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 (74)화 (74/242)
  • 혼술사 도로테아 74화

    리처드를 들쑤셔 놓은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스펜서 백작이 직접 이번 사절단의 응대를 맡은 외무 대사를 비롯한 차관 전원을 영지로 ‘초대’한 것이다.

    원한다면 후보지로 적합한지 명명백백하게 평가를 받겠다는 그의 공개 선언에,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버린 일의 뒤처리를 맡은 자문단은 이를 박박 갈았으나…… 꺼내 들 수가 딱히 없었다.

    황제가 침묵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용인한다는 뜻과 같았다.

    선수를 빼앗긴 데다 리처드라는 혹까지 붙었으니, 자연히 도로테아에게 원한을 품는 이들도 많았다.

    “나는 조금 걱정이 되는구나, 테아.”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벤의 염려에도 도로테아는 싱긋 웃기만 했다.

    떽떽거리는 귀족들의 시선이나 말 따위가 두려웠으면 진작 중임을 맡겠다는 결정조차 하지 않았을 터.

    게다가 그녀에게는 리처드라는 훌륭한 욕받이도 있었다.

    걱정 어린 당부를 듣던 에이든이 옆에서 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그래, 매형! 나만 믿으시오!”

    “…….”

    정책 입안을 추진하고 있는 펠릭스는 황도를 떠날 수 없는 입장이고, 후작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호위 및 보호자 명목으로 따라붙게 된 것이 하필이면 에이든과 콜린이라니.

    한쪽은 지나칠 정도로 힘은 넘치되 신중함이 없고, 한쪽은 이성적이고 냉정하되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어느 면에서는 자기 고집이 아주 넘치고.’

    벤은 에이든에게서 고개를 돌려 조용히 우드에게 당부했다.

    “내 딸아이를 잘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댁의 따님이 잘못될 확률보다, 차라리 다른 귀족들의 안부를 물어봐 주시는 것이 좋겠지요.

    우드는 그런 말을 목 너머로 삼키고 그저 딸을 둔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우드의 담담함에 조금이나마 놓으려던 마음은, 다음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나팔 소리에 또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보기에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네 마리의 말들이 끌고 있는 사륜마차에서, 한껏 멋을 부린 3황자가 턱을 치켜든 채 내리고 있었다.

    “어머나.”

    굳어 버린 펠릭스 옆에 있던 다이애나가 살짝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후작의 눈썹이 꿈틀, 하고 위로 치솟았다.

    리처드가 타고 온 마차 뒤로, 꽉꽉 채운 짐마차가 두 대나 더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   *   *

    화려한 금박 장식을 단 마차가 양옆의 호위를 두고 거리를 스쳐 지나갔다.

    보수적인 귀족들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요란한 행렬의 근본적인 원인인 리처드는 몹시도 고양되어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하이클레어 가문의 마차에 탄 콜린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몸이 쑤신다며 말을 타고 달리러 나간 에이든과는 정반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눈에 띄는 행렬이 아닐까?”

    “눈에 띄는 것이 좋아.”

    발레리의 말에 도로테아가 짧게 답했다.

    차라리 대놓고 대단한 지위를 갖춘 인물이 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어중이떠중이들의 접근을 막아 줄 테지.

    게다가 황자 일행이 ‘스펜서령으로 간다.’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다면 뜻밖의 인물이 낚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테아, 네가 괜찮다면야.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네.”

    그렇게 말한 발레리가 웃었다.

    구태의연한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침묵을 택한 도로테아의 웃음기는 식사 시간이 되자 조금 더 짙어졌다.

    “여기서 고기를 구웠다가는 지나치게 냄새가 날 것 같은데요.”

    “황자님께서는 조식에는 가볍게 과일을 곁들인 샐러드를, 중식에는 익힌 고기를 드시며, 석식에는 해산물 및 곡물을 섭취하십니다.”

    함께 일행으로 나선 이들 대부분이 침묵했다.

    귀족들의 행렬이 소소할 리 없지만, 매 식사마다 이토록 상을 차리고 신선한 재료를 공수하여 준비하는 일은 드물었다.

    ‘여행길이 몹시 길어지겠군.’

