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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97)화 (97/242)
  • 혼술사 도로테아 97화

    도로테아는 흥미로운 얼굴로 후드를 푹 뒤집어쓴 존재를 응시했다.

    꽁꽁 가려 놓은 후드 안쪽을 보려는 듯 손을 뻗자, ‘그 존재’는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게 스르르 뒤로 물러섰다.

    - 건방지게도 저주를 걸어 나를 찾다니. 고작해야 네 곁에 있는 황자나 네 잘난 가족들을 믿는 거라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말이 많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이 서 있으면서도 도로테아는 여유로웠다.

    지나친 여유에 상대가 입을 다물어 버릴 정도로.

    “곧바로 나를 찾아오라고 했는데도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걸 보니.”

    그녀의 한쪽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해주(解呪)를 시도했었구나?”

    “…….”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상대의 침묵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토록 요란하고도 막무가내인 방법을 쓴 까닭도 이해했다.

    자잘한 사술 따위로 ‘살’을 풀어내려 시도한 무모함에 박수를 쳐 주어야 할까.

    고작 일신에 있는 마력으로 구현한 마법이나, 계약을 통해 정령을 부리는 것과 같을 리가…….

    그것은 자신의 혼을 걸고 상대의 혼에 새기는 상흔이다.

    상대의 숨이 멎어 혼이 육신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짙고 깊은 상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거겠지.”

    고작해야 어린 계집이 흩뿌린 주술이라며 얕보고서 살풀이쯤이야 저도 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혼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어설프게 건드리는 것은 도리어 독이 될 터.

    이미 균열이 진 틈새에 억지로 힘을 주어 엇나간 조각을 이어 붙이려 한들 그것이 붙을 리 없었다.

    균열은 더욱 커지고, 상처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은 더욱 부스러지며, 그렇게 찢어진 혼을 감당하지 못한 육신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공간을 가득 울리는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가득 들어찼다.

    마치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거는 듯 또렷하지만 방향을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도로테아는 아무 말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 당장 저주를 푼다면, 그 성의를 봐서 네 가족들은 살려 주겠다.

    “글쎄, 너희들이 감히 내 가족들을 건드릴 수 있을까? 여태까지 네 뜻대로 된 것이 없을 텐데.”

    저택을 향해 넘실거리던 악의는 몇 번이고 견고한 담을 넘어 들어왔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품에서 소중한 것을 앗아 간 적은 없었다.

    무수히 많은 시도들은 전부 그녀의 손에서 가볍게 저지되었다.

    결국 그녀를 한 번이라도 꺾어 보기는커녕 방심하다 살까지 맞은 상태가 아닌가.

    엎드려 울며 빌어도 코웃음 치며 무시할 판에,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협박을 하려 들 줄이야.

    - 고작해야 날 곤란하게 만들어서 의기양양한 모양인데, 나 말고도 너희 가문과 너를 노리는 자들은 많아.

    줄곧 의뭉스러운 웃음과 함께 자리에 서 있던 도로테아가 손을 뻗어 눈앞의 후드를 걷어 냈다.

    쑥 벗겨진 후드 안에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둥둥 떠 있던 후드가 천천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직접 만나러 와.”

    어지간히도 얼굴을 드러내기 곤란하거나 자신감이 없는 모양인데, 나는 직접 나서지도 못하면서 뒤에서나 떠들어 대는 버러지 따위를 상대할 마음은 없으니까.

    - 우습군. 실은 너 또한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처지 아닌가? 내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너 또한 네 그 잘난 술법도, 정령도 움직이지 못할 텐데?

    도로테아의 마지막 말이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인지, 차분하려 애쓰던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 내 오늘 숨이 다한다 해도…….

    목소리가 작아졌다 커지길 반복했다.

    군데군데 맥을 끊어 놓았으니 제대로 힘을 쓸 수도 없을 터인데 어떻게든 그녀를 망가뜨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도로테아의 팔을 잡아 가두는 옅은 속박의 힘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발이 땅에 달라붙었다.

    - 내 미천한 종아, 이리로 와 이 아이를 베어라. 망가뜨려라. 말을 할 수 있는 입만 두고서 사지를 뒤틀어 버려라!

    마차에 있는 메릴린이 나오지 못하게끔 문을 막고 있던 제닉스 부인이 그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이리로 와라, 나의 조…….

    “설마 인계에 사문(死門)을 여는 무모한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내가 정말 아무런 방비도 없이 이곳에 왔을까.”

    어디선가 차랑, 하는 방울 소리가 울렸다.

    - 누구냐!

    당황한 듯 새된 목소리가 허공 가득 울려 퍼졌다.

    마차 안에 있던 메릴린이 빼꼼하게 고개를 들고서, 언젠가 제인이 들었던 것보다 조금 작은 방울을 손에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생문(生門)은 남쪽에 있으니 그쪽을 향해 방울을 흔들어요, 메릴린.”

