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98화
방울을 흔들던 메릴린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 후드를 찾다 천천히 손을 멈췄다.
한눈에 봐도 죽음이 임박해 보이는 제닉스 부인을 바라보는 도로테아의 눈은, 메릴린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영애께서 책임지실 일이 아닙니다.”
“…….”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제 선택이었습니다. 영애는 이 이상 짊어져서는 안 돼요. 지나치게 사람들과 벽을 세우지 마시고,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짐을 나누어 주세요.”
가늘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목소리가 마음을 담은 당부를 건넸다.
바로 뒤에서 프리드가 남아 있는 매복들과 검을 부딪치는 사이, 메릴린이 또 다른 사술을 부리지 못하게끔 다시 최선을 다해 방울을 흔드는 사이.
제닉스 부인의 입술이 도로테아의 귀 가까이에서 달싹였다.
“황태후는 황자들의 유모에게 손을 쓴 적이 없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달랐습니다. 2황자 전하는 몸이 약한 게 아니에요. 그의 유모는 황태후의 손에 죽었습니다.”
윌리엄.
늘 한 걸음 물러서서 황자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병약한 인물이 떠올랐다.
제닉스 부인의 목소리가 더욱 가늘고 옅어졌다.
“그녀가 결코 드러나선 안 되는 황태후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알아냈기 때문이지요.”
황태후의 궁에 찾아와 자신을 데리고 나오던 날, 윌리엄과 그녀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조손 사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데면데면했던 두 사람이.
말을 마친 제닉스 부인의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져 나왔다.
종속의 인이란 원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위의 계약.
그녀는 이제 맹약을 어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아…….”
깊이 내쉬는, 아쉬운 탄식과도 같은 숨소리가 부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술사를 제외한 주변의 성가신 매복을 모조리 처리한 프리드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테아!”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결계 너머로 도로테아를 향해 달려오는 일행들이 보였다.
그 뒤를 심드렁하니 따르다, 죽어 가고 있는 제닉스 부인을 발견한 리처드의 눈이 커졌다.
눈의 초점이 사라진 그녀는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면서도 연신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유모?”
달려온 리처드가 도로테아를 밀쳐 내고서 이미 숨이 멎기 일보 직전인 자신의 유모를 살폈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스몄다.
“내…… 아가, 아가야.”
언젠가 그녀가 품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보냈던 어린 아가.
어쩌면 한때 그녀가 품었으나 이제는 끔찍한 괴물이 되어 버린 아가.
어느 쪽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차오른 다정한 미소에 리처드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줄곧 잊고 있었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잔잔하던 어린 시절.
천진난만하게 꽃밭을 휘젓고 다니는 조그마한 소년의 뒤에 늘 있어 주었던 다정한 여인.
자신을 유일하게 ‘아가’라고 불렀던 여인.
어느 순간부터 멀어졌지만, 분명 한때 자신의 세상 전부였던…….
여인은 마지막으로 리처드의 뺨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살짝 열린 입술은 옅은 숨결조차도 더 이상 뿜어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계산 없이 사랑해 주었던 유모가 세상을 떠났음을 깨달은 리처드의 얼굴이 경악과 충격으로 물들었다.
* * *
날카로운 쇠붙이가 도로테아의 목 아래로 드밀어졌다.
그저 겨누기만 했을 뿐이지만, 연약한 살은 검이 스친 것만으로도 피가 묻어났다.
도로테아는 어째서 자신을 향해 검을 드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눈을 하고서, 일그러진 얼굴의 황자를 빤히 응시했다.
“영애!”
메릴린의 새된 목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리처드의 검을 손으로 잡아 내렸다.
“죄송하오나, 전하. 제 여식에게 검을 겨누지 말아 주십시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대답해라. 어째서 유모가 죽었지? 함께 있던 다른 것들은 죄다 사지 멀쩡하게 살아 숨 쉬는데, 내 유모만이 죽은 까닭이 무어냐.”
이미 이성을 잃은 황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저 편리한 시중인,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으면서.
죽음 앞에서야 그녀가 소중해진 모양이었다.
어리석게도 잃은 것은 아무리 아쉬워하고 억울해도, 화풀이를 해도 돌아오지 않는다.
눈앞의 황자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정작 가졌을 때에는 사람의 진심 어린 애정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하더니.’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된 걸까.
