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57화
리처드가 주춤주춤 물러나며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멧돼지가 새끼를 늦게 배거나, 말거나. 내가 이를 어찌 안단 말이냐. 이건 사고였다.”
차마 황제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웅얼거리는 그의 말에 도로테아가 가볍게 동의했다.
“저도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리처드가 일부러 새끼 밴 멧돼지를 잡았을 리도 만무하고, 또 그것으로 수컷을 유인하게 되리라고도 생각했을 리 만무하지.
당연한 일이다.
도로테아조차도, 어미의 배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어 간 새끼의 마지막 단말마를 듣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실인 것을.
가엾게도 몇 마디 말 때문에 수세에 몰린 리처드는 궁지에 몰린 쥐가 발버둥 치듯 버럭 외쳤다.
“그런데도 내 이름을 이 사고의 원흉인 것처럼 들먹거리며 몰아세운 저의가 무엇이냐?!”
황자의 얼굴이 수치로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멀뚱히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천천히, 조곤조곤 답했다.
“한낱 사냥감의 임신 여부도 모르시는 황자님께서, 저와 7황자님 사이에 모종의 일이 있었다는 그 사실은 어찌 아실 수 있으셨는지 궁금해서요. 저 멧돼지를 잡으려 활을 겨눌 때에 신중히 가늠하시고도 모르셨는데, 저와 7황자님에 대해서는 보지도 않으시고 단정하시기에 그랬습니다.”
소문은 제때에 잠재우지 않으면 또다시 불씨를 일으킨다.
루크와 협력할 일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 패거리가 되는 것에 동의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둘 사이에 ‘정분’이라도 생긴 것처럼 엮는 시선들은 더욱 불쾌했다.
제 아버지를 응원하기 위해 자리했을 뿐인데.
“5년 전 우연하게도 제게 불온한 소문이 돌았을 때, 후작이신 제 할아버님께서 황자님께 도움을 청하셨죠. 그때 황자님께서 연이어 제게 곤란한 상황이 닥치는 것을 보고 호의로 기사를 보내어 주시긴 했습니다만, 이는 그저 스치는 호의에 불과했습니다.”
“…….”
“저는 오히려 궁금한 것이, 3황자께서는 도대체 어찌 저 호위 기사의 존재를 아셨는지요. 7황자께서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폐하께조차 고하지 않은 일인데요.”
“…….”
저택에 사람을 심었거나, 7황자의 곁에 3황자의 첩자가 있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떳떳한 방법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파악한 귀족들은 저마다 재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눈을 끔뻑였다.
본디 야심을 감춘 적 없던 3황자가 물밑에서 치열한 수 싸움 중이었음을 예상하지 못한 이들은 없을 터였다.
다만 그러한 일이 있으리라 짐작하는 것과, 문제의 다툼이 수면 위로 드러나 모두의 앞에 까발려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귀족들은 저마다, 대놓고 뺨이라도 맞은 듯 말을 잃은 리처드를 흘깃거렸다.
동생의 긴 침묵이 이어지자, 윌리엄이 상황을 정리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폐하, 비록 사건의 발단이 리처드가 사냥한 멧돼지였다고는 하나 아우는 그저 실수한 것에 불과합니다. 테아, 너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마려무나. 그는 그저 사냥이 즐거워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니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잠시 간과한 것뿐이야.”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황자님의 행동을 마음에 담고, 담지 않고를 정하겠습니까. 저는 일개 귀족 영애에 불과한 것을요.”
조금 전까지 매섭게 몰아붙였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태도를 굽히는 도로테아를 보며 귀족들이 혀를 내둘렀다.
아직 어린 그녀의 수완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말 몇 마디로 황자를 이 사냥터에 있던 모두의 흉수 취급하지 않았던가.
리처드가 비록 과격하며 자주 이성을 잃는 편이긴 해도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건만.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취한 도로테아의 뒤로, 막 옷을 갈아입고 진정한 뒤 막사에서 나온 메릴린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이미 사고라며 못을 박긴 했지만, 어떻게 보자면 ‘진정한 피해자’는 그녀가 아닌가.
갑자기 제게 쏠린 시선에 메릴린이 몹시 당황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왜 다들 나를 보고 있지?’
