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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5)화 (15/242)

혼술사 도로테아 15화

-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게냐!

위풍당당하던 사신은 몹시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순간 그의 품에서 툭, 하고 낡은 수첩이 떨어졌다.

재빠르게 주워 든 도로테아가 그것을 펼치자, 파르르 떠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콜린 하이클레어.

붉은색으로 적힌 이름이 위태롭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음 장을 넘겼다.

도로테아 하이클레어

원래 오늘 죽었어야 할 이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그녀의 이름이 너울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수첩 옆에 꽂혀 있던 기묘한 형태의 만년필에 손을 가져갔다.

- 멋대로 손을 댔다간 지옥의 무저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생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충분히 지옥이었는걸.”

그녀는 수첩 위의 이름을 만년필로 검게 지우기 시작했다.

‘힘’이 깃든 검은색 잉크가 이름을 지워 나가자 불안정하던 육신과의 연결 고리가 끈끈해짐이 느껴졌다.

수첩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사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 지옥의 형벌이 두렵지도 않은가!

다음 생을 기약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가지고 싶은 것을 힘껏 움켜쥐고자 하는 본능은 오롯이 인간에게만 허락된 미련과 탐욕이다.

도로테아는 지금 그 누구보다 인간답게 행동하는 중이었다.

- 너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머릿속을 지끈거리도록 울리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몸부림치던 사신은 콜린의 몸속으로 완벽하게 빨려 들어갔다.

그가 들고 있던 낫이 뎅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신기’는 천천히 줄어들더니 이내 조그마한 형태의 동물로 변했다.

까만 콩 같은 동그란 눈에 도로테아가 담겼다. ‘수첩’을 가진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 신기가 다가와 몸을 비볐다.

도로테아는 자신의 발치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는 다람쥐를 보며 눈을 휘었다.

“귀엽기도 해라.”

콜린의 몸에 갇힌 사신은 거품을 물고 기절한 지 오래였다.

내내 존재하지 않던 ‘실체’에 익숙하던 사신에게 갑자기 생긴 육신의 고통은 생경하고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도로테아가 욱신거리는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는 깨진 술잔과 술병이 굴러다니고, 방 안은 온통 술 냄새로 가득했다.

평생 무언가를 정리해 본 적도, 할 마음도 없는 도로테아는 침대 위에 있는 이불로 쏙 들어가 조용히 누웠다. 손바닥만 한 다람쥐가 그런 그녀의 옆에 몸을 돌돌 말고서 자리 잡았다.

멀리서 좋은 구경을 놓친 까마귀가 아쉽다는 듯 까악 까악 울어 댔다.

시끄러운 바깥소리에, 어수선한 방 안의 모양새에도 고단한 몸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도박이 성공했으니 달콤한 잠을 즐길 차례였다.

*   *   *

다음 날 아침, 방은 소란스러웠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하녀와 호위들은 일어나자마자 방에 진동하는 술내에 경악했다.

어린 아가씨는 다행히 침대에 누워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의 눈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 주전자와, 깨진 물잔, 망가진 커프스와 대자로 누워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콜린이 보였다.

“콜린 님!”

술에 취한 듯 벌건 얼굴의 콜린은 정신을 차리지도,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다들 입을 꾹 닫은 채 서둘러 방을 정리했다.

방 안의 기묘한 풍경에 대해 의문이 새록새록 쌓인다고 한들,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분주하게 움직인 이들의 소란에 도로테아가 부스스 눈을 떴다.

발치에 누운 콜린이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육체에 갇혔으니 온갖 부작용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끔찍한 두통과 삭신의 뻐근함이 한동안 그를 괴롭혀 댈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콜린의 ‘삶’을 이어받아야 할 테니까.

‘흠, 그러고 보니 왜 도로테아의 삶은 내게로 이어지지 않지?’

흐릿한 기억 한 점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애초에 이 몸에는 그녀의 혼이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 객이 오기도 전에 먼저 자리를 비운 혼은 대체 어디로 갔으려나.

도로테아는 욱신거리는 몸을 아주 느릿하게 일으켰다.

당장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 시간을 벌었지만 아팠던 신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꼴이 되었다면 모를까.

명부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이제 그 어떤 고통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다는 의미니까.

이런 몸으로 살아남은 것과 순리대로 죽는 일. 어느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모두 다 살아 낸 뒤에 알게 될 일이지.”

중얼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콧김을 뿜으며 벌컥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에이든이 바닥에 드러누운 형을 보고 눈에 힘을 주었다.

“아니, 내게는 다 큰 조카를 애처럼 대하지 말라고 떼어 놓더니 본인은 어찌 이곳에서 잤어!”

“…….”

“게다가 술까지 퍼마셔?!”

푹 자고 일어난 에이든이 씨근거렸다.

그는 형이 자신을 내버려 두고 홀로 조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것이 몹시도 분한 듯 보였다.

아마도 콜린은 어둠을 틈타 조카를 처리해 버리고 나서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었겠지.

물론 그러기는커녕 본인의 영혼이 소멸하고 사신에게 몸을 빼앗기게 되었지만.

