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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56)화 (56/242)
  • 혼술사 도로테아 56화

    메릴린은 여전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자신을 구한 것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도로테아는 메릴린이 부축을 받아 가까이에 앉는 것을 힐끔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심드렁한 도로테아의 시선이 메릴린을 스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최대한 몸을 웅크린 메릴린이 사람들의 연민을 사는 사이, 수습된 상황을 지켜본 황제가 일어섰다.

    “하필이면 운 나쁘게 사냥감이 이리로 왔구나. 숲을 뒤지는 자제들의 눈에 띄어야 할 것을. 영애가 갈아입을 옷과 안정할 수 있도록 치료사를 불러 주도록.”

    인자한 그의 목소리에 곁에 있던 시종들이 바삐 흩어졌다.

    미형의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자칫하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을 무탈하게 넘기도록 공을 세웠으니 상을 주어야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리드가 재빠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고했다.

    “부족하게나마 하이클레어 영애를 섬기고 있는 프리드입니다, 폐하. 그분의 지시로 주변을 순찰하던 중, 운 좋게 멧돼지를 처리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던 친위대장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특히 황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친위대장의 입장에서 방금 일어날 뻔했던 사고는 꽤 아찔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명 사고는 안전과 치안을 담당하는 그의 책임이니까.

    프리드가 자신의 ‘공’을 있는 힘껏 과시했더라면 그건 메릴린 레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 친위대장의 뺨을 갈기는 일이나 다름없었을 터.

    기사는 겸손한 태도로 문제를 부드럽게 넘기고 있었다.

    “하이클레어 영애라…… 그렇군.”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로테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던 1황녀가 재빠르게 아버지의 팔 위로 손을 얹었다.

    혼인 후 한동안 궁을 떠나 있었던 장녀의 애교 섞인 행동에 황제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황녀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과는 별개로, 저 사냥감은 후작 영애의 기사가 잡았으니 어찌할까요? 누구의 몫이 되어야 합니까?”

    프리드가 잡은 멧돼지는 사냥물 중에서도 독보적인 크기와 위용을 자랑했다.

    비록 가죽은 못 쓰게 되었을지언정, 잡은 이의 용맹함을 자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범상치 않은 엄니와 정강이뼈 등의 부위 또한 비싼 값에 팔릴 수 있을 테고.

    그러니 누구의 사냥물이 되든 간에 대회에 참석한 이에게는 큰 점수를 더하는 셈이 될 터.

    도로테아는 자신을 향해 호의 어린 미소를 보내는 황녀에게 작은 끄덕임으로 화답했다.

    ‘알아서 나서 주니 고맙네.’

    지금은 잠시 사교계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황녀가 황실의 핏줄이란 사실은 사라지질 않는다.

    작은 호의로 미리 환심을 사 두려는 그녀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그럼 저 멧돼지는 소녀의 아버지의 몫으로 더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제 사촌 형제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사냥에 참가하고 계시니까요.”

    그녀의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한때 후작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하류 계급 출신의 남자가 쌓아 둔 사냥물 더미로 향했다.

    ‘어느새…….’

    감탄을 자아낼 만큼 단연 돋보이는 솜씨는 아닐지라도 제법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단번에 죽은 듯 사냥한 동물들의 상태 또한 몹시 깔끔했고.

    사냥 대회에 참가해서 별 소득도 없이 돌아가는 귀족들도 수두룩하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벤 에버리는 첫 출전치고 몹시 선방하고 있는 셈이다.

    ‘상인 출신이라더니.’

    귀족들의 시선에 일순 변화가 일었다.

    예상한 것보다 훌륭한 솜씨가 드러나자, 그의 결과를 미리 점치고 비웃었던 이들로서는 머쓱한 일이 되어 버렸다.

    경멸과 혐오의 시선들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은 여전히 불편한 듯 외면했지만, 적어도 벤 에버리에 대한 인식을 바꿀 계기를 마련하는 정도는 되었으리라.

    ‘현명하군.’

    순식간에 제 아버지의 평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틀어 놓은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황제가 빙긋 웃었다.

    자신의 치하를 이용해 아버지를 높이긴 했지만 확실히 영민한 행동이었다.

