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 (91)화 (91/242)

혼술사 도로테아 91화

식사 내내 침묵이 흘렀다.

하룻밤 새에 며칠을 앓아눕다 온 사람처럼 짙은 병색을 하고서 나타난 도로테아는 경이로운 속도로 식사를 이어 나갔다.

이따금 덜덜 떨리는 손이 스푼을 놓치거나 포크를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뒤에서 대기 중이던 고용인들이 재빠르게 그녀의 식기를 바꾸어 주었다.

접시 위의 요리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요리로 채워졌다.

다들 식사를 하는 것조차 잊고서 도로테아를 바라보고 있을 만큼 기묘하리만치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테아야, 천천히 먹거라.”

에이든이 목이 잔뜩 멘 목소리로 당부했다.

“불쌍한 아가. 여기 이렇게 많은 놈들 중에 도움 되는 놈 하나 없으니 이토록 메말랐구나.”

“감사해요, 외숙부. 그렇지만 저분들도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 와중에 도움 되는 놈이 없다는 소리를 은근슬쩍 긍정한 그녀의 말에 발끈하던 이들은, 도로테아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기침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네 손은 그 스푼마저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덜덜 떨리는데…… 가볍고 편하게 스푼을 쥐고 있는 놈들의 손목을 전부 아작 내고 싶은 심정이란다.”

그러자 별생각 없이 스푼을 손에 쥐고 있던 리처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에이든의 턱수염이 분노로 파들파들 떨렸다.

“고기를 써는 손놀림이 참으로 느려졌구나. 평소였더라면 이 정도는 진작 다 썰고 한 덩어리 더 받았을 텐데. 내가 좀 썰어 주랴?”

“아뇨, 외숙부님이 썰면 고기가 망가져요.”

“으응…….”

그 와중에 도움의 손길을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시무룩해진 에이든을 보다 못한 데인이 접시를 가져가 제가 대신 고기를 썰어 주었다.

식사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제국에서 손꼽는 검사가 ‘조카가 걱정되어’ 뿌리는 살기를 맞으며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날 때 즈음에는 그들 또한 핏기 없이 허여멀건 도로테아와 비슷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   *   *

“테아, 머리가 흐트러졌어.”

발레리의 말에 도로테아가 걸음을 멈췄다.

느릿하던 걸음을 멈추는 것조차 힘겨운 듯 힘을 주어 선 발끝이 옆으로 삐끗했다.

그런 그녀를 능숙하게 부축한 필립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발레리가 손을 뻗어 도로테아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말없이 눈을 끔뻑이며 제 머리카락을 맡기고 있던 도로테아를 향해 발레리가 아침 인사를 건네듯 여상한 태도로 제가 들은 소식을 전했다.

“도버 경이 성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들이 모두 죽었대.”

“응.”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애초에 그들에게서 뭘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구나.”

“상대가 그리 녹록한 사람이 아닌 걸 알았으니까.”

“그렇다면,”

곱게 매만진 머리에서 손을 뗀 발레리가 도로테아의 앞에 섰다.

“애초에 그자들을 잡아들이고 도버 경을 놓아준 것은 그저 네 계획을 가리는 연막이었겠네.”

“왜 그렇게 생각해?”

“그토록 여유롭던 백작님이 허둥지둥 새벽에 성을 빠져나가고, 너는 하룻밤 새에 이렇게 반쪽이 되었으니까.”

애정 어린 손놀림으로 도로테아의 볼을 톡톡 두드려 준 발레리는 제대로 된 답도, 납득할 만한 설명조차 해 주지 않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랑스러운 테아. 가끔 너는 지나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라.”

다정한 목소리에 깃든 탄식에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니. 네 계획이 이런 것임을 알았더라면 나도, 메릴린도, 그리고 이 성에서 너를 아끼는 그 누구도 협조하지 않았을 거야.”

“…….”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슬쩍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부리고 있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본 발레리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네.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네가 어째서 사랑받는 법에도, 사랑을 주는 법에도 서투르기만 한 건지.”