도로테아는 형의 몸을 짤짤 흔들어 대는 에이든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단순하고 우직한 그에게 간밤의 일을 설명한들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이윽고 겨우 진정한 에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제아무리 목석같다는 형도 조카가 예쁘고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던 게지. 이해는 하오.”

“…….”

정신을 차린 콜린이 들었더라면 침을 뱉고 욕을 했을 만한 말이었다.

도로테아는 헤벌쭉한 얼굴로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에이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손을 잡았다.

고운 천으로 조카를 꽁꽁 싸맨 에이든이 도로테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주변을 정리하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콜린 님을 어떻게 할까요?”

“밤에 약주가 과했던 듯하니 마차로 모시거라.”

도로테아는 에이든의 품에 안겨 마차로 향하며, ‘술을 빌려준 간밤의 손님’이 머무른 방문을 힐끗 살폈다.

불이 꺼진 방은 사람의 인기척 하나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일행보다 한발 앞서 이 여관을 떠난 모양이었다.

‘이름을 물어볼 것을 그랬나.’

빚을 갚으려면 적어도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터인데. 급한 나머지 술만 받아 나오느라 이름을 묻는 것을 깜빡했다.

기묘한 손님이 준 술은 독하고 달았다.

꼭 사람의 마음처럼.

*   *   *

콜린의 몸에 들어가게 된 사신은 구토로 인해 벌써 세 번째 마차를 세웠다.

에이든은 못마땅하지만 안쓰러운 얼굴로 형의 등을 두들겼다.

“그러게 왜 그리 술을 드신 거요. 조카를 보게 되어 기쁜 마음이야 알겠소만, 돌아가서 축배를 드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인데.”

“…….”

“평소 그리 빈약하니 고작 술 몇 잔도 이기지 못하는 게 아니오. 형님, 저랑 같이 운동 좀 하십시다.”

창백한 얼굴의 콜린은 시체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토하고 일어섰다.

온갖 기억들이 뒤엉켜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테니 괴로울 만도 했다.

허공을 보던 그의 눈이 도로테아에게 가 닿은 순간 번뜩였다. 눈에 새겨진 치욕감과 분노에도 도로테아는 태연했다.

한때는 사신이었을지 모르나 이미 콜린의 육신 안에 완벽하게 갇혀 버린 데다, 신기 또한 그녀를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명부 또한 그녀의 품에 있으니 지금 당장의 콜린은 인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육신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지금은 인간보다도 더 연약한 상태였다.

‘소멸시키지 않은 게 어디야.’

쓸데없이 업을 더하고 싶지 않아 살려 주었는데 눈빛이 영 불손했다.

이미 그는 하데스의 권속이 아니라, 나 도로테아의 권속이 되었는데도 말이지.

“그만해!”

등을 있는 힘껏 두들기는 에이든의 손을 콜린이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아마 몸에 커다란 손자국이 남았을 만큼 울려 퍼지던 찰진 소리가 그제야 멈췄다.

“너는, 우웁, 이런, 제엔장…….”

에이든이 놀라 콜린을 살피자 어느새 다가온 도로테아가 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그녀와 눈을 맞춘 에이든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누워서 가면 좀 나을지도 몰라요.”

“그, 그럴까?”

마차를 자꾸 세우니 길이 늦어져 초조하던 차였다. 더군다나 아픈 조카를 데리고 야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에이든은 머리를 긁적이며 도로테아의 의견을 받아들여 콜린을 마차 바닥에 뉘었다.

“그럼 마차가 좁으니 내가 마부와 함께 앉지. 형님, 누워서 가다가 토할 것 같으면 문을 두들기시오. 괜히 애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도로테아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푹신한 쿠션 위에 앉아 바닥에 누워 있는 콜린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이를 갈며 말을 뱉었다.

“이런 무도한 인간 같으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아라!”

“박복한 내 수명을 늘렸지.”

“이런 짓을 하고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쩌렁쩌렁 분노로 가득해야 할 목소리가 힘이 없는 탓에 모기만 하게 겨우 기어 나왔다. 가냘픈 목소리에 담긴 분노를 듣고 있던 도로테아가 불쑥 말했다.

“나보다도 더 용서받지 못할 이들이 많으니, 죽고 나서 외롭지는 않을걸.”

“…….”

“당신들이 말하는 지옥은 어떤 곳이야? 그렇게 넓어? 그렇게 대단히 고생스러워?”

살아온 생이 이미 지옥 같았는데, 그보다 더 별로일 수도 있나.

궁금증을 늘어놓는 도로테아의 얼굴에는 두려움 한 점 없었다.

“뭐라는 거냐.”

콜린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죽고 난 뒤를 생각하라고 겁을 주었더니 되레 지옥에 대해 묻고 있었다.

진실로 궁금한 듯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눈을 마주하자 그는 왜인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였다.

언제든 자신 같은 자들을 누르고 잡아 가둘 수 있는 강한 ‘술사’를 향한 본능적인 공포.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저런 힘을 가진 자가 이 대륙에 있다는 말 따윈 들어 본 적 없다.

사신으로 임한 지 어언 몇백 년이 넘었지만, 사신을 인간의 육신에 가두는 힘을 지닌 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도로테아가 콜린의 눈에 담겼다.

그녀의 조그마한 몸에서 나온 기운이 위협적으로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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