    “아비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참으로 훌륭하구나.”

    도로테아의 청을 들어주려 황제가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막 제가 사냥한 사냥물들을 한 무더기 내려놓은 3황자가 도로테아를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사냥물은 루크에게 얹어 주어야지요. 후작 영애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저 기사는 루크가 선물한 것이니까요.”

    “……!”

    아버지를 챙기는 딸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귀족들이 술렁였다.

    영애의 호위인 줄로만 알았던 저 미형의 기사가 7황자가 직접 선물로 건넨 것이라고?

    도로테아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묘한 시선들을 받으며 깔끔하게 인정했다.

    “네, 확실히 프리드 경은 7황자 전하께서 제 안위를 염려하여 보내 주신 훌륭한 실력을 갖춘 호위죠.”

    7황자가 일개 영애에게 직접 기사를 선물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인데, 그 기사가 보여 준 무위도 몹시 남달랐다.

    황궁 친위대조차 반응하지 못한 상황에서 단칼에 커다란 멧돼지를 죽일 수 있는 실력.

    그런 기사를 굳이 직접 지목하여 도로테아에게 붙여 주었다는 것은 역시 둘 사이에 무언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뜻일까.

    머릿속이 바삐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했다.

    도로테아는 자신을 향한 살기를 굳이 감추지도 않고 드러내는 미숙한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섰다.

    저이는 오늘따라 유독 방정맞고 어리석구나.

    자리를 박찬 그녀의 행동에 곁에 앉았던 발레리가 재빨리 옷자락을 쥐며 만류했지만, 도로테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이 사냥물은 마땅히 소녀가 3황자 전하께 진상해야 합니다.”

    부드럽고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가 사냥터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사이 3황자가 빈정거렸다.

    “내게? 왜? 7황자로는 모자라, 내게도 줄을 대어 보려느냐?”

    원래 제멋대로에 난폭한 성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무례가 도를 지나쳤다.

    손녀를 향한 날 선 목소리에 후작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황후가 수습에 나서기도 전에 도로테아가 싱긋 웃었다.

    여유로운 그녀의 얼굴을 본 황제가 곁에 있던 이들을 제지했다.

    저 소녀가 또 어떤 말로 모자란 아들의 복장을 뒤집을지 내심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도로테아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멧돼지를 이곳으로 불러들여 제 기사로 하여금 사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이 3황자님이시니까요.”

    “지금 내가 부황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저 멧돼지를 유인했다는 소리냐!”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에 3황자, 리처드가 위협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넘실거리는 살기를 받고도 태연한 소녀는 제 손을 들어 3황자의 사냥물 더미를 가리켰다.

    “다들 아시겠지만, 메릴린 영애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3황자님께서 사냥하신 사냥물들입니다.”

    “허, 주변에 널린 것이 사냥물이다. 이곳에 흩뿌려진 피 냄새는 내 것에서만 난다더냐!”

    실로 뜬금없는 억지였다.

    도로테아는 3황자의 말에 납득하면서도 제게 귀를 기울이는 귀족들을 보며 생글거렸다.

    굳이 그를 공격할 마음은 없었지만 저를 향해 먼저 날을 세우는 이를 방관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멧돼지가 이곳을 습격한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짐승의 피 냄새가 부르는 것은 육식을 즐기는 동물들이지, 잡식성이라고는 하나 초식을 주로 하는 멧돼지는 아니지요.”

    멧돼지가 사납긴 하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굳이 사람들의 영역으로 들어와 습격을 자행할 리 없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의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곳으로 올 무렵 멧돼지는 몹시 흥분한 상태로 기사들이 쉽사리 제압하기 힘들 만큼 날뛰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흥분하게끔’ 만들었다는 의미일지도.

    ‘이건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이곳은 황실 일가가 머무르고 있는 자리가 아니었던가.

    다시 바뀐 분위기에 3황자가 말을 하기도 전에 도로테아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무엇이 멧돼지를 그렇게 흥분하게 만들었을까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 멧돼지 말이에요, 아무래도 수컷인 것 같거든요.”

    사냥에 조예가 깊은 노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컷에 비해 큰 엄니와 비교적 큰 덩치를 보아서는 수컷이 분명했다.