너를 소중히 여기는 친구가 있고, 너를 귀하게 여기는 아버지와 가문의 어른들이 있으며, 네 유년 시절을 가득 채워 준 외사촌들이 이렇게 네 곁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그녀의 시선이 오늘따라 유독 인형 같아 보이는 도로테아를 훑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마치 사람으로 살아온 것보다 더 긴 세월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살아온 것처럼.”

“…….”

움찔한 것은 도로테아가 아니라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필립이었다.

그의 표정이 흐트러진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발레리는 필립을 보지 않고도 그의 동요를 알아차린 듯 미소 지었다.

“내 어설픈 감상에 불과하니,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제 발언을 가볍게 넘긴 발레리가 도로테아의 코끝을 손으로 가볍게 튕겼다.

“그렇지만 각오하는 게 좋을걸.”

“응?”

“때로는 말이야. 증오나 미움, 열등감과 혐오 같은 감정에서 파생되는 분노보다도 애정 어린 분노가 더 깊고 크며 몹시 집요한 법이거든.”

줄곧 의뭉스럽게 모른 척하던 도로테아의 얼굴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의문’이 떠올랐지만, 발레리는 모른 척 그녀를 지나치며 상냥히 경고를 건넸다.

“제아무리 테아 너라도 앞으로의 일을 수습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거란 이야기.”

사락사락 드레스 자락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발레리의 뒷모습을 보던 도로테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방문 앞에 다다라 이제껏 그녀의 지지대가 되어 준 필립을 향해 축객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줄곧 조용히, 든든하게 곁을 지키던 그녀의 외사촌이 선수 치듯 입을 열었다.

“프리드 경은 에이든 숙부님이 데려가셨어. 쇠약해진 너를 지키려면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숙부님의 힘이 다할 때까지 제대로 훈련시키겠대.”

“그렇구나.”

“그래서 당분간은 내가 네 개수작을 막기 위해서라도 곁에 있을 예정이야.”

부드럽고 다정한 필립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로테아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수정 빛 눈동자가 깊어졌다.

소중한 존재를 향해 다정하고 따뜻한 눈길을 보낸 필립이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닌 척하면서 실은 사람들의 이목을 몹시 신경 쓰고, 네 그 ‘별난 힘’을 쓰는 것도 조절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혹여 또 쓸데없는 짓을 하려 들면 그때는 사람들을 잔뜩 불러온 다음에 네가 무엇을 하는지 보라며 구경거리로 만들까 하고.”

“당분간은…… 아무것도 할 생각 없는데.”

이미 상태가 이토록 처참한데 여기서 더 무리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상대가 제아무리 괘씸하더라도 제 목숨이 우선인 건 도로테아에게도 당연한 이야기니까.

눈을 끔뻑이는 도로테아를 보던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

“응, 그럴 것 같긴 하지만 반쯤은 화풀이야.”

누군가 필립의 거죽을 덧쓰고 제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낯선 얼굴을 한 그를 보며 도로테아가 살짝 주춤했다.

아름답고 다정한 사촌은 도로테아의 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발레리 제르망 영애의 말이 맞아, 테아.”

환한 미소를 띤 필립의 얼굴을 본 고용인들이 주변을 지나가다 말고 얼굴을 붉히며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그 누구든 침 한 번 뱉지 못하게 만들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필립 하이클레어가 말했다.

“나, 너한테 좀 화났어. 테아.”

도로테아는 그런 사촌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한 채 그저 눈을 끔뻑일 따름이었다.

*   *   *

하녀가 분주한 걸음으로 방을 찾았다.

“아가씨,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둬요.”

이미 전보가 한가득 쌓여 있는 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놓을 자리가 없었다.

산더미 같은 전보들 위에 조심스럽게 새로운 전보를 올려놓은 하녀가 문 너머로 총총 사라졌다.