    고개를 주억거린 메릴린이 미간을 좁힌 채 진지하게 물었다.

    “흔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기왕이면 박자에 맞춰서요.”

    “무슨 박자에 맞춰야 하나요?”

    “어떤 박자든 상관없어요. 평소 본인의 몸에 밴 박자라면 더 좋겠죠. 이를테면 왈츠 박자라든가.”

    “왈츠요? 지금 왈츠라고 했어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얼굴에 불신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 너, 이 계집!

    그것도 잠시였다.

    머뭇거리며 멈추려던 손은 다시 선명해진 목소리에 재빠르게 방울을 흔들기 시작했다.

    차랑- 차라랑- 차랑-

    어느새 왈츠 박자에 맞춰 방울을 흔드는 메릴린의 발이 아닌 척 가볍게 바닥을 굴렀다.

    소극적인 몸짓으로 열심히 방울을 흔드는 메릴린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주변을 가득 메운 방울 소리에, 분노한 목소리가 드문드문 섞여 들었다.

    - 저걸……! 멈……! 저 계지……!

    “기왕이면 어울리는 움직임도 함께해 봐요. 왈츠 박자니까 가볍게 스텝을 밟아 보는 건 어때요?”

    제의(祭儀)에서 몸의 움직임이라는 건 ‘기운을 빌려주는 자연에게 스스로의 성의를 보이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에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장단과 몸짓으로 정성 들여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둥둥 떠다니는 후드에 겁을 먹은 듯 움츠렸던 메릴린이 문 뒤에 숨어 팔만 열심히 흔들면서 소리쳤다.

    “그걸 저더러 믿으란 말이에요?!”

    “진짜예요.”

    물론 그녀는 술사가 아니므로 대단한 힘을 쓸 수는 없겠지만, 간단한 스텝을 밟으며 육신과 소리를 한 몸처럼 맞춘다면 신물의 영험함을 한층 높일 수 있었다.

    ‘무무(巫舞 : 무구를 사용할 때 함께하는 춤사위)의 위력을 믿지 않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술사들은 대개 가만히 서서 주문을 외우는 것이 고작이었던가.

    대자연의 힘을 빌어 쓰면서도, 자연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몸짓조차 없다니.

    이들의 술법이 하나같이 일차원적으로 고루한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메릴린은 참 의심이 많네요.”

    눈이 벌게진 메릴린이 미친 듯이 방울을 흔들다 이를 악물고 도로테아를 향해 외쳤다.

    “저기- 내 앞에- 말하는 후드가- 서 있다구요! 둥둥 떠다니면서- 유령처럼!”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미친 듯이 허공에 방울을 휘두르는 메릴린은 말하는 후드도 주춤할 만큼이나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근데 저 후드 앞에서 왈츠를 추라는 당신 말을 내가 믿게 생겼어?!”

    “춰도 손해 볼 건 없지 않아요? 어차피 보는 눈도 없는데.”

    “그걸 말이라고 해요?!”

    목소리가 빽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쩌적, 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하면서도 씩씩하게 방울을 흔들어 댄 메릴린 덕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위적인 사기(死氣)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술사의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증거였다.

    도로테아는 위협만 할 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후드에게서 등을 돌린 채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부르르 떨던 목소리만 남은 존재가 쉭쉭거리며 지시했다.

    - 내 미천한 종아, 얼른 ‘그들’을 불러내어 저 계집을…….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던 제닉스 부인이 천천히 품에서 통신구를 끄집어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통신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녀는 이내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떨어뜨려 밟아 깨뜨렸다.

    - 무슨 짓이냐?!

    태연히 고개를 든 제닉스 부인이 도로테아를 향해 충고를 건넸다.

    “밖에 매복 중인 이들이 있습니다, 영애. 당장 결계를 푸시면 위험하실 겁니다.”

    - 너, 감히 지금 누구에게……!

    도로테아는 분기탱천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던 피피를 꺼냈다.

    저들은 아직 그녀가 다루는 힘의 근원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일어나, 잠꾸러기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품을 쩍 하고 일어난 다람쥐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재빠르게 도로테아의 품을 벗어났다.

    결계가 급격히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고는 하나, 평범한 인간이 빠져나가기에는 주변의 사기가 지나치게 충만했다.

    애초에 죽음의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기(神器)가 아니라면 결계를 넘어서는 건 어렵겠지.

    쪼르르 달려 나가는 피피를 바라보던 도로테아에게 다가온 제닉스 부인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저들이 영애에게 먹이라던 물건입니다.”

    “흥미롭네요. 고(蠱)와 비슷한 물건인가.”

    사람의 정신을 파고들어 지배하게끔 만드는 기생충.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더 단순한 단백질 덩어리처럼 보였다.

