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사 도로테아 21화
침묵을 깬 건 루크였다.
“설마 펠릭스 경이 나를 마중 나올 줄은 몰랐군.”
“그 아이는 제 막내 동생의 딸아이입니다. 황자 전하께 무례가 있었다면 마땅히 사과드리나, 아직 어린아이임을 감안하여 저희에게 돌려주시지요.”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황자를 호위하는 무리와, 콜린 일행들 간의 팽팽한 기 싸움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도로테아는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지루한 얼굴로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었다.
침묵하던 황자가 자신이 숙부라고 주장하는 남자를 향해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하이클레어가의 위세가 대단하군. 기사들까지 끌고 와 무력시위를 할 줄이야. 조카를 몹시도 아끼는 모양이야. 그런데 말이지.”
“…….”
“경은 내가 이 아이를 어디서 만났는지 알고 있나?”
침묵하는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는 소년 황자의 나른한 눈에 조소 같은 것이 스몄다.
“그렇게 아끼는 조카아이가 어째서 남루한 차림으로 한밤중에 먼 접경 지역에서 나와 마주치게 되었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황자의 부상은 군 기밀이다.
평범한 농가의 자식이 부상 입은 황자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귀족의 자제가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피신해 있던 황자와 마주한 것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
서슬 퍼런 추궁에도 펠릭스라 불린 남자는 당황한 기색 없이 답했다.
“그 아이는 실종되었던 제 여동생의 아이입니다. 여기, 제 곁에 있는 콜린이 그런 여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어미를 잃은 아이를 데려오던 길에 그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남자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명료한 목소리로 다시금 요구했다.
“부디 아이를 돌려주십시오. 지금 저택에서 어머님이 애타게 손녀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아이에게 티끌만큼의 문제라도 생긴다면, 연로하신 그분에게 큰 상처가 될 겁니다.”
루크의 시선이 도로테아를 향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꽤 무리를 한 건지, 소녀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져 있었다.
색색거리며 숨을 쉬는 도로테아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을 그렇게 만들어서는 쓰나.”
소년 황자가 다시 도로테아를 훑었다.
그의 눈이 그녀의 멍이 든 손목과 가느다란 목, 앙상한 다리를 세세하게 담았다.
그러고는 아끼는 조카를 데리러 왔다기에는 메마르고 담담한 표정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경은 가까운 시일 내에 입궁하여 그녀의 존재에 대해 소명해야 할 걸세. 내 황제 폐하께 친히 말씀드려 경의 수고를 덜어 주겠네.”
느릿한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소녀의 존재를 황궁에서 인지하겠다는 것.
황자의 말 몇 마디에 이제 하이클레어 가문에서는 도로테아를 어떻게 생각하든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대귀족의 체면을 생각해야 할 테니까.
남자는 루크의 경고를 알아듣고도 모른 척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황자 전하의 관대하신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황자에게 가문의 일에 멋대로 참견할 여지를 준 데다, 몰래 데려왔어야 할 아이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꼬이고 꼬인 상황에서도 감사를 표하는 남자는 덤덤해 보였다.
도로테아는 한 편의 연극 같은 눈앞의 상황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체면이라는 건 참 희한한 거야.’
과연 자신의 숙부라는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깍듯이 고개를 숙였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루크는 도로테아를 데리러 온 콜린에게 그 작은 몸이 잠시 가려질 때, 도로테아의 머리를 가볍게 톡, 하고 건드렸다.
열다섯, 무뚝뚝한 ‘전장의 신’의 눈동자에 아주 미미한 장난기가 맴돌았다.
“아직 못다 한 대화가 있으니 후에 궁으로 와라. 내 궁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난 할 얘기 없는데.”
방자한 아이의 답에 얼굴을 찌푸리는 이보다, 황자의 격의 없는 대화에 놀란 기색들이 더 컸다.
황자가 천천히 몸을 숙여 속삭였다.
“넌 책임을 져야 해.”
그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어렸다 사라졌다.
“내 질긴 목숨 줄을 멋대로 이어 놓은 책임을 져야지.”
뭐래.
도로테아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뒤에서 황자가 병사들을 끌고 사라지는 듯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콜린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손을 뻗어 안아 들었다.
자신을 ‘숙부’라 소개했던 남자는 차분하게 도로테아를 바라보다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보게 된 건 처음이구나. 네가…… 테아겠지.”
“도로테아예요. 도로테아 에버리.”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짤막하게 정정했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넌 지금부터 그렇게 불리게 될 거다.”
조카의 답을 듣지 않은 채 그가 뒤의 기사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수신호를 본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맞춰 뒤로 돌았다.
행진하듯 주변을 둘러싸는 이들을 두고 콜린이 속삭였다.
“누구 속이 뒤집어지는 꼴을 보려고 그곳을 빠져나온 게냐? 하마터면 시간 안에 오지 못해 황자한테 널 넘길 뻔했잖아!”
도로테아는 콜린이 어떤 개고생을 했든, 어떻게 가문의 사람을 데려왔든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생각보다 빨리 황자에게 발각되어 주변 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짜증스러웠다.
어차피 자신에게 세상일이란 어떻게든 순리대로 흘러가는 법이니까.
“나 아직 제대로 구경 못 했어. 구경하고 싶어.”
소녀의 종알거림에 콜린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가 억지로 눌러 참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답했다.
“오늘 외출은 이걸로 끝이다, 이 말썽꾸러기야.”
