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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14)화 (14/242)
  • 혼술사 도로테아 14화

    좁은 방에서 옅은 슬립을 걸친 여인의 입을 통해 고운 노랫소리가 벌써 수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남자가 손을 올리자 그녀가 노래를 멈췄다.

    “다른 노래를 부를까요?”

    달빛에 비친 수려한 얼굴은 감흥 없이 여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긴 속눈썹 아래 검은 눈이 문밖을 응시했다.

    “들어오라 이르거라.”

    그의 곁에 있던 호위가 검집 위로 손을 올린 채 문을 열었다.

    작고 꾀죄죄하며 앙상한 소녀가 나타나자, 노래를 부르던 여인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와 달리 방의 주인과 호위는 말없이 도로테아를 응시했다.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선 소녀가 넙죽 그 자리에 엎드렸다.

    “제가 외숙부께 술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술 한 잔의 은혜는 훗날 넘치는 마음으로 갚겠습니다.”

    도로테아가 또박또박 건네는 말에 윤기 있는 길고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가 생각에 잠겼다.

    비록 왜소하고 비쩍 곯았지만, 그를 마주한 도로테아의 눈만큼은 맑고 깨끗했다.

    발치에 엎드린 소녀를 보던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잠시 후, 방을 나오는 도로테아의 손에는 그녀가 원하던 것이 들려 있었다.

    찰랑거리는 병 속에 든 한 잔의 술.

    그것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순간, 그녀가 마주한 것은 방에 있던 호위나 하녀들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의 ‘둘째 외숙부’가 도로테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에게 ‘최후’를 선사하러 왔을 남자를 향해 도로테아가 환하게 웃어 주었다.

    “오셨어요, 외숙부님?”

    살가운 인사를 건넸음에도 남자의 눈에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번뜩이는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 낸 도로테아가 미소 짓자, 그가 이를 악문 채 물었다.

    “어딜 다녀오는 게냐?”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대답과 동시에 그녀가 빌려 온 술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넋이 나간 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들을 어찌한 게야?”

    눈에 새파란 예기가 스며들고,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곤두서 있었다.

    도로테아는 제 감정을 삼키지 못해 벅차하는 남자를 향해 다시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잠들었어요.”

    정확히는 ‘넋을 빼놓았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부정하고 삿된 기운들을 접했으니 몸에 무리가 갈 만도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 테이블 위 물잔이 흔들렸다.

    도로테아가 흘끗 자신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추궁이 이어졌다.

    “이 늦은 시간에 방을 빠져나가 무얼 했지?”

    “옆방에서 손님께 마실 것을 빌려 왔어요.”

    태연한 그녀의 말에 남자의 눈에 더욱 경멸이 깃들었다.

    찰랑거리는 술 주전자를 든 도로테아의 시선이 창을 넘실거리는 그림자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너희의 차례가 아니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비쩍 마르고 유약해 보여도 상대는 성인 남성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도로테아의 어깨를 누르자, 그녀의 몸은 그대로 주저앉듯 밀려났다.

    어깨가 욱신거리는 통증에도 도로테아는 비명 한 번 지르는 일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가 분노에 차 중얼거렸다.

    “네 어미와 똑같아. 나를 서출이랍시고 있는 대로 무시하더니, 정작 본인은 어찌했느냐? 별것도 아닌, 천한 신분의 남자 따위와 도망가기나 했지. 제대로 집안 망신이다!”

    “…….”

    “하필이면, 하필이면 내가 처음으로 공을 인정받은 날이었다! 늘 나를 천한 핏줄 취급한 가문 놈들에게, 드디어 내 쓸모를 알리려 했던 그때!”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죽은 누이의 아이를 붙들어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도로테아는 굳이 그의 말을 멈추는 대신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가 짙은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멀리 있는 그림자와, 그의 주변을 둘러싼 탁기가 너울거렸다.

    창에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순간’을 노리던 도로테아가 이윽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콜린 하이클레어.”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그가 벼락같이 소리 질렀다.

    그는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주변의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고요한 사방 속, 콜린의 몸 위로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제 몸이 어둠에 삼켜지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콜린이 숨겨 왔던 진실을 고했다.

    “끔찍하고 천박한 방법으로 가문을 망신 주고 떠난 게 네 어미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네 어미가 부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적녀(嫡女)라는 이유만으로 다시 찾으려 했어!”

    일그러진 얼굴 위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괴한 웃음이 얼굴 만면에 스몄다.

    “나는 네 어미에게 버러지처럼 가문에 빌붙지 말고 멀리 꺼지라 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목소리에 희열이 들어찼다.

    “억지로 받아 낸 네 어미의 절연서를 건넨 것도 나였다! 당연히 해야 마땅할 일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사흘 밤낮을 심란해하셨지. 부인께서 흐느껴 우실 때마다 나는 매일 내가 고작 가문의 사생아에 불과하단 걸 깨달아야 했어!”

    질투와 열등감에 휩싸인 자의 눈은 추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콜린이 두 손으로 도로테아의 가느다란 목을 쥐었다.

    목을 서서히 죄어 오는 힘은 금방이라도 도로테아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 같았다.

    “파(破).”

    한마디를 뱉은 도로테아가 손에 쥔 병 안의 술을 천천히 바닥에 뿌렸다.

    테이블 위의 물잔이 부르르 떨렸다.

