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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26)화 (26/242)

혼술사 도로테아 26화

한참을 멍하니 도로테아를 보던 청년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도로테아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청년을 위해 친히 다시 한번 무릎을 굽혀 인사한 뒤 물었다.

“너는 누구냐고.”

몹시도 공손한 몸짓과 달리 말은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헛웃음을 짓던 청년은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윌리엄 팰런 스트라이더라고 합니다, 아가씨.”

“그래, 윌.”

도로테아는 후작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궁에는 안내인들이 많다.

혼자 움직이지 말고 데리러 오길 기다려라.

이미 두 번째 말은 어긴 것 같지만, 이자를 만났으니 이왕 만난 김에 안내를 부탁해도 될 것 같았다. 여유로운 태도로 보건대 궁 내부를 잘 아는 것 같으니까.

“날 좀 안내해 줘.”

“…….”

눈을 끔뻑인 윌은 자연스럽게 제게 손을 뻗은 어린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제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작은 키의 왜소하고 앙상한 소녀가 두 팔을 벌린 채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도로테아가 채근했다.

궁은 몹시도 넓었고, 시녀는 꽤 먼 곳까지 도로테아를 끌어냈다.

체력을 전부 다 써 버린 나머지 무릎을 굽힌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쌔액 쌔액, 목에서 숨소리가 점점 더 가쁘게 울렸다.

그녀의 상태를 훑어본 윌이 얼결에 두 팔을 벌린 도로테아를 안아 들었다.

‘이 남자, 초보구나.’

말투나 눈빛은 다정했지만 손길만큼은 한 번도 아이를 안아 보지 않은 듯 몹시 서툴렀다.

불편함에 품에서 바르작거리던 도로테아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니? 어디가 아파?”

“아냐, 됐어.”

어쩔 수 없지. 서투른 것이야 봐주는 수밖에.

체념한 도로테아는 최대한 덜 아프게끔 몸에 힘을 빼고 남자에게 기댄 채 중얼거렸다.

“이제 할아버지한테 데려다줘.”

“네 할아버지가 어느 분이신데?”

“하이클레어 후작.”

다정하게 등을 토닥여 주던 윌의 손이 멈췄다.

도로테아는 굳어 버린 윌을 살피며 실망스럽게 물었다.

“몰라?”

“……아니, 알지. 잘 알지.”

윌이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도로테아의 앞머리를 넘겨주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네 조부와 그리 닮지 않았구나.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걸.”

“나를 알아?”

“요즘 너만큼 유명한 사람이 또 있으려고.”

아니, 왜.

나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자꾸 사람들이 나를 안다는 거지.

도로테아의 마음에 의문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도로테아를 안은 채 윌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곳까지 온 거니?”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는 시녀가 나한테 응접실까지 데려다준댔는데…….”

“응접실은 이곳과는 아주 멀리 있는데?”

“난 저쪽에서 왔어.”

도로테아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본 윌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여러 개의 궁들 가운데 시녀가 그녀를 데려가려 했었던 곳은 응접실이 아닌 게 분명했다.

“궁에서는 절대 아는 사람의 손을 놓지 말도록 해. 특히 네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 있어.”

윌의 부드러운 충고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금 물었다.

“그럼, 네가 바로 그 ‘도로테아’겠구나.”

“맞아. 내가 도로테아야.”

때마침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였다.

윌의 시선이 홀린 듯 그 십자가에 길게 머물렀다.

“이건 못 줘. 이거 얻느라 나도 죽을 뻔했거든.”

“그 아이가 목걸이를 네게 줬다는 게 신기해서 본 것뿐이야.”

윌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도로테아의 입이 열리려던 찰나, 별안간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응? 왜 그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피를 머금은 땅이 우는 소리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또 무슨 귀찮은 일에 휘말리려고.’

그저 잘 먹고 잘살고 싶었을 뿐인데.

폭신한 침대가 있는 집 한 채 얻는 일이 이렇게 고단한 줄은 미처 몰랐다.

“얼른 할아버지한테 데려다줘.”

일이 커질 것을 경계하는 도로테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까와는 달리 조급해 보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윌은 순순히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이가 있었다.

채 식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지는 검을 든 소년 황자.

루크가 성큼성큼 그들의 앞으로 다가섰다.

“네 친구가 궁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더구나.”

“그렇습니까.”

“후작에게로 데려다주는 중이었단다.”

“형님께서요?”

“마침 할 일이 없었거든.”

“…….”

윌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던 도로테아는 제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집요한 시선에 결국 고개를 들었다.

뺨에 묻은 붉은색 점이 창백하고 하얀 피부 덕에 도드라져 보였다.

무뚝뚝한 검귀는 희한할 정도로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하긴. 업을 쌓은 이가 내게 이끌리는 거야 본능이겠지만.’

그녀의 눈에 붉디붉은 그의 혼이 사납게 날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을 태우는 염화를 가진 자.

필연적으로 가혹한 생애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지닌 자.

“지나친 살생은 좋지 않아.”

불쑥 꺼낸 말에 루크가 제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위협을 가했을 뿐이다. 목숨을 빼앗진 않았어.”

“적어도 네 터를 피로 물들이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건 밤잠을 괴롭게 만들 테니까.”

이제는 도로테아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적응이 된 건지 루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내 궁이 아닌 곳에서 일을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하지.”

“…….”

둘의 대화를 듣던 윌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성년도 되지 않은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라니.’

귀엽지 않은 동생과 기묘한 소녀 간의 살벌한 대화는 살기 한 점 없이도 뒷목이 서늘해지게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이 말을 섞거나 교류하는 일을 권장해도 되는 것일까.

깊은 고뇌에 빠진 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리서 여럿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장한 기사들 네댓 명을 앞세운,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금빛 망토에 도로테아의 눈길이 머물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루크 스트라이더!”