침대에서 뒹굴던 도로테아가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고작해야 반나절 사이, 이미 서른 통이 넘는 전보를 건네받은 도로테아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몹시 심오하게 중얼거리는 도로테아의 말을 자연스럽게 흘린 필립이 따뜻한 생강차를 그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몸을 덥혀 줄 거야. 얼른 마셔.”

그녀가 이곳에 내려와 어떤 위험들을 겪었는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들에 뛰어들었는지, 어떻게 건강을 해쳤는지를 낱낱이 고한 건 필립이었다.

‘십중팔구 가문으로 돌아가면 공주님 취급을 받게 되겠지.’

그것을 즐기던 때도 있었지만, 성년에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까지 기껍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가시다 싶을 만큼 품에 안고 감싸는 어른들의 과보호에서 이제야 벗어나기 시작하던 차였다.

이번 일이 그녀의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게 하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영민한 이가 심술을 부리니 여간 성가시고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장 신경 쓰고 골치 아프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필립이니, 그 누구보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필립이었다.

입안에 머금고 있던 생강차를 넘기자 특유의 알싸함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도로테아는 짐짓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쩌다 저렇게 자라났을까.”

콜린이 교육을 잘못했나.

사신에게 인간을 길러 내라고 한 것부터가 문제였을까?

진지한 고찰 속에 잠긴 도로테아를 향해 누군가의 말이 날아들었다.

“쟤가 어쩌다 저렇게 자랐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기가 막힌다는 듯 내려다보는 우드의 옆에서 콜린이 제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명명백백하게도 네 영향이다.”

“솔직히 네가 해 온 짓들을 보면 이것도 약하다만.”

그녀의 권속들은 그녀의 편을 들기는커녕 필립의 심술을 있는 힘껏 지지하고 있었다.

도로테아가 꼼짝없이 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몹시 흡족한 빛을 띠는 이들을 보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권속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번 기회에 말 안 들어 먹는 멧돼지처럼 홀로 들이박는 버릇 좀 고쳐라.”

“실례야.”

귀족 영애를 향해 멧돼지라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우드는 그런 도로테아를 향해 도리어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후작님께서 말을 타고 오시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게 좋을 거다. 돌아가면 아마 족히 몇 달은 금족령이 내려지겠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넌 좀 불손한 인간이야.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끌어모아 네 운명을 바꾸어 주었건만.”

사검(死劍)에 휘둘려 살성(殺星)의 길을 가려던 이의 궤도를 비틀어 제 앞으로 데려다 놓기 위해 얼마나 신중히 공을 들였던가.

그러나 공들인 보람도 없게끔 그 당사자는 주인 된 자를 비웃기에 바빴다.

“말은 바로 해라. 네가 바꾼 내 운명이 원래의 운명보다 더 괜찮은 게 확실하더냐?”

“제국에 이름을 떨칠 살인마가 되는 게 꿈이었니? 지금이라도 그렇게 만들어 줘?”

유치한 말싸움의 공방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정중한 노크 소리에 두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물자 필립이 다가가 문을 열었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서는 남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발레리 님께서 영애가 아프시다는 말씀을 전해 주셔서요.”

품에 안긴 아이는 아직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반쯤 뜨인 눈에는 전과 달리 초점이 또렷하게 잡혀 있었다.

도로테아는 아이에게 미소 지으며 남자를 향해 의례적인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원래 그리 건강한 몸이 아니었던지라 먼 여행길에 지쳤나 봐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완연한 병색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본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전만 하더라도 그리 병약하다는 인상은 아니었던 영애가 하룻밤 사이에 이토록 얼굴이 상했다면 무언가 명확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가 자신의 딸을 회복시켜 주었던 ‘기묘한 힘’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분명 아이를 치료하시느라 자신의 생명까지 소진하신 것이 틀림없다.’

남자의 눈에 일개 천민의 아이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귀족 영애를 향한 감격이 차올랐다.

