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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75)화 (75/242)
  • 혼술사 도로테아 75화

    3황자의 ‘별장’은 말문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성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한 성 아래로, 푸르스름한 이끼가 낀 기암괴석의 틈으로 드문드문 물이 차올랐다.

    은빛 규사로 이루어진 백사장은 햇빛과 만나 바다와 모래의 경계가 흐트러질 만큼 아름다운 빛을 뿜어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그림과 같이 자리한 성은 황자궁 못지않게 훌륭했다.

    ‘과연…….’

    ‘흥청망청 돈 쓰는 일에는 특출한 황자답군.’

    말을 삼키는 귀족들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무능한 리처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가, 자칫 잘못하여 일을 망치는 것이 더 걱정스러웠지만 눈앞의 성은 차마 별것 아니라며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답사 오길 잘했군요. 정말 멋진 곳이에요.”

    “3황자님께서 그토록 자랑스레 여기실 만한걸요.”

    도로테아와 발레리가 건넨 ‘의례적인 칭찬’에 리처드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빛이 감돌았다.

    입에 발린 말을 하려던 몇몇 차관들이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일련의 무리들이 일행의 곁으로 다가섰다.

    선두에 보이는 인물을 본 순간 리처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몇몇 이들을 대동한 채 가까이 온 키엘 스펜서는 윤기 나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다가와 다정히 말을 붙여 왔다.

    “스펜서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황자님께 여러분의 방문 소식을 듣고, 미흡하게나마 귀한 손님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제법 깍듯이 예의를 갖춘 인사에 너도나도 인사를 건넸다.

    키엘의 눈이 마지막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콜린에게 지그시 머물렀다.

    예민하기 그지없는 콜린 하이클레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저런, 콜린 경께서는 긴 여행길에 고초가 많으셨나 봅니다.”

    섬세하게도 보았군.

    리처드와는 달리 준비성이 뛰어난 데다 일행들을 배려하는 태도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 스펜서 백작을 보자, 다른 이들도 한결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았다.

    ‘황자 놈이 망친 테이블도 스펜서 백작이라면 정리해 줄 테지.’

    키엘은 몹시도 상냥하게 콜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피곤하시다면 방에서 조금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널찍한 침실을 구비해 두었습니다.”

    “휴식은 필요 없습니다.”

    굳이 ‘침실’을 강조하는 말에 콜린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제안을 뿌리쳤다.

    그는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필립에게로 고개를 돌려 한마디 보탰다.

    “너와 같이 방을 쓸 생각이다.”

    그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꺼낸 제안에 잠시 멈칫했던 필립이 이내 그림 같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콜린’이 이토록 경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키엘이 몹시 아쉽다는 눈으로 콜린을 훑었다.

    희한한 작자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콜린으로 하여금 한껏 불쾌함을 표현하게 만들었으니.

    ‘게다가 테아와도 무언가 인연이 있는 것 같고…….’

    필립이 직접 스펜서 백작을 조사해 보겠다고 했을 때, 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으니까. 당장은 내버려 둬. 적어도 그가 다른 생각을 품었다고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건 다른 속내를 품고 있더라도, 직접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내버려 두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직 온전하게 속내를 밝히지 못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필립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그때, 눈치 따위는 밥 말아 먹은 지 오래인 에이든이 껄껄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이고, 형님. 아들 사랑이 그렇게 특출하셔서 어찌합니까.”

    “…….”

    “필립도 이제 사내놈인데 독립해야지요. 침실을 같이 쓰다니.”

    딱딱하게 굳은 콜린의 얼굴만큼이나 메마른 목소리가 쏘아붙였다.

    “내 자식을 어찌하든 내 마음이다.”

    “그리 자식 놈이 좋으십니까? 침대에서 끌어안고 주무시게?”

    “끌어안는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같은 방에서 묵겠다고 했을 뿐이야.”