금빛 망토를 두른 청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감히 내 궁으로 들어와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다니!”

도로테아를 안고 있던 윌이 미간을 좁혔다.

“루크, 리처드의 궁에 갔었니?”

분노를 정면으로 받고 있는 루크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루크는 그들을 향해 아직 붉은 피가 떨어지는 검을 털어 내며 입을 열었다.

“실례. 제가 찾고 있던 아이의 흔적을 따라가다 우연히 맞닥뜨린 기사들이 형님의 궁에 있기에. 저를 향해 먼저 검을 들이댄 것도 그쪽이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네 발이 내 궁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이미 너는 선을 넘은 게다!”

귀찮게 빽빽대는 통통한 청년을 바라보던 도로테아가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지독한 원한을 많이 샀는지 입을 열 때마다 풍기는 시궁창 냄새에 코가 다 얼얼했다.

윌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도로테아가 보챘다.

“윌, 할아버지한테 데려다줘.”

“음…….”

난감한 듯 한발 물러선 윌을 향해 청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그 아이를 데리고 계신 겁니까?”

“그것이 궁금하니, 리처드?”

“그 아이는…….”

도로테아가 윌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리처드라 불린 남자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어린 소녀를 훑었다.

“바깥에서 굴러먹다 왔다더니 제대로 된 예법 하나 갖추지 못했군요. 하이클레어 후작의 손녀라기에 제법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도로테아를 끌어내도록 시녀에게 명을 내린 게 저 리처드라는 인물이 분명해 보였다.

결국 다리가 아프도록 걷다가 이 불편한 품에 안겨 피비린내까지 실컷 맡아야 했던 도로테아에게도 짜증이 솟구쳤다.

“리처드.”

“……뭐?”

또렷하게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에 분노하고 있던 리처드가 멈칫했다.

검을 든 기사들의 뒤에 숨어 있는 욕심 많고 어리석은 자.

“리처드.”

도로테아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되뇐 순간 섬뜩한 오한이 리처드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발가벗기기라도 한 듯 기묘한 불쾌감에 휩싸인 리처드의 눈이 뒤집혔다.

“……저, 저 아이를 죽여.”

“예?!”

“저 아이가 나를 모욕했다!”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는 리처드의 명에 기사들이 난감한 얼굴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이클레어 후작이 어렵게 되찾은 손녀딸을 끔찍이 여긴다는 소문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검을 들이대는 것만 해도 꽤 무리한 일인데, 심지어 황자가 둘이나 그 앞을 막아서고 있지 않은가.

“죽이래도!”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치며 악을 쓰는 리처드를 보던 루크의 시선이 다시금 도로테아를 향했다.

그녀는 예의 기묘한 미소를 띤 채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빨려 들어갈 듯한 도로테아의 눈동자를 보고 있던 리처드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황자 전하!”

기사의 검을 뺏어 든 리처드가 직접 상대를 향해 검을 겨눈 순간이었다.

“검을 내려라!”

노기에 찬 외침과 함께 아까보다도 더 많은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새하얗게 질린 기사들이 검을 납검하는 것과 동시에 도로테아를 안아 든 윌과 루크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근엄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가 창백한 얼굴의 후작과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윌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도로테아가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아침에 배운 대로 정확히 예법에 맞추어 세 걸음 앞에서 멈춰 서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무릎을 굽혔다.

“도로테아 에버리 하이클레어입니다. 이렇게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할머니가 속삭여 준 말도 잊지 않았다.

“좋은 날에 좋은 분을 뵈오니 기분이 참으로 좋습니다.”

“…….”

방금 전까지 흉흉하게 기사들과 대치하고 있던 윌의 품에 안겨 있던 조그마한 소녀의 말에 황제가 침묵했다.

하이클레어 후작이 다가와 손녀를 꼭 안아 들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등을 토닥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테아야, 내가 궁에서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안내인을 만나서 안내를 받던 중이었어요.”

웅얼거리는 말에 하이클레어 후작은 말없이 손녀를 품에 안은 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후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후작 부인에게까지 알려 각 궁들을 모두 뒤지는 불경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아이를 찾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터였다.

폐하, 라고 불린 남자가 덜덜 떨며 엎드린 리처드에게서 시선을 떼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루크, 네가 3황자의 궁에 가서 검으로 기사들을 위협하고 멋대로 형의 시녀를 끌고 갔다 들었다.”

“제가 신세를 진 아이가 궁에 왔다기에 만나려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응접실로 안내받아야 할 아이를, 3황자의 궁에서 데려갔다 들었습니다.”

“…….”

“목격한 자가 있어 추적해 보니 정말로 아이를 데려간 시녀가 있더군요.”

황제의 눈이 도로테아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걸이에 자꾸 시선을 주는 황족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목숨 걸고 갖고 와서 정화까지 한 물건인데, 이제야 이걸 가져가는 건 못돼 먹은 심보잖아.’

도로테아가 십자가를 손에 꼭 쥐자, 황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로구나.”

“이건 제 거예요.”

“그건 내가 루크의 어미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그래서 가져가려는 건가.

처음 선물로 건넨 게 이 남자라서?

도로테아가 경계 어린 눈초리로 황제를 훑었다.

입은 옷도 휘황찬란하고 좋아 뵈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목걸이에 목숨을 거는 걸까.

정작 본인들은 이 목걸이의 진정한 가치조차 알지 못할 텐데.

도로테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드릴게요.”

무려 피피가 찾아낸 것 중에서도 가장 매끈하고 아름다운 미형을 유지하고 있는 도토리가 데굴데굴 굴러 황제의 손에 떨어졌다.

‘먹고 떨어져라.’

도로테아가 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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