    누군가 이번 행렬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자칫, 본업에 소홀하다며 고발이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편한 것도 좋지만 적당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쥬벨 백작께서도 난감하신 게지. 황태후 폐하께서는 3황자 전하의 저런 전횡을 그저 귀엽다 여기고 계시니.”

    “이번 행렬의 책임자는 사실…….”

    귀족들의 고개가 한곳으로 쏠렸다.

    도로테아는 이미 차려진 간이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은 채 가장 먼저 접시 위의 음식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그 옆에 앉아 다소곳이 접시의 음식을 덜어 낸 발레리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말이야.”

    “응?”

    “이럴 생각으로 황자님을 끌어들인 건 아니지?”

    도로테아는 그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다음 접시를 꺼낼 뿐이었다.

    “부황께서는 이제껏 나의 쓰임을 아끼셨지만, 그것도 모두 이렇듯 적절한 때를 기다려 주신 것이지. 시작부터 이런 중임을 맡게 되었으니 참으로 어깨가 무거워!”

    어깨가 무겁다는 놈이 가는 길목에서 이런 짓을 하나.

    다들 한구석에서 열심히 불을 붙이는 하녀들과,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 셰프를 살폈다.

    다른 일행들이 암울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처드는 몹시 신이 나 있었다.

    “내 첫 공식 업무로 이토록 중요한 일을 맡기시다니.”

    정확하게는 교섭의 모든 권한은 전적으로 도로테아에게 맡긴 것이며, 그녀가 ‘누굴 가져다 써도 좋다.’라는 암묵적인 허락을 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옳았다.

    보다 못한 차관 중 하나가 에이든의 옆구리를 찔렀다.

    “에이든 경, 어째서 나서지 않으십니까……!”

    평소였다면 망나니 황자의 엉덩이를 두들기고, 황궁에 가서 죄를 청할지언정 엉망이 된 기강을 바로잡으려 들었을 텐데.

    에이든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가 모처럼 즐겁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처연히 읊조렸다.

    “오래 앓아 몸이 허약하여 체질이 좋지 않은 조카아이가, 먼 길을 가는데 조금이라도 편한 것이 경들은 그리도 싫은가?”

    “……!”

    “저 보게. 식사하는 모습을.”

    눈물을 지으며 볼 만한 장면은 아닌 것 같은데.

    다들 일제히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하니 기울였다.

    백금발의 호리호리한 소녀는 몹시 놀라운 속도로 접시 위의 음식을 작은 입속으로 수납했다.

    깔끔하게 한입에 가득 넣고 삼키는 모습을 보다 보면 절로 식욕이 돋을 정도로, 먹는 모습은 게걸스럽기보다…….

    “입맛이 없음에도 중임을 맡았으니 체력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억지로 음식을 먹는 저 모습을 보란 말이오. 우리 테아가 저토록 어른스럽소. 아니 그렇소, 형님!”

    우렁찬 소리로 조카 자랑 따위를 하는 에이든의 말을 무시한 콜린이 눈을 감았다.

    평소에도 창백해 보이던 낯빛은, 이상하게도 스펜서령에 다가서면 설수록 더욱 핏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콜린 하이클레어 쪽인 것 같은데.’

    다들 떨떠름하게 입을 닫았다.

    호위를 책임지는 에이든 하이클레어가 3황자의 만행 아닌 만행을 묵인하고 있으니 다른 이들로는 방법이 없었다.

    “정말 영애를 알다가도 모르겠군.”

    순식간에 귀족들을 모두 잠재울 수 있도록 리처드를 끌어들이는 수완 하며, 불온한 소문에서 빠르게 벗어날 정도의 기지를 발휘하는 영민함.

    그런데 지금은, 3황자의 정신 연령에 맞추기라도 한 사람처럼 철없고 사치스러운 데다 어리석기까지 한 후작 영애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일부러 보여 주는 것처럼.

    “아.”

    쉴 새 없이 음식을 집어넣던 도로테아가, 천천히 접시를 내려놓았다.

    드디어 기나긴 식사가 끝이 났다며 다들 반색한 그 순간이었다.

    “오, 후작 영애도 식사를 끝냈군. 그럼 티타임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소화를 시켜야 하니까.”