그때 윌리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리처드에게 권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네가 만든 불씨가 튀어 고생한 영애에게 사냥물을 좀 바치는 건 어떨까?”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사냥물들은 엉뚱한 인간에게로 넘기게 생겼다.
리처드가 메릴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말을 내뱉었다.
“좋아, 사냥감의 절반을 영애에게 바치지.”
이를 부득부득 가는 그의 목소리에 메릴린이 얼어붙었다.
뜬금없이 3황자가 왜 제게 사냥물을 바친단 말인가.
그때 뒤늦게 사냥감을 한 무더기 몰아온 데인 하이클레어가 도로테아의 ‘좋은 친구’로 점찍어 놓은 영애에게 3황자가 사냥물을 건네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을 보았다.
‘황자가 직접 사냥감을 건넬 만큼 명망 있는 영애였군.’
게다가 저 많은 사냥물을 받고도 기뻐하고 뻐기는 기색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더더욱 테아의 친구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짙어지는 것과 동시에, 저도 잘 봐 달라는 의미에서 무언가 건네야 한다는 생각이 데인의 입을 열리게 만들었다.
“저도 메릴린 레어 영애에게, 사냥물의 절반을 바칠까 합니다.”
“……?!”
메릴린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별안간 데인 하이클레어가 미쳤나.
자신과 얼마나 보았다고 갑자기 사냥감을 바쳐?
데인은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 뒤이어 오는 숙부, 에이든을 향해 몇 마디 속삭였다.
“응? 테아 친구라고? 그래? 그럼 나도 이걸 선물해 주마.”
에이든이 짊어지고 오던 커다란 곰을 굉음과 함께 내려놓았다.
쿠웅!
그날 가장 많은 사냥감을 받고 사람들의 주목을 듬뿍 받게 된 메릴린은 기뻐하기는커녕 불안으로 가쁜 숨을 쉬다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메릴린은 이미 도로테아 하이클레어와 절친한 친구로 못 박혀 있었다.
* * *
어미의 보호가 필요한 새끼와, 새끼를 밴 어미는 잡지 않는 것이 사냥 대회의 암묵적인 룰이지만, 이번만큼은 3황자로서도 운이 나빴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출산 시기도 아닐 이 시점에 늦게나마 새끼를 밴 멧돼지가 있으리라고 예측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사냥물이 화근이 되긴 했지만 벌을 내릴 필요는 없지.”
관대한 얼굴을 한 황제가 덧붙였다.
“그러나 3황자의 언사는 이제 막 사람들 앞에 나선 어린 영애에게 불편할 수 있었다. 황실 일가로서, 모범이 될 만한 태도는 아니었지.”
3황자 리처드는 이를 북북 갈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시비를 그냥 넘겼으면 모를까, 일이 커져서 자신이 형제를 멸시하고 여인을 함부로 대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사냥을 하고 흥분한 나머지 언사가 지나쳤나 봅니다. 반성하겠습니다.”
화를 삭이며 애써 먼저 숙이는 리처드의 태도를 본 도로테아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흔히 귀족 영애라면 ‘황자님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라거나 ‘개의치 마시라.’라고 예의상으로라도 말할 터.
자신을 향해 싱그러운 웃음을 보내는 도로테아를 본 리처드가 얼굴을 구겼다.
아니나 다를까, 앵두 같은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3황자 전하께서 기꺼이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시고 스스로를 돌아보고자 하신다니, 저로서는 전하의 성의를 차마 거절하기가 어렵네요.”
“…….”
말 몇 마디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리처드가 움찔했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입술이 열리려는 순간 긴장으로 온몸이 굳는 감각을 경험했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지듯, 도로테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에 소녀의 작은 부탁을 하나 들어주신다면 몹시 감사하겠습니다.”
“…….”
이미 공들여 사냥한 사냥물들은 죄다 처음 보는 영애에게 보상을 한답시고 빼앗긴 데다, 또 엉뚱하게 원수 같은 계집아이의 부탁까지 들어줘야 한다니.
리처드가 간신히 남은 이성을 쥐어 짜내어 물었다.
“무슨 부탁 말이냐.”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해 둔 것도 없는데 일단 덜컥 부탁을 들어 달란 말부터 남겼다는 말인가.