    뜬금없이 멧돼지의 성별을 언급하는 순간, 3황자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욕을 퍼부으려는 찰나.

    시종일관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황제가 손을 들어 아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못내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서 도로테아의 다음 말을 채근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책에서 보았는데 멧돼지가 가장 흥분하고 공격성이 강해지는 시기가 바로 짝짓기 직후 새끼를 밴 암컷이나, 아직 어린 새끼를 돌보고 있을 무렵이라고 들었습니다.”

    “폐하, 황공하오나 잠시 발언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친위대장이? 허락한다.”

    “영애, 저희는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다른 짐승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은 멧돼지의 영역과는 거리가 멉니다.”

    조심스레 말을 꺼낸 친위대장의 말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업무를 소홀히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때문에 3황자께서 잡아 오신 사냥물이 멧돼지를 불러왔으리라 추측했죠.”

    도로테아의 말에 다들 조용히 무더기로 쌓인 사냥물을 응시했다.

    “제 생각이 맞다면, 새끼를 밴 암컷이 저 사냥물 중에 있을 것 같아요.”

    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리처드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7황자가 사사로이 호위를 보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리처드는 이 유용한 정보를 가장 효과적인 상황에서 터뜨리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오늘 마침 적절한 상황에서 눈엣가시 같은 저 계집과 거슬리는 아우까지 한번에 보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건만.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이곳은 황제와 황후뿐만 아니라 시집간 누이와 사냥에 참가하지 않은 형제들까지 자리하고 있다.

    만일 프리드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멧돼지에 다친 이가 나왔을 터.

    “헛소리 마라! 지금은 짝짓기 철이 한참 지난 데다 이미 출산도 끝냈을 시기야!”

    리처드의 외침에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2황자, 윌리엄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5년 전 그랬듯이 온화하고도 다정한 눈길로 도로테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영애의 발언으로 자칫 아우의 명성이 흐려질 수도 있으니까요.”

    윌리엄의 말에 리처드의 눈이 흔들렸다.

    늘 애매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형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리처드는 몇 마디 말 때문에 아주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되는 셈이었다.

    도로테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덩치가 비교적 작고 엄니가 덜 뾰족한 멧돼지의 배를 봐 주세요. 가슴에 멍울이 크게 져 있다면 임신을 한 상태일 거예요.”

    윌리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리처드를 흘끗 돌아보고는 빠르게 사냥감을 확인했다.

    불안한 리처드의 눈을 바라본 그가 짤막한 한숨과 함께 도로테아를 봤다.

    ‘먼저 시비를 걸지 않았더라면 저 아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리처드가 쓸데없이 일을 키우는구나.’

    변함없이 제 아우는 못나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하필 도로테아는 너무나도 영민하게 컸고.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서렸다.

    허리를 굽혀 사냥감을 살핀 윌리엄이 정직하게 본 대로 고했다.

    “폐하, 영애의 말이 맞았습니다. 리처드가 잡은 멧돼지의 몸집이 유달리 남다르군요. 출산이 임박한 상태입니다.”

    “…….”

    얼이 나간 리처드를 외면한 채 도로테아가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을 부가했다.

    “번식기를 지나 뒤늦게 짝짓기를 한 것을 보니 다른 수컷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 늙거나 도태된 개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적처럼 가진 새끼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사냥물이 되었으니 원통할 법도 하지요.”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꺼내는 말에 다시 좌중이 조용해졌다.

    몇몇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멧돼지의 입장에 몰입하기라도 한 것인지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우스워라.’

    사냥제가 무엇인가.

    고작 인간들의 실력을 겨루고 짐승의 생명을 끊고자 모인 자리에서 새끼를 밴 암컷의 죽음이 안타까워 고개를 숙이다니.

    도로테아는 뜻밖으로 흘러간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채 멍청히 서 있는 리처드를 심드렁하니 바라보았다.

    ‘태자귀(胎者鬼 : 어미의 태에서 죽었거나 이른 나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원귀)가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짐승은 제아무리 억울해도 항변할 수 없다.

    동정받는 것조차도 대변해 주는 ‘인간’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그가 도로테아를 제멋대로 공격하지만 않았더라도 굳이 밝힐 필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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