도로테아의 침대 맡을 지키고 있던 우드는 상대의 심상찮은 감정 변화에 불안함을 감지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남들의 눈이 없을 때나 도로테아를 놀려 먹는 거지, 다른 이들의 앞에서 그녀를 웃음거리가 되도록 만들거나 낮출 생각은 없었으므로.

남자가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었다.

“아이를 위해 영애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제 목숨을 드려서라도 꼭 갚겠습니다. 평생을, 한평생을 영애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품 안의 아이가 아버지의 행동에 파드득 놀랐다가 이내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맑고 고운 눈동자에 온전하게 담긴 도로테아는, 자신의 외조모가 짓곤 하던 자애롭고 상냥한 웃음을 엇비슷하게 걸치며 손을 저었다.

“그저 하고픈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이가 잘 자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죠.”

“…….”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대의 오해를 기정사실인 양 만드는 도로테아의 수완에 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짓을 배척하고 싫어하는 것은 사신의 본능이었다.

그의 눈이 눈물로 도로테아에게 충성의 맹세를 건네는 남자를 집요하게 쫓았지만, 오해를 바로잡고 진실을 고해야 할 입술은 굳게 닫힌 채 상황을 방관했다.

“…….”

메릴린 레어가 도로테아의 방을 찾은 것은, 본능을 거슬러 진실 앞에 침묵한 전직 사신이 불쾌감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있던 그때였다.

야차 같은 얼굴을 한 콜린을 본 메릴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겁을 먹고 주춤거리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고 방 안으로 걸음을 들였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해 침대 기둥에 기대고 있던 도로테아가 옅은 미소를 띠자 메릴린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제가 저 아이를 치료해 달라고 영애에게 부탁한 것이…… 생각보다 큰일이었군요. 나는 몰랐어요.”

“괜찮아요. 모를 수도 있죠.”

이번에도 굳이 착각을 정정해 줄 생각이 없는 도로테아는, 그저 웃으며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짐을 한층 더 얹어 주었다.

‘수고를 한 건 사실인걸.’

비록 제게도 필요한 일이라 도운 것이긴 하지만, 상대가 먼저 오해를 했는데 굳이 바로잡을 필요까지야 있을까.

안 그래도 이쪽은 필립의 철통같은 감시 아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게 생겼건만.

“제가 그랬잖아요. 메릴린 영애는 저의 좋은 친구라고.”

도로테아의 다정한 말에 울컥한 메릴린이 결연한 얼굴로 콜린을 바라보았다.

글썽거리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마주한 메릴린의 기세에 당황한 콜린이 멈칫했다.

“아끼는 조카분께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소중히 여기는 영애의 건강이 나빠졌으니 콜린 경께서 불쾌해하시는 것이야 당연하죠.”

“…….”

“이 일은, 제가…… 그러니까 그 도원결의라는 것을 해서라도…….”

메릴린의 말을 듣고 있던 우드가 굳은 콜린 대신 나섰다.

“정신 차리십시오, 영애. 그런 미친 짓을 왜 하시겠다고 나서는 겁니까!”

“저따위가 하이클레어 후작 가문의 소중한 영애와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꺼낸 말은 아니에요. 제가 그런 맹세를 한다고 해도 영애와 같은 수준에 올라선다는 생각은 감히 한 적도 없어요.”

우드는 필사적으로, 성난 황소처럼 어둠의 구렁텅이에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메릴린을 만류했다.

“메릴린 영애, 영애의 인생도 소중합니다. 당신도 가족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버님께서는 도로테아 영애와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제 한 몸 정도는 기꺼이 바치라 하셨지요.”

욕망과 권력의 화신인 아버지를 둔 메릴린에게는 우드의 만류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죄책감에 시달려 어렵게 용기를 낸 메릴린의 말에, 도로테아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손 위에 얹었다.

그 미적지근한 온기에 위로받은 메릴린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우드가 한숨을 삼켰다.

‘틀려먹었군. 얘도 끝났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