누가 봐도 ‘황자에게 빚 하나 지우겠다.’라는 심산인지라 듣는 사람들 모두가 신기한 듯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좀 전까지 그토록 철저한 논리와 짜임으로 황자를 구석에 몰아넣고는, 또 이토록 속 보이는 계산이라니.
도통 파악하기 어려운 소녀였다.
제가 원하는 바를 모두 전달한 도로테아가 미련 없이 돌아서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데인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황자랑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잖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에 왜 빚을 만들어?”
“황자잖아. 가진 게 없는 인간이면 넘겼지만, 가진 게 많은 인간이니까.”
뜯을 게 많아서 너그러이 넘기지 않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도로테아의 말에 옆에 있던 벤이 한숨을 쉬었다.
‘가난이 내 아이를 몹시 인색하게 만들었구나.’
그나마 없는 이에게는 베풀 줄 안다니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이에게서 뜯어내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닌데.
묘하게 방향이 어긋난 듯한 딸을 향한 아버지의 근심이 짙어졌지만, 정작 도로테아는 황제가 하사한 보화가 든 궤짝과 함께 그 어떤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즐겁게 집으로 향했다.
* * *
사냥제에서의 일은 금세 귀족들의 가벼운 입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갔다.
그 과정에서 과장된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골자는 결국 다시 7황자와 도로테아 간의 스캔들로 이어졌다.
호위를 주고받는 사이라니.
게다가 호위의 실력이 황실 친위대에 못지않아, 사냥터에서 귀족 영애를 구해 내기까지 했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기사의 아름다운 외모 또한 한몫했다.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자리한 아름다운 호위 기사에게 눈이 갈 때마다 사람들은 떠올리게 될 것이다.
7황자, 루크가 그녀를 향해 얼마나 큰 호의를 베풀었는지.
소문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도로테아는 3황자궁을 찾았다.
그녀가 무슨 부탁을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방문 이후 리처드가 고급 집기를 깨부수고 궁의 일부를 파괴했다는 사실만이 궁인들의 입을 타고 알음알음 다른 곳까지 널리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3황자 궁에서 거대한 3대의 마차가 무언가를 꽉꽉 채운 채로 후작가로 향했다.
다들 궁금한 듯 소식에 귀를 기울였지만, 사용인들의 무거운 입과 더불어 후작가의 철통 보안 덕에 그녀가 어떤 부탁을 했고 3황자가 그것을 어떻게 들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긁어 놓을 필요는 없었잖아.”
“나는 약속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것뿐이야.”
“네가 그 약속을 하게끔 상황을 만든 거지.”
도로테아의 일이라면 늘 관대했던 에드윈의 드문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그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면서도 꼬박꼬박 답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해명하지 않았더라면 리처드의 말 몇 마디가 내 평판을 망가뜨렸을 거야. 엉뚱한 소문이 도느니 차라리 제대로 받아치는 게 낫지.”
“…….”
에드윈의 걱정스런 시선이 한동안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도로테아는 저를 향한 집요한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입을 닫았다.
이제 와 프리드를 루크에게 돌려준다 한들,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소문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리처드의 일은 그리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그가 루크와 도로테아 간의 아주 사적인 대화나 상황까지 알 수 있었다는 건 분명 누군가의 입과 귀가 또다시 그녀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그래서, 이 많은 보화들은 다 어디에 쓸 생각이야?”
도로테아가 생긋 웃었다.
“써야지.”
“말해 두지만 이건 3황자의 궁에 있던 물건들이야. 이것들을 사용하면 네 돈의 사용처나 흐름이 그의 귀에 고스란히 흘러들어 갈 수 있어.”
“그러라고 쓰겠다는 거야.”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리처드가 용감해서 참 좋아.”
뜬금없는 말에 에드윈이 말을 잃었다.
사자왕 리처드.
용맹함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이전 생의 역사에 기록된 이름처럼, 리처드는 몹시도 용맹했다.
몇 번을 고꾸라지거나 함정에 걸려도 굴하지 않고,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최선을 다해 제게 걸려들지 않는가.
“덕분에 하려던 일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무쪼록 다치지만 마.”
사촌 누이의 기이함을 익히 알고 있는 에드윈은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