 온화한 얼굴을 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무엇에도 물 탄 듯 술 탄 듯 제 의견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존재감 없는 동생.
황태자는 한 번도 그를 온전한 황족으로 취급해 본 적이 없었다.
모자라고, 부족하고, 후계 경쟁에서 도태되어야 할 ‘미숙아’니까.
“나를 지지하게, 영애.”
단도직입적인 말에 도로테아가 눈을 깜빡였다.
본론을 꺼내기까지 족히 반나절이 걸리는 귀족들의 화법을 봤을 때, 황태자는 꽤 호탕한 편이었다.
물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오만함 덕분이지만.
옅은 미소를 띤 채 제 앞의 다과를 후루룩 집어 먹은 도로테아가 오물거리던 것을 삼키고 나직하게 물었다.
“제가 3황자 전하께 어떻게 했는지 아시면서요?”
“…….”
“그분께서는 원치 않으실 텐데요.”
아마도 도로테아 하이클레어를 죽여 달라고 펄펄 뛰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3황자를 언급한 순간 표정이 경직된 황태자가 침묵 끝에 말했다.
“그 아이라면 내 잘 다독일 수 있을 터. 영애가 걱정하는 일을 없을 걸세.”
“과연 그럴까요? 저는 안심할 수 없는데요.”
여유로운 쪽은 도로테아였다.
먼저 자리를 만들고 심지어 늦기까지 한 황태자는, 슬슬 무너져 가는 주도권을 제 쪽으로 끌어오려는 듯 미간을 좁힌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리처드는 그저 어리석을 뿐이다. 그 아이가 해를 끼쳤다고는 하나, 영애의 비위를 맞추자고 동복동생을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가만히 있는 형제들의 반발이 두려우신 거겠지요.”
3황자를 처리하고 나면 다른 황자 황녀들 또한 황태자가 이득에 따라 피를 나눈 형제 정도는 귀족의 먹이로 던져 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궁지에 몰린 이들이 똘똘 뭉쳐 그에게 대항한다면 그 또한 골치 아픈 일일 터.
“황족과 반목하여 영애에게 좋을 것이 뭐지?”
“좋을 것은 없지요. 굳이 반목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안심할 수가 없으니까요.”
실은 배알이 꼴려서.
저 좋을 대로 사람들을 휘두르고 살면서도 죄책감 하나 없고, 제 일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의 목숨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황자라는 사실이.
아껴 주는 이의 마음마저도 제 입장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저버릴 수 있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
“황자 전하께서 저를 그토록 미워하고 계신데, 일개 후작가의 여식에 불과한 제가 어찌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사교계를 드나들 수 있을까요…….”
처연한 말을 끝으로 속눈썹을 파르르 떤 도로테아가 입을 다물었다.
협상의 결렬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태도에 황태자가 한숨을 쉬었다.
망할 리처드, 그 자식은 언제나 제 발목을 잡곤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는 주제에 천박한 이들과 어울리며 평판을 무너뜨리건만 동복형제라는 그 사실이 이제껏 그와 동생을 묶어 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녀석을 선택할 수 없어.’
눈앞의 이 여인은 지금 붙잡지 않으면 곤란하다.
황태자로서 군림해 온 그의 모든 감각이 상대를 경계하듯 곤두서 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은 결국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황태자를 한풀 꺾이게 만들었다.
이윽고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공개적인 추궁은 안 돼. 그래도 그 아이는 황자니까.”
“…….”
“비공식적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사(急死)로 해 두지.”
하나뿐인 동복동생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으로 이 지루한 말싸움을 그치자는 황태자의 제안에 도로테아가 빙긋 웃었다.
“영명하신 판단이세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시름을 덜겠군요.”
말 몇 마디로 시녀의 인생을 좌우한 것처럼, 말 몇 마디로 동생을 향해 사형 선고를 내린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도로테아의 뒤에 자리하고 있는 프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크가 영애에게 보내 주었다던 그 호위로군.”
“낯이 익으세요?”
“루크 밑에 있었다면 군문의 길을 걸었을 터. 낯익을 일이 무에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젓는 그를 향해, 드물게도 프리드의 시선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시리도록 푸른 눈이 이내 황태자에게서 떨어져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저 멀리 수행원들과 사라져 가는 황태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도로테아가 제 호위를 향해 다정한 웃음을 보냈다.
“그가 너를 몰라봐서 서운하지 않아?”
“…….”
“서로 마주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오늘은 고집 부리지 말고 우드에게 호위를 넘기지 그랬어?”
자신을 향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던 프리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상관없습니다. 아무래도.”
감정 하나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무미건조하게 덧붙였다.
“설령 가문의 이름을 언급했더라도, 기억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짓밟은 이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시는 성정이 아니시니까요.
낮게 읊조리는 말에 도로테아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는 대신 조용히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우아한 걸음걸이의 뒤로, 시리고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기사가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늘 그래 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