    서릿발같이 차가운 말에도 에이든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카인 필립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아버지가 저래 봬도 너를 몹시 아끼고 사랑하는 모양이다. 물론 과보호가 좋은 것은 아니나, 정 줄 곳이 많지 않은 양반이니 네가 이해해라.”

    콜린의 뺨이 미세하게나마 파르르 떨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목격한 이는 없었다.

    필립은 숙부의 헛당부를 들으며 모른 척 미소를 띤 채, 동행인들을 소개하는 스펜서 백작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성의 관리를 맡고 있는 제닉스 남작 부인입니다. 다들 익히 아실 테지만 한때 리처드 황자님의 유모였으며, 황태후 폐하의 오랜 벗이기도 하지요.”

    우아하게 허리를 굽힌 부인을 필두로 의식주를 책임져 줄 관리인들이 차례차례 인사를 건넸다.

    “먼 길을 오시느라 시장하시지요? 고된 여행길에 피로하실 것을 감안하여, 식사 후 여독을 풀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편안하게, 테이블 가득 만찬을 즐기며 백작령에 도착한 이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오직 리처드만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지나칠 정도로 굳은 것이, 마차를 타는 동안 몹시도 고역이었지. 게다가 바깥 음식을 먹으려니 영 입맛이 돌지 않았어. 역시 유모만이 내 괴로움을 알아주는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마저도 시중을 들어 주는 이들만 다섯이 넘고, 특별히 주문 제작된 황실 마차를 홀로 타고, 매끼마다 익힌 고기를 원해 사냥까지 시켜 놓고.

    침묵하는 이들의 얼굴에 잠시지만 어이없음이 스쳐 지나갔다.

    “자아, 그럼.”

    줄곧 눈을 내리깔고 있던 도로테아가 몇 걸음을 옮겨 제닉스 남작 부인의 앞에 섰다.

    “이토록 아름다운 성을 관리해 오셨다니 대단하시네요, 부인.”

    “송구합니다. 영애의 수고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사절단을 접대하기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조건들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미 예산안과 계획들을 모두 정리하여 올려 두었습니다.”

    도로테아의 얼굴에 만족스런 웃음이 맺혔다.

    애초에 공치사 따위는 누가 하든 누가 받든 상관없었다.

    사절단이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 황제의 몇 마디에 떠맡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

    상대가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면 쓸데없는 아귀다툼에도 낄 필요 없이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니.

    “저녁 만찬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도로테아의 눈이 하늘에 닿을 듯 솟은 성의 첨탑으로 향했다.

    그 위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마치 눈이 마주치기라도 한 듯 푸드득 날아갔다.

    *   *   *

    “왜 굳이 이곳으로 오겠다고 한 건지 좀 궁금해지네.”

    “응?”

    “사절단 접대 따위, 애초에 별 신경도 쓰지 않았었잖아.”

    나긋한 발레리의 말에 도로테아가 웃었다.

    “폐하의 명인걸. 나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지.”

    “그런 것치고는 3황자님께 모든 권한을 넘긴 것처럼 굴고 있는데?”

    “유능한 이가 있다면 써먹는 것도 책임자의 몫이니까.”

    결과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편이 좋았다.

    특히나 황자가 끼어 있으면 책임을 떠넘기기도 오죽 쉽나.

    발레리는 마치 도로테아의 속내를 모두 헤아린 사람처럼 말없이 미소 지었다.

    새하얀 손을 뻗은 그녀는 마치 시녀가 하듯 도로테아가 걸친 액세서리를 빼기 시작했다.

    귀걸이, 팔찌, 머리 장식…….

    자칫 흉기가 될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물건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섬세한 손길은 통증 하나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자아, 테아. 다니기 편하도록 머리를 내려 줄게.”

    곁에 머무는 시녀조차도 그러기 힘들진대, 발레리는 마치 천직이라도 되는 양 도로테아의 곁에 서서 까다로운 환복을 도왔다.

    늘 그래 온 것처럼 아주 익숙한 솜씨였다.

    “발레리.”

    “응?”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방을 따로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좋겠어.”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던 손이 잠시 멈췄다.