콜린의 타박에 도로테아는 심드렁하니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 대단한 가족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할지 한번 볼까.’
그 오랜 시간 동안 아파 누운 아이를 외면해 왔던 가문이었다. 반갑게 맞아 줄 사람이 있기나 할까.
황자의 경고가 있었으니 어쩌면 생각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지도.
지금쯤 자신을 찾고 있을 ‘가족들’을 떠올렸다.
자신을 걱정하며 울상이 되어 있을 어린 하녀와, 굳은 얼굴로 길을 헤매고 있을 우직한 아버지, 투덜거리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자신의 다리까지.
‘얼른 와.’
어쩐지 많이 보고 싶어 졌다.
* * *
“펠릭스 숙부라 부르거라.”
그렇게 말한 남자는 도로테아를 안아 든 콜린과 함께 훌륭한 외관의 마차로 올라탔다.
줄곧 담담해 보이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서렸다.
펠릭스의 눈이 콜린을 향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너와 에이든이 독단적으로 만든 사달에 대해 질책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
마차 안의 공기가 단박에 싸늘해졌다.
도로테아는 그다지 겁먹지 않았지만 불편해진 분위기에 속으로나마 투덜거렸다.
섬세하지 못한 사내들 같으니.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서 살기를 드러내면 어찌한단 말인가.
침묵 속에서도 빠르게 달린 마차가 커다란 저택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도로테아에게 꽂혔다.
그중에서도 양옆의 부축을 받고 있는 연로한 노부인이 도로테아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월을 빗겨 나가지 못한 주름진 얼굴에는 젊었을 적의 미모를 가늠케 하는 고운 얼굴이 남아 있었다.
창백한 안색의 노부인은 콜린의 품에 안긴 소녀를 본 순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떨리는 손이 콜린의 품에 안긴 도로테아의 볼을 매만졌다.
부들부들,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손길에도 도로테아는 여전히 멀뚱멀뚱 낯선 노부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엘렌…… 우리 엘렌. 내 아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만큼 뭉개진 발음 사이로 선명히 들린 것은 ‘엄마’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배로 낳았지만 자신이 외면해야만 했던 그 어린 딸이 남긴 마지막 생명을 바라보는 노부인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 어미가 잘못했다. 모두가 내 잘못이야.”
그러니 돌아오라, 라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그녀의 딸인 엘렌은 이미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눈물을 훔치는 몇몇 여인들의 뒤로 저 멀리 수염을 기른 노기사가 도로테아를 빤히 바라보다 뒤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저자가 이 저택의 주인인가.’
이 몸의 외할아버지이자, 그녀의 어머니를 저택에서 쫓아낸 자.
도망치듯 멀어지는 노기사를 보던 도로테아는 노부인의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약한 체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여서, 울부짖는 이들 모두 그녀에게는 그리 큰 감흥이 없었다.
‘그리 소중했다면 직접 왔어야지.’
과거의 ‘콜린’이 이간질과 수작을 부려 엘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기 전에.
가족이라고 했으나 외면한 자들이었다.
절절한 감정을 쏟아 내는 이들을 도로테아는 받아들이지도, 또 거부하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관망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자연스레 알 수 있으리라.
이들 중 누가 거짓된 울음과 감정으로 ‘척’을 하고 있는지.
사람의 좋고 나쁨은 신분도, 상황도…… 그리고 환경도 가리지 않는다.
좋은 옷감의 드레스를 몸에 휘어 감고 보석을 두른 귀부인이든, 남루한 차림새의 하녀든, 훈장을 가슴에 잔뜩 달아 놓은 기사든, 말먹이를 손에 쥔 하인이든 간에.
연극이 지루해지기 시작한 그녀가 천천히 콜린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눈을 감자 잠이 쏠려왔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도로테아를 보던 펠릭스가 장남답게 어머니를 달래며 아이를 데려가라 지시했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치료사를 불러 도로테아를 살피도록 할 테니 어머니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이를 나와 가까운 방에 두려무나. 내가 직접 돌봐야겠다.”
의식이 멀어져 가는 가운데 노부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이제 그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게야. 이 아이만큼은 내 꼭…….”
다짐하는 목소리가 꿈결에 들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한밤중,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던 도로테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차림의 시녀가 앉은 채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깊은 밤이 찾아왔는지 사방이 고요했다.
조그마한 몸을 꼼질거려 침대를 벗어난 도로테아는 잠든 시녀의 눈을 벗어나 문으로 향했다.
작은 문틈으로 호위를 서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흠.’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두리번거리던 도중, 문 옆에 작은 문이 하나 더 있음을 알아챘다.
성인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문은 아마도 음식이 담긴 그릇이나 씻을 물 등을 담아내는 배출구로 보였다.
도로테아의 작은 몸은 그 구멍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우선 문 앞에 숨을 불어 넣었다.
쉬이익-.
그녀의 손가락이 부름에 응답한 바람에 파장을 담았다.
여열설기(餘熱泄氣)
여기작금(餘氣作金)
그리 대단한 재주는 아니었다.
그저 기사의 감각을 잠자는 것과 비슷한 상태로 만드는 것뿐.
옅은 술법인 만큼 아주 작은 소란에도 금방 깨질 터였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센 그녀가 몸을 웅크려 조심스레 아래의 작은 문을 통과했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의 눈이 몽롱하게 잠에 취해 흐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신이 나 복도를 내달리려던 도로테아의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재회의 순간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던 노기사, 하이클레어 가의 가주가 어둡고 탁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