    옆에서 열심히 방울을 흔들며 후드가 그들의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주변의 결계를 무너뜨리려 애쓰던 메릴린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저기, 손이 좀 아픈데요?”

    “저런, 어쩌죠.”

    가만히 지켜보던 제닉스 부인이 메릴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가 흔들까요?”

    “그래 주시겠…….”

    - 좋아, 이 미천한 종아. 네가 지금이라도 그 방울을 멈추게 한다면 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시금…….

    막 제닉스 부인에게 방울을 건네려던 메릴린이 기겁을 하고 몸을 돌려 다시 방울을 흔들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방울 소리를 따라 후드의 목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 저것, 저것이 내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그렇겠지.

    제대로 된 형식도 갖추지 못했고, 술사조차도 아닌 메릴린이 흔드는 간이 무구(巫具)에도 영향을 받을 만큼이나 상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 내가 이대로 주술을 풀지 못하면 너라고 무사할 것 같으냐? 어리석은 것!

    간과할 수 없는 말을 들은 도로테아의 눈이 제닉스 부인에게 머물렀다.

    과연, 타인의 귀감이 되는 귀족 부인이라는 건 이런 생물인가.

    흐트러진 호흡조차 자연스러운 것인 양 위장하고, 미미하게 떨리는 손끝이 들키지 않게끔 드레스 자락 사이에 감추었다.

    창백한 안색 위로 서서히 차오르는 푸른빛.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

    “종속의 계약을 맺으셨군요, 부인.”

    이미 확신한다는 듯한 나직한 말에 제닉스 부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빈틈없이 꼭꼭 채워져 있던 옷깃 아래에 푸르게 빛나는 인(印)이 눈에 들어왔다.

    방울을 흔드느라 여념이 없던 메릴린이 훅, 숨을 들이 삼켰다.

    “그리해야만 저들이 진심으로 제가 하고자 하는 목표에 눈이 멀어 영애를 해치려 한다고 믿어 주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의심은 깊고도 집요했다.

    “덕분에 영애께 많은 것들을 알려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남는 장사가 되었지요.”

    훅, 하고 마치 촛불이 꺼지듯 주변의 결계가 일순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애써 버티고 있던 제닉스 부인 또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겁먹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메릴린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가 스몄다.

    “괜찮습니다. 계속하세요. 영애는 잘하고 있어요.”

    달싹이는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와닿았다.

    메릴린의 방울 소리가 거세어질수록 주변의 풍경들은 더욱 아지랑이처럼 흔들렸으며, 제닉스 부인의 숨소리 또한 숨길 수 없을 만큼 거칠어졌다.

    순간, 굉음과 함께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풍경이 확 바뀌었다.

    피피의 안내를 받은 프리드가 이미 무너져 가는 공간의 생문(生門)을 검으로 내리그으며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웃음기 한 점 없이 도로테아가 서늘하게 명했다.

    “술사를 놓치지 마.”

    열린 공간의 틈새로 손을 뻗은 도로테아가 그늘 아래 몸을 숨긴 술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히에에에엑……!”

    매복하고 있던 암살자들이 예고도 없이 튀어나왔지만, 프리드의 검이 쇄도하는 것이 더 빨랐다.

    몸을 웅크린 결계사(結界師)가 엉금엉금 기어 빠져나가려다 프리드의 손에 붙잡혔다.

    성가시게 발버둥 치는 술사의 목덜미를 쳐 그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순간, 이성을 잃은 목소리가 내뱉는 마지막 발악이 들려왔다.

    - 독한 계집 같으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감히 날 함정에 빠뜨리다니!

    빽빽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한 도로테아가 제닉스 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그녀의 몸에서 기괴한 빛을 내는 인(印)에 손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지 마세요, 영애.”

    “…….”

    “알고 있습니다. 지금 영애께서는 데리고 다니는 정령조차 다루기 버거운 상태라는 것을요.”

    잡힌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제닉스 부인은 제 손보다도 더 서늘한 도로테아의 손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애초부터 그리 삶에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 리처드의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

    “끝을 맺으려는 순간, 이상하게도 영애가 마음에 걸렸어요. 제 손으로 기른 아이도 몰라주던 제 심정을…… 마치 온전히 이해한다는 듯한 그 눈빛이…… 고작해야 저의 반도 살아 보지 못한 영애가 보내는 그 공감이…….”

    한 번도 위로받아 본 적 없는 삶이었다.

    누군가는 그녀의 기품과 행동을 찬탄했고, 또 누군가는 그녀의 그런 면을 본받으라며 다른 귀족 영애들을 옥죄는 데에 사용하곤 했다.

    그녀의 지위는 누군가에게는 시샘과 부러움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견제를 낳았고.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하던 아이는 어느새 괴물이 되어 갔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삶인데도 다른 이들은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눈앞의 소녀를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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