    의아한 기색을 띠는 상냥한 친구를 향해 도로테아가 웃으며 덧붙였다.

    “오늘 저녁에는 각자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종종 후작가에 초대받아 하룻밤을 지내고 갈 때면, 같은 방에서 잠을 청하곤 했던 발레리 제르망이 아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가 그렇다면야.”

    이유조차 묻지 않고서 그러겠노라 말해 주는 친우의 태도에 도로테아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노크 소리와 함께 아래층에 만찬장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에 두 소녀 모두 몸을 일으켰다.

    친밀하게 손을 맞잡고서 안내에 따라 내려가는 두 소녀의 뒤로 프리드가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낯선 이들이 그들을 지나치는 도로테아 일행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   *   *

    만찬은 화려했지만 리처드의 폭주에 지친 귀족들은 일찍이 휴식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본격적인 답사 일정은 다음 날부터 진행될 예정이었다.

    연회조차도 마다하고 방에 틀어박힌 이들이 일찍 잠이 들고, 어수룩한 밤이 깊어질 무렵 누군가 도로테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셔도 좋아요.”

    “늘 곁에 있던 호위가 보이지 않는군요.”

    예상대로 늦은 밤, 도로테아의 방문을 두드린 건 키엘 스펜서였다.

    방문이 닫히고 그가 온전히 방 안으로 들어오자 몇 걸음 뒤로 물러선 도로테아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천천히 몸을 아래로 굽히며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은인을 뵙습니다.”

    “……그랬지. 그때도 줄곧 나를 은인이라고 불렀었지요.”

    “말씀을 낮추셔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후작 영애니까요. 그때에는 몰랐기에 용납되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지요.”

    “신분 따위와는 상관없이, 은인께서는 제 은인이시니까요.”

    “…….”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목숨을 빚졌다.

    모르는 척하기에는 사내의 변덕은 확실히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다정했었다.

    잠시 침묵하던 키엘이 손에 들고 온 작은 등불은 좁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문 앞에 있어야 할 호위를 물린 것은 영애인 모양이지.”

    “저를 위해 이곳까지 함께 와 준 친우를 부탁해 두었습니다.”

    자신은 에이든이 있어 줄 것이라는 핑계를 대고서.

    자리를 비키지 않으려 한다면 재우기라도 할 심산인 도로테아의 의중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과묵한 호위는 순순히 물러났다.

    “아아, 그 귀여운 아가씨를 말하는군. 너와는 영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조금 신기했었지.”

    마치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이 어울리는 광경 같았다고나 할까.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었다.

    “의외로 통하는 데도 있답니다.”

    그렇게 덧붙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엘이 별안간 훅 본론으로 넘어갔다.

    “리처드를 충동질해서 이곳까지 내려온 것은 역시 나를 만나기 위해서인가?”

    “모처럼 은인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게는 하해와 같은 은혜를 주신 분께 마땅히 인사를 드리러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키엘의 기다란 손가락이 탁자를 토독 토독 두드렸다.

    “글쎄…… 그때 너와 헤어질 때 이름을 건네지 않는 것으로 이쪽의 의사는 충분히 밝혔다고 본다만.”

    “은인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도와 드릴 수 있는데도요?”

    후작 영애라서가 아니었다.

    도로테아의 눈에는 남자의 쩍쩍 갈라지고 벌어진 영혼의 균열이 아플 정도로 훤히 들여다보였다.

    남자의 상태는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해져 있었다.

    “밤마다 고통스러우셨을 텐데요.”

    은근한 목소리가 키엘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 물음을 던졌다.

    “해방되고 싶지 않으세요?”

    콜린과 ‘계약’한다면 키엘에게 끊임없이 들려올 환청이나 불면증, 자연스레 이끌려 들어오는 부정적인 기운들과 타락한 인간들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터였다.

    “저는 신관들조차도 손을 대지 못한 은인의 고통을 덜어 드릴 수 있어요.”

    실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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