도로테아의 시선이 맨손으로 검을 쥔 벤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에 난 상처에서 솟아난 피가 검날을 타고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모를 잃으신 비통함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도 흥분을 거두셔야겠습니다. 말씀만 들어서는 제 사촌의 무사 귀환을 바라지 않으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유모의 맥을 짚어 본 데인이 고개를 젓는 것을 확인한 필립은, 도로테아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리처드를 향해 차분하게 권했다.
물론 이미 흥분으로 이성을 잃은 리처드에게는 그 어떤 말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몸을 던져서라도 그녀를 구했어야지! 감히 누가 내 유모를, 어린 시절부터 나를 기른 유모를 건드린단 말이냐!”
도로테아를 향한 일방적인 힐난에 주저하던 메릴린이 어렵게 입을 뗐다.
“제닉스 부인은…….”
“메릴린.”
줄곧 해명 한마디 없이 리처드가 외치는 것을 그저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던 도로테아가 메릴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작게 고개를 저었다.
“…….”
상황을 설명하려 했던 메릴린이 입을 다물자, 차분한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웅성대는 귀족들을 향해 울려 퍼졌다.
“저희를 납치하는 걸 도운 술사를 잡았습니다. 심문을 한다면 배후를 밝힐 수 있을 테지요.”
“누구냐! 어떤 무도한 놈이야!”
리처드의 손에 들린 예기 어린 검이 허공을 휘저었다.
결계사는 재갈이 물린 채 기절한 상태로 프리드의 감시 아래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설령 리처드가 뛰어난 검사가 아닐지라도, 눈먼 검에 맞았다가는 꽤 크게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루크는 눈이 뒤집힌 제 형제를 향해 냉랭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추태를 보이지 마십시오, 형님. 황자라면 적어도 무엇이 더 중한지는 아실 터.”
“추태?! 추태라? 너는 네 계집이 멀쩡하게 돌아왔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도로테아를 향한 리처드의 눈이 증오, 분노와 같은 어두운 빛깔의 감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철 지난 스캔들을 언급하는 리처드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루크가 상대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술사를 마차에 가둬라. 사건을 상세히 조사해야 하니 제닉스 부인의 시신을 거두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금하도록. 검시가 필요할 수 있으니.”
“누구 마음대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리처드가 발버둥 치자, 줄곧 굳은 얼굴로 지켜보던 에이든이 황자의 뒤통수를 뻑 소리가 나도록 가격했다.
다른 귀족들이 경악하거나 말거나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를 향해 꽥꽥대던 황자를 달랑 들어 올려 옆구리에 끼고서 짐마차 한구석에다 던져 넣었다.
“에이든 경! 지금 무슨 짓을!”
“미친 황자 놈이, 납치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조카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데 경들은 그 누구도 황자를 제지하지 않는구려. 저 헛소리에 동의하여 이 자리에서 테아를 ‘즉결 처형’해야 한다고 믿는 거요?”
“…….”
찔끔한 귀족들이 살기가 형형한 에이든의 눈을 피했다.
에이든은 분노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실은 그 또한 리처드 이상으로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차분해 보이지만 도로테아도, 메릴린도 어딘가 충격을 받은 듯 묘하게 말이 없었다.
“에이든 외숙부.”
“테아야.”
“아버지의 상처를 좀 봐 주세요.”
“나는 괜찮…….”
“안 괜찮아요. 치료하셨으면 좋겠어요.”
도로테아의 눈이 집요할 정도로 피가 흐르는 벤의 손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본 벤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습격을 받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마차가 통째로 사라지다니.
마치 누군가 마법을 부린 것처럼 정확히 그녀가 타고 있던 마차만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고서 다들 얼마나 당황했던가.
‘게다가 제닉스 부인은 왜……?’
그녀는 애초에 테아와 같은 마차에 타고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줄곧 딸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던 벤은, 메릴린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한 순간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하게끔 막는 도로테아를 보았다.
“아버지.”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되레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주한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부인의 시신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게끔, 온전하게 황도까지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대개 그녀가 바라는 것들은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토록 강력하게 ‘부탁’을 해 온 적은 없었던 딸아이의 말에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마.”
“…….”
벤은 모포에 둘러싸인 제닉스 부인의 시신이 실리는 것을 지켜보는 도로테아를 위로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가.”
알고 있었다.
스스로 사지에 걸어 들어가기로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제닉스 부인 본인이었으며, 도로테아는 그 선택에 단 한 번도 관여한 적 없었다.
다만…….
“리처드는 저 여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잘 몰라요.”
불쑥 꺼낸 말에 벤은 잠자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본인이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고는 이제 와 그녀의 죽음 앞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 있잖아요.”
그녀의 생각을, 마음을 짓밟은 것은 리처드 본인이었건만.