    어느새 그림자가 남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콜린의 눈동자가 검고 탁해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흐릿해진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자연스레 그에게서 벗어난 도로테아가 곧바로 바닥에 쏟은 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그림과 같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탁단방병(坼壇放兵 : 단지를 해체하여 저승의 병사를 풀어놓는다)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가 법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파로랑, 파로랑.

    여태까지 좋은 옷을 입은 적이 없고

    좋은 모자를 쓴 적도 없는데

    옥제(玉帝)는 나를 파로랑으로 봉했다.

    테이블 위 물잔의 물이 흔들리더니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어느새 주변을 맴돌던 검은 까마귀가 창을 넘어 들어와 부정한 것들을 한데 몰아세웠다.

    커프스 위에 새겨진 이니셜이 물과 함께 젖어 들며 천천히 사라졌다. 성공적으로 콜린의 몸이 혼에 먹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역시 제물을 바치는 게 제일 편하지.’

    나 외에 희생할 것을 고르는 것이 귀찮고 힘들긴 하지만.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혼이 먹히고 있는 콜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허공에 뜬 채 기괴하게 비틀어지고 있었다.

    크게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렀다. 확장된 동공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다.

    ‘상대가 내게 먼저 살의를 품은 마당에 손속에 사정을 둘 까닭이 있나.’

    애틋함은커녕 적자에 대한 열등감을 어린 조카에게 풀고자 한 어리석고 못난 인간이었다.

    그림자가 콜린의 혼을 다 먹어 갈 즈음, 그의 몸이 크게 새우처럼 굽었다가 펴졌다. 벌어진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울음소리와 함께 흐른 검은 피가 왈칵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물에 젖은 커프스에서 뿌연 것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도로테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여유로운 얼굴로 침대에 앉아 콜린의 상태를 확인하며 먼 곳을 응시했다.

    ‘한 번 더 불러야 하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롱한 소리를 내며 종이 울렸다. 주위의 온도가 한층 서늘해지고, 불길하게 울어 대던 까마귀가 몸을 파르르 떨며 자리를 떴다.

    등 뒤에 돋는 소름과 함께 천천히 굳어지는 몸. 익숙한 감각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었다.

    ‘호오.’

    아직 명부에 새겨지지 않은 혼이 먹혀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차사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

    다만 생김새가 기묘했다. 검은색의 새까만 망토를 두른 ‘해골’의 손에 들린 길고 커다란 낫이 달빛에 날카롭게 빛났다.

    ‘이곳의 차사들은 생김새가 아주 기묘하구나.’

    적어도 사람의 몰골이던 전생의 차사와는 전혀 달랐다. 기기긱, 소리를 내며 해골의 뼈마디가 움직였다.

    도로테아의 눈이 그를 훑었다.

    차사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어야 할 명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계산이 살짝 엇나갔음을 인정했다. 이곳의 차사가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으리라는 걸 생각지 못한 그녀의 실책이었다.

    그렇지만 혼의 부름에 답했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거겠지.

    도로테아의 조그마한 입이 열렸다.

    후백 노야와 백태 낭낭은 걱정하지 말고

    옛 누각을 헐고 새로운 누각을 만들겠다.

    후백 노야와 백태 낭낭은 초급하지 말고

    옛 단을 헐고 새로운 단을 쌓겠다.

    밤 자시 무렵에는 옛 누각을 헐고

    새벽닭이 우는 추시 무렵에는 신 누각을 짓겠다.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방 안을 울렸다.

    창문을 넘어, 어둠에 잠식된 콜린의 혼 가까이 다가왔던 이곳의 ‘차사’는 구주팔괘의 진 안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 감히 누가 하데스의 권속을 공격하느냐!

    기이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강하게 울렸다.

    도로테아는 반가운 듯 생긋 웃었다. 눈앞의 차사가 바로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반가워요, 차사님. 꽤 독특한 차림새를 하고 계셔서, 하마터면 아닌 줄 알았어요.”

    - 뭐 하는 계집이냐. 어떻게 살아 있는 몸으로 사신을 눈에 담는가!

    “미안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네요.”

    막 콜린의 혼을 먹어 치운 그림자가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도로테아가 빠르게 사신을 가두고 있던 진을 흐트러뜨렸다.

    순간 사신은 자신을 옥죄고 있던 ‘진’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낫을 높이 들었다.

    - 죽음의 권능에 도전하는 자를 능멸하고 처단하는 것은 사신인 나의 몫. 네 죄를 알렸다!

    그러나 도로테아를 향해 단숨에 내려쳐야 할 낫은 그대로 허공에 머무르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혼백이 빈 몸이, 혼을 찾아 주변의 생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혼을 먹고 난 ‘부정한 그림자’는 사신의 살기에 사라졌다.

    하지만 콜린의 비어 있는 몸은 자신이 담을 혼을 찾다 눈앞의 사신을 강력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명부에도 없는 혼의 죽음이니, 더더욱 혼을 찾는 육신의 힘은 강하지.’

    도로테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죽음을 다루는 술법을 처음 배우던 때만 하더라도 이것을 이렇게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절한 곳에, 적절한 방식으로만 써야 한다던 스승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가문의 요청으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의 스승이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제물을 쓰고 사신을 잡아 가둔 것을 보면 무엇이라 말하려나.

    ‘그렇지만 스승님, 저는 살고 싶은걸요.’

    오직 그 이유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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