    “……!”

    리처드의 눈치 없는 말에 일어서려던 도로테아가 다시금 자리에 조용히 엉덩이를 붙였다.

    “내 특별히 황궁의 파티시에를 데려왔으니 궁에서만큼은 아니어도 꽤 즐길 만할 거야.”

    “그렇군요.”

    “참 기대되네요.”

    발레리가 마음에도 없이 기대된다는 말을 덧붙이자, 도로테아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디저트가 만들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절단이 곧 당도할 것인데 이렇게 준비했다가는…….”

    아직 별장에 도착도 못 했어.

    다들 머리를 쥐어뜯는 그때에, 몹시 추레한 차림새의 부녀가 다급히 황도로 향하고 있었다.

    *   *   *

    추격자는 몹시도 집요했다.

    지형에 능한 사냥꾼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출발할 때만 해도 여섯이었던 일행은 어느새 단둘이 되어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남자가 품 안의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걱정 마라. 이 아비가 꼭 너를…….”

    이미 눈에 초점이 없는 아이는, 남자의 품 안에서 마치 종잇장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기절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몇 번이고 맥을 짚어 보며 옅게 남아 있는 숨에 희망을 담아 남자는 가까스로 황도에 다다랐다.

    추레한 차림의 부녀가 번화가에 나타나자 몇몇은 얼굴을 찡그렸으며, 몇몇은 한숨을 쉬며 두 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빙 돌아 지나쳤다.

    ‘여기가 황도인가.’

    일생을 좁은 땅덩어리에서 살아온 남자에게 화려한 상점들이 즐비한 황도의 번화가는 새로운 세계나 다름없었다.

    입을 떡 벌리기도 잠시. 그는 분주한 걸음을 옮겨 치안대로 향했다.

    “고발을 하러 왔습니다, 나리.”

    추레한 차림과 축 늘어진 아이. 사내의 간절한 눈을 보는 치안대장은 몹시 곤란한 얼굴이었다.

    “고발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즈, 증인이…….”

    “증인이?”

    “오던 도중 죽었습니다.”

    얼굴 가득 찬 수심에 치안대장이 한숨을 삼켰다. 눈빛만은 진실하지만, 대개 이런 종류의 고발은 결코 좋은 결과를 맞이하지 못하는 법이다.

    “증인은 죽었고, 손에는 증거가 없으며, 고발을 보증해 줄 귀족도 없다. 황도까지 온 용기는 가상하다만 고발은 어려울 거다. 특히 상대가 귀족이라면…….”

    “국경 지대에서 사술을 쓰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

    “로, 로헨 왕국의 사람들이 틀림없었습니다!”

    로헨 왕국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치안대가 술렁였다.

    하필이면 국빈맞이 준비가 한창인 이때 고발이라니.

    시기가 몹시 절묘하지 않은가.

    “본인이 증인인가? 직접 보았다고?”

    “제, 제 딸아이가…….”

    의식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는 언뜻 보면 숨이 끊어진 것처럼 여겨질 만큼 생기가 없었다.

    혀를 찬 치안대장이 이마를 꾹꾹 눌렀다.

    “로헨 왕국과 제국은 오랜 우방이며, 폐하께서는 이 동맹을 더욱 강화해 국경 지대의 다른 이민족들을 막아 낼 생각을 하고 계시네. 이럴 때에 말뿐인 고발은 소용이 없네.”

    남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든 순간이었다.

    뒤에 서 있던 이들 몇몇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절박한 귀에 스며들었다.

    “로헨 왕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 사절단의 총책임을 맡은 것이 하이클레어 후작 영애였지?”

    “폐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그토록 어린 영애에게 국빈을 맞이하는 중임을 맡기시다니.”

    “현자의 탑에 머물고 있는 맥그리거 경을 제외하면 그분이 제국의 유일한 정령사니까. 제국의 눈부신 미래를 이끌 인재를 보여 주고 싶으신 거 아니겠어?”

    힘없이 돌아선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아이의 가쁜 숨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신관을 찾는다 해도 그의 처치에 치료 따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리라는 걸 알기에, 이곳까지 아득바득 찾아왔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한들, 증인을 없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노릴 터.

    최후의 희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