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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8)화 (8/242)
  • 혼술사 도로테아 8화

    낯선 인물이 도로테아 홀로 남아 있는 저택의 어귀를 서성였다.

    꾀죄죄한 차림의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문을 열었다.

    향긋한 꽃 내음에 취해 잠이 들었던 도로테아의 침대 위에 그림자가 졌다.

    거칠지만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이 어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에 취해 있던 도로테아가 기척에 눈을 뜬 순간,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낯선 눈과 마주했다.

    몹시도 퀭한 남자의 얼굴에 고단한 생이 담겨 있었다.

    단박에 알아챘다.

    ‘도둑이구나.’

    이 허름한 집구석에 훔칠 것이 무에 있다고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도로테아는 신중하게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련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도로테아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뭐 하는 놈이냐!”

    마침 생선을 잡아 들어오던 우드가 뒤에서 남자를 덮쳤다.

    그가 내팽개친 바구니에서 싱싱한 생선들이 튀어나와 파닥거렸다.

    우드가 버둥거리는 남자를 제압하는 것을 본 도로테아가 부스스 일어나 턱을 괴고 남자를 관찰했다.

    젊은 시절 꽤 미남 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오랜 고생도 남자의 외모를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푸른 눈동자와 금발이 퍽 잘 어울렸다.

    “아는 사이냐?”

    우드가 미심쩍다는 듯 묻자 도로테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버둥거리던 남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끔뻑였다.

    하늘이 무너진 듯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선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이였던가?’

    생각해 보니 도둑이라면 이 낡은 저택보다야 좀 더 좋은 곳을 골라 들어갔을 것 같긴 했다.

    도로테아가 망설이는 사이 돌아온 제인이 제압당한 남자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주인어른!”

    제인이 울먹이며 굳어 버린 우드의 등을 두들겼다.

    “이를 어째.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당장 놔 드려요!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아가씨의 하나뿐인 아버님께!”

    등을 갈기는 통증에 정신이 들었는지 우드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황망한 얼굴로 도로테아를 바라봤다.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도로테아는 자신을 향한 우드의 힐난과, 슬프고 아련한 남자의 눈빛에 난감해졌다.

    이럴 때에는 솔직한 것이 최고다.

    “잊어버렸어요.”

    충격이 컸던지 겨우 일어섰던 남자의 몸이 휘청하고 다시 기울었다.

    제인이 차마 말을 못 하고 입을 틀어막았고, 우드는 한숨을 쉬었다.

    ‘자주 오지 않고 가끔 들러서 돈만 주고 간다며.’

    그럼 잊어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뻔뻔한 도로테아를 보며 우드가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지금은 생각났어요.”

    “그게 자랑할 일이야?”

    도로테아는 입을 꾹 다물다가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남자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진작 내가 네 아비다, 하고 밝혔으면 좀 더 공손하게 인사했을 텐데. 남자의 불찰이다.

    도로테아가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는 듯 웃고 있자 저택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주인을 때려눕힌 객식구와,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아가씨를 걱정하는 하녀와, 아버지의 존재조차 잊은 딸에게 충격받은 저택의 주인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   *

    “고의는 아니었어요.”

    “고의가 아니었어도 반성해야 될 문제야.”

    다들 애써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그나마 도로테아를 타박하는 것은 우드였다.

    “네 말이 저분께 어떤 상처가 될지 생각하고 말해.”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고 초췌한 인상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죄송해요.”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하는 딸아이를 보는 벤의 심정은 씁쓸했다.

    ‘내가 너무 오래 집을 비운 건가.’

    나날이 병이 깊어지는 딸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전국의 유명하다는 치료사는 모두 찾아다녔다. 해마다 들러 무사한 것만 확인하고 또다시 집을 떠나는 일의 반복이었다.

    종내에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시간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바삐 다녔다.

    그 모든 것이, 눈앞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였건만.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다니.’

    새삼스럽게 마음이 아려 왔다.

    여전히 또래 아이들보다 서너 살은 어리게 보이는 딸아이의 안색은 창백했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에 걱정이 솟아났지만 아이는 씩씩하게 웃고 있었다.

    “제인, 나 물 좀 줘.”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든 도로테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벤은 그런 딸아이를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토록 아프니 아버지를 잊은 것도 이해가 갔다.

    못난 아비라 아파하는 딸아이의 곁에 있어 줄 만한 여유도 없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방구석에서 삶은 감자를 입에 털어 넣고 있는 우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인의 먼 친척이라 하셨소?”

    “그렇습니다만.”

