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술사 도로테아 (22)화 (22/242)

혼술사 도로테아 22화

“……네가 왜 여기에 나와 있는 게냐.”

갈라진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탁한 눈동자에 여러 갈래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자괴감, 분노, 괴로움, 애증이 한데 뒤섞여 손녀를 향했다.

늙은 가주는 복도에 나온 어린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차군.”

볼을 매만지는 손길이 거칠었다.

한평생 누구를 아껴 준 적이 없는, 서투르기 그지없는 손길에 도로테아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가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도.”

노인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너도 도망칠 테냐?”

도로테아에게 묻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녀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 그의 품을 떠나 도망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소중한 막내딸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도로테아가 눈을 끔뻑였다.

사실 그녀는 가족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만 이곳에 머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녀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한적한 복도 양옆에 박혀 있는 단단하고 훌륭한 수석(秀石)들.

셀 수 없이 많은 방들과, 문마다 박혀 있는 촘촘한 자수정 장식들.

높고 단단해 보이는,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지붕.

여러모로 그녀의 집과는 다른, 아주 훌륭하고 근사한 저택이었다.

이불은 폭신했고 입고 있는 옷은 향기로웠다.

그녀가 깨어났던 방에는 엄마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머리맡에 놓여 있던 인형부터, 벽난로 위에 걸려 있던 초상화까지.

‘왜 사람들이 그렇게 돈에 욕심을 내는지 알 것 같기도 해.’

낡은 저택이나 사당에서 평생을 지내 왔던 그녀에게 이 저택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훌륭하고 맛있는 음식에 시중들어 주는 이들이 가득하고,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식량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고, 낡아 빠진 걸레를 다시 기워 쓰던 제인을 떠올리니 더더욱 돈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가진 게 많은 건 좋은 거구나.

“너도 이곳을 버릴 테냐?”

거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물었다.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물끄러미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간절하면서도 원망이 깃든 그 눈빛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있길 바라요?”

“…….”

“할아버지네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가주의 얼굴이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르겠구나.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나는 여기가 꽤 마음에 들어요.”

도로테아의 솔직한 말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사람이야 어떤지 몰라도 아름답고 진귀한 것들을 굳이 거절할 까닭은 없었다.

그것이 자신을 얽매어 괴롭게 만든다면 모를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싫지 않지만, 내 가족들이 날 데리러 올 거예요.”

“우리가 네 가족이다!”

울컥한 듯 노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로테아는 얼얼한 귀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엄마를 버렸잖아요. 엄마가 고른 가족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어. 그래서 결국 엄마조차도 버렸잖아요.”

실은 그녀는 줄곧 이곳을 그리워했는데.

엄마가 오래전 도로테아를 위해 지어 주었던 옷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그녀가 딸을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들은.

이 저택에서 자라면서 익혔던 기억을 떠올리며 만든 것임을.

그녀는 늘 하이클레어 가문의 엘렌이었다. 이들이 더 이상 그녀를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을 뿐.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건 네 어미였다!”

괴로움에 일그러진 얼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노인이 울고 있었다.

“형제도 부모도 필요 없다는 듯, 미련 한 점 없이 버리고 나가서 그리 끝을 맺을 생각이었더냐!”

아꼈던 마음이 절절한 미움으로 변모했다.

후회와 회한 가득한 눈물이 이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너는 그래서는 안 되었어……!”

물기 가득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칭송받는 여인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변변찮은 작자와 몰래 야반도주를 하여 그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종내에는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가족들과 제대로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그런 외롭고 쓸쓸한 삶을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왜 그를 택한 게야……!”

네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너를 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

너를 그 누구보다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웠는데.

물끄러미 외할아버지를 보던 도로테아가 한숨을 쉬고는 손을 뻗었다.

조그마한 키로는 여전히 얼굴에 닿을 수 없어서, 그녀가 두드릴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옆구리 정도였다.

“엄마는 화나지 않았어요. 그저 기다렸을 뿐이고, 당신들은 조금 늦었던 것뿐이죠.”

자신을 버린 이들이 밉고 원망스러웠다면 그녀는 아직도 이곳을 떠돌고 있었으리라.

원과 한조차 떨치고 먼 곳으로 건너갈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미련 없이 생을 마감했다.

후회는 늘 남은 자들의 몫이다.

“미안하다면 사과하면 돼요.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실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고.”

“…….”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려면, 엄마의 소중한 사람에게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거고요.”

또박또박 건네는 말에 그가 지친 얼굴로 옆구리를 토닥이는 자그마한 손녀를 바라보았다.

비쩍 마르고 앙상한 손목이 달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랜 병마와 싸우느라 고생했을 어린 소녀는 완숙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길 바란다면, 나를 데리러 온 가족들도 여기에 있어야 해요.”

“…….”

“당신들이 외면한 시간 속에서 엄마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요. 아빠와 나랑 함께.”