결국 제닉스 부인의 진심은 죽음 앞에서조차 단 한 번도 그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도로테아는 처음으로 가슴 한편에 무언가가 기분 나쁘게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불쾌감.
개인을 향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환멸과 불쾌감이었다.
* * *
“테아야, 차라리 내가 같이 마차에 타는 것이 어떠냐? 혹시 또 납치 시도가 일어났을 때 내가 같이 있다면 안전할 것이 아니냐.”
“마차에 자리가 없는걸요.”
시신이 마차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비좁은 자리가 더욱 좁아질 수밖에.
그중에서도 3인분은 너끈히 할 만한 덩치의 소유자인 에이든이 마차에 타는 것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럼 차라리 데인이라도 앉혀 두려무나. 콜린 형님과 함께 마차를 타는 건 너무 위험해.”
“괜찮아요. 여차할 때에는 소리를 지를 테니까. 그리고 좀 전에 그 정도의 전력을 보냈는데 또다시 납치를 시도할 만큼 상대의 사정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제 형을 향해 불신의 눈초리를 듬뿍 보낸 에이든이 마지못해 콜린에게 당부했다.
“내가 그러니 형님에게 호신술이라도 좀 배우라 하지 않았소. 그 몸을 하고서 왜 기어이 여기까지 와서는 마차 자리를 차지하고 그러시오?”
“…….”
“형님만 아니었어도 내가 테아와 갈 수 있었을 거 아니요.”
양심 없게도 제 덩치의 반도 되지 않는 호리호리한 콜린을 탓하던 에이든이 입을 삐죽이며 팩, 하고 돌아섰다.
창백한 얼굴의 콜린은 동생의 헛소리에 반응하는 대신 조용히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마자 도로테아가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도 느꼈지?”
“…….”
“누군가가 사문(死門)을 열어 나를 그곳으로 초대했어.”
결계사는 그저 주변의 결계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사문(死門)을 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명계의 존재, 명계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소리겠지.
“동료를 보았니?”
“느꼈을 뿐이다.”
“저쪽에서도 너를 발견했을까?”
“아니, 내 기운은 이미 네 것과 더 유사하지. 더 이상 죽음의 빛을 띠지 않는다. 설령 나를 본다 하더라도 이질감만 느낄 뿐, 내가 무엇이었는지 알기는 힘들 게다.”
고친 명부를 직접 대조하지 않으면 모를까.
“명계의 존재들은 인계에 관여할 수 없는 것 아니었어?”
“그것이 규율이지.”
“그렇다면 누군가가 규율을 어기고 인계에 관여한다는 소리인데, 그걸 이제까지 알아채는 놈들이 하나도 없었어?”
“…….”
“명계 놈들 전부 다 머저리 아냐?”
콜린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발끈하며 네가 사신의 고충을 아냐고, 명계의 그 다사다난하고 복잡한 계급과 그 위에 짬밥만 먹은 무능력한 상사들과,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꿀만 빨려는 하급 신들까지 읊어 댔겠지만…….
그러기에는 도로테아의 상태가 심상찮았다.
차분하고 고요한 눈동자 아래 자리한 억눌린 어두운 감정이 너울거렸다.
“어떤 존재가 협력 중인지 아는 것이 중요한데…….”
도로테아가 제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콜린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분간 모습을 드러내거나 오늘처럼 대놓고 명계의 길을 열지는 못할 거다.”
“협력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면?”
“무슨…….”
“하나도 마음이 동했는데 둘이라고 마음이 동하지 않겠어? 무수히 많은 사신들이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며.”
“…….”
도로테아가 천천히 몸을 숙여 한때 사신이었으나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인간과 동화되기 시작한 창백한 안색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삶. 그건 사신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서라도 충분히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품에 고이 포장된, 아름다운 브로치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들을 대하는 눈빛은 부드러웠고, 악연이라 부를 수 있을 도로테아에게조차 때로는 걱정을, 때로는 서운함을 드러내는 그는 이제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 사신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보긴 했어?”
“…….”
입을 꾹 다문 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로테아는 천천히 숙였던 몸을 다시 꼿꼿이 세우고는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목숨이 급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라도 당신에게 못 할 짓만 한 건 아니야. 그렇지?”
무언가 심경의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일까.
늘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목소리에 아주 미묘한, 알아채기 힘든 수준의 흔들림이 담겼다.
답지 않게 말이 많아진 어린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콜린이 한숨처럼 답을 뱉었다.
“그래.”
“…….”
“나는 선택지가 주어진대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