    “고향에서 제대로 된 일도 구하지 못하고 떠돌다가 장가갈 여인이라도 찾고자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다는 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물음에 긍정하는 우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비록 지어낸 사연이라고는 하나, 저 사연을 보면 자신은 적당히 놀고먹으면서 여자까지 밝히는 시정잡배가 되는 것이 아닌가.

    과거를 세탁하려다가 명예를 더럽히는 기분이다.

    물끄러미 우드를 바라보던 벤이 이내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몸이 꽤 단련되어 있더군. 아이들을 돌보는 걸 보아하니 심성이 나쁜 사람도 아닌 듯하고, 이곳엔 대단한 재화도 없으니 머물러도 상관없소.”

    “…….”

    “누군가 이 저택에 들어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나를 대신해 아이들을 지켜 주시오.”

    뜻밖의 말에 우드의 몸이 움찔했다.

    먼저 호의를 베푸는 벤을 보자 더욱 머쓱해졌다. 그가 벤을 제압할 때 생긴 퍼런색 멍이 팔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벤은 그런 우드를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신경은 온통 아픈 딸에게만 쏠려 있었다.

    고생이 느껴지는 거칠거칠한 손끝이 도로테아의 부드러운 볼을 매만졌다.

    도로테아는 고개를 들어 푸른 눈의 낯선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도로테아의 얼굴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아버지.’

    전생의 그녀에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늘 무언가를 요구하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 대가로 재신에게 주어진 것은 원치도 않는 감금된 삶과 바라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경외와 공포, 또 욕망 어린 시선들이 전부였다.

    재신의 삶을 앗아 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던 남자도 ‘아버지’였다.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벤이 다정하게 말을 꺼냈다.

    “크게 앓았다더니, 괜찮은 게냐.”

    “네.”

    앓았던 것은 진짜 도로테아였으니까.

    “걱정 말거라. 이 애비가 반드시 네 병을 고쳐 줄 거란다. 남들과 똑같은 삶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마.”

    결연한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도로테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왠지 모르게 불안정해진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절절한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박동 소리가 빨라졌다.

    거칠고, 서툴고, 또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손길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긴 힘들 거예요, 이 몸은. 이건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지닌 신체적 문제였다.

    기력이 허한 것은 기가 제대로 몸을 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갖 보양을 통해 억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성장하면 할수록 몸의 불균형은 커질 것이 분명했다.

    “테아야.”

    목소리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어린 딸의 담담함이 못내 가슴 아픈 듯 벤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도로테아에게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게 늘어진 이 몸의 명줄이 보였다.

    애정이 가득 담긴 정성이 목숨을 구원할 수 있다면, 세상은 이미 요지경일 것이다.

    재신의 혼이 별문제 없이 도로테아의 몸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육체의 생기가 쇠했기 때문이다.

    혼과의 연결이 흐릿하니 다른 이의 혼을 받아들이는 것도 수월했겠지.

    담담하게 제 상태를 진단하는 도로테아를 향해 다들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   *   *

    오랜만에 저택으로 돌아온 벤은 다시 훌쩍 떠나는 대신 옆방을 치워 잘 곳을 마련했다.

    아무리 딸을 위해서라지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이 딸이 자신을 잊은 것이 심각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어질까 자신을 대하는 이들은 이전의 생에서도 있었다.

    다만 그들이 재신의 ‘이용 가치’를 위해 아꼈던 것이라면 벤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딸에 대한 깊은 애정.

    가슴 한편을 먹먹하게 만드는, 한때 그녀가 너무나도 원했던 그것.

    누군가의 삶을 빼앗았다는 죄책감 같은 게 아니었다. 삶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도로테아는 자신이 이 상황을 주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히 알았다.

    누군가의 혼을 밀어내고 억지로 차지한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육체를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얻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잘못된 것은 없었다.

    다만, 이제 와 다시 보게 된 그 애정 어린 눈빛이 괜스레 심란함을 더했다.

    “차라리 바라는 것이 있으면 내어 줄 텐데…….”

    우드의 여동생은 그가 더는 살업(殺業)을 짊어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그의 살의를 끊어 내고 원한을 정리하는 대신 쓸모 있는 다리로서 받았고.

    제인은 비록 갈 곳 없어 저택에 눌러앉긴 했지만 하녀로서 그보다 충직하고 훌륭한 아이는 드물었다. 도로테아는 적어도 자신을 돌봐 주는 제인의 안위만큼은 알아서 챙길 생각이었다.

    교환 가치에 대한 거래는 명료하다.

    그렇지만 벤이 바라는 것만큼은 지금의 ‘도로테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떨결에 몸의 주인이 되어 버린 그녀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후…….”

    보답조차 바라는 것이 없다 하니 곤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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