조곤조곤 건넨 말에 하이클레어 가문의 가주, 숀 하이클레어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누그러진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더 편하게 손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이때다 싶어 하나둘 말하기 시작했다.

“제게 제인이라는 하녀가 있는데요. 걔는 바느질도 할 줄 알고, 요리도 할 줄 알아요. 제인이 오면 같이 지낼 거예요.”

“아빠는 제 약값 때문에 늘 여기저기 다니느라 저랑 같이 지낼 시간도 없었어요. 아빠가 좀 더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심부름꾼이 하나 있는데, 우드라고 해요. 일단 탈영병이긴 한데 꽤 쓸 만한 다리를 갖고 있어요…….”

가족들을 모두 이곳으로 데리고 들어오겠다는 조건을 조목조목 꺼내는 도로테아를 보며 숀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그는 처음으로 손녀를 안아 들었다.

그렇게 도로테아는 누추한 저택 대신 이 커다란 저택에 살 기회를 야무지게 얻어 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 침묵이 흘렀다.

직접 손녀를 안아 들고 온 후작의 모습에 다들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아빠는 언제 찾으러 가요?”

“사람을 보내마.”

“아마 여기로 오고 있을 테니까, 빨리 찾아야 해요.”

“그래, 알겠다.”

순순히 답하는 후작의 말에 눈이 튀어나올 듯 보고 있던 집사가 재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아버지의 괴이한 행동에 침묵하고 있던 펠릭스 하이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그를 가문에 들이실 겁니까.”

“엘렌의 남편이니까.”

덤덤한 목소리에 다들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후작의 곁에 앉아 있던 노부인은 그런 분위기를 모른 척 도로테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가, 간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안색이 좋지 않구나. 식사를 마치고 신관을 부르마.”

“괜찮아요. 밥 먹고 더 잘 거예요.”

“그래, 우리 아가가 그러고 싶으면 하는 게지.”

노부인의 관대한 말에도 후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였더라면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식사 후 곧바로 다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안 된다며 일갈할 법도 했는데.

평생을 엄격한 규율에 따라 살았던 그가 하룻밤 사이 달라진 것이다.

노부인이 고개를 들고 온화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콜린은 어딜 갔니?”

“본인의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침에 전보를 받았는데, 무리하게 이동하느라 몸이 좀 허해졌답니다.”

“치료사를 보내도록 하렴.”

“이미 불렀을 겁니다.”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도로테아의 앞에 따끈한 수프가 놓였다.

고소한 맛에 취한 그녀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린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전생의 오라비가 그렇게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 집착한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서툰 포크질에 식기가 떨어지면 재빠르게 다가온 시녀가 능숙하게 새것을 건네주었다.

은으로 된 식기는 반짝반짝하고 예뻐서 도로테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7황자 전하께서 이 아이를 폐하께 고하겠다 하셨다지?”

“예, 아이와 인연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폐하께 인정을 받고 나면, 이 아이를 하이클레어가 족보에 올리겠다.”

“…….”

“가문 사람 모두에게 알려야 할 게다.”

“예.”

펠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도로테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프를 한 접시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 앞에 놓인 과일 접시로 손을 뻗었다.

옆에 있던 시녀가 재빠르게 그녀가 접시의 과일을 먹을 수 있도록 덜어 주었다.

달콤함에 취해 포크 대신 손으로 덥석 조각을 집어 들자 후작이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

기 싸움처럼 손녀와 외할아버지 사이에 말 없는 시선이 오고 갔다.

이윽고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후작이었다.

노부인이 과일을 한입에 삼키느라 볼이 불룩해진 도로테아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잘 먹는구나. 널 위해 과일을 좀 더 들여놓아야겠어.”

훈계를 늘어놓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연거푸 접시 위로 나이프를 가져다 대는 후작을 다들 모른 척했다.

메마르고 서늘한, 인간미 없던 저택에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사랑하는 이와의 혼인을 반대한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해 야반도주했던 하이클레어가의 막내딸, 엘렌의 자식을 뒤늦게나마 호적에 올리기로 했다는 후작의 결정에 황도가 떠들썩했다.

더군다나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7황자가 그 어린 소녀에게 신세를 졌다는 말을 황제에게 고함으로써 소녀의 존재는 더욱 중요해졌다.

“하루아침에 후작의 외손녀가 되었군.”

“그 깐깐한 후작이, 심지어 이제까지 한 번도 인정한 적 없던 사위를 맞으러 기사들을 보냈다던데.”

“대단하군. 도대체 어떤 아이길래…….”

간만에 나타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귀족들이 들썩였다.

조용하던 후작의 저택으로 가문의 방계와, 가신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음험한 속내를 가진 이들도, 또 진심 어린 축복의 인사를 건네려는 이들도 모두 저택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세간의 화제를 모두 장악한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에버리는 정작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작 내외 또한 두문불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꽁꽁 닫힌 저택의 모습에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깊어졌지만, 저택을 방문한 그 누구도 소녀를 만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