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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3)화 (3/242)

혼술사 도로테아 3화

밖이 밝아진 것이 느껴져 눈을 떴지만, 눈앞을 무언가로 가린 듯 시야가 흐릿했다.

오장육부가 허약하니 모든 것이 제 기능을 할 리 없었다.

몸을 무리하게 움직일 때마다 앞이 흐릿하고, 귀에 이명이 들리며, 숨이 가빠 오고 통증이 짙어진다.

‘곤란한데.’

재액을 받아 온 과거 덕에 통증에 익숙하긴 했지만 이토록 허약한 몸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갑갑하고 괴로운 일이었다니, 이 몸의 혼이 스스로 도망쳤대도 이해가 갔다.

‘당장은 이대로 있어야겠지.’

물론 그녀의 능력이라면 육신에 깃든 ‘병’을 누군가에게 옮길 수 있을 터다.

액을 대신 맞을 수 있다면, 액을 누군가에게 대신 내릴 수 있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니까.

그러나 누구에게 병을 옮긴단 말인가?

‘쓸데없는 살업은 짊어지지 않는 편이 좋지.’

옆에서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어린 제인에게 그런 험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고, 마샤 부인은 굳이 그녀가 아니라도 곧 대면해야 할 업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또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아가씨?”

“안 아픈 곳을 묻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도로테아가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자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윤기 없이 퍼석한 백 금발이 어깨 아래로 흐트러졌다.

“나 좀 일으켜 줘.”

“아가씨.”

도로테아는 오랜 병치레로 인해 작고 가냘픈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제인의 부축이 없었다면 힘없이 꺾여 버릴 발이 가까스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누워 있다 보니 피부가 거무죽죽했다.

‘못난 내 다리.’

도로테아가 한숨을 삼키고는 한 걸음을 디뎌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을 꺼냈다.

“저택 밖으로 나가게 도와줄래?”

“안 돼요.”

“문 앞까지만.”

하녀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뭔가 필요하시면 제게 말씀하세요.”

도로테아는 힘없이 늘어지는 다리를 내려다보다 다시 문 바깥쪽을 응시했다.

“다리가 너무 약해서 걷기 불편해.”

“그러니 걸으시면 더욱 무리가 가죠.”

“새로운 다리를 갖고 싶단 말이야.”

“예?”

제인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도로테아는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맨다리를 만지작거리며 새로운 다리, 라는 말을 흥얼거렸다.

아가씨가 크게 앓고 나서 종종 이상한 말을 꺼내긴 했지만 이번처럼 기이한 말은 드물었다.

멀쩡히 붙어 있는 다리가 있는데 무슨 새로운 다리를 갖는다는 말인가?

그것을 또 어디서 구해 오고?

제인의 얼굴이 불안으로 가득 찼다.

“다리는 어디서 구해 올 수 있는 것이 아닌걸요…….”

“기왕이면 굵직하고 튼튼한 다리면 좋겠다. 고장 안 나게.”

엉뚱한 답에 제인이 기겁했다.

가냘프고 빼빼 마른 소녀의 몸에 굵직하고 튼튼한, 털이 숭숭 난 다리가 달린 것을 상상하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저는 절대 싫어요. 지금 아가씨의 다리가 딱 좋아요.”

“제인, 부엌에 가서 물을 한 그릇 떠와 줄래?”

도로테아의 부탁에 울상을 한 제인이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컵이 아니라 넓은 접시에. 기왕이면 동이나 쇠로 된 그릇에 담아서 가져오렴.”

해괴한 부탁에 제인이 망설이다 뒤를 살폈다.

다행히 도로테아의 다리는 여전히 빼빼 마르고 앙상하여 뼈가 보일 만큼 볼품없지만 그녀의 몸에 딱 맞는 크기로 잘 붙어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

*   *   *

“그런데 이 물을 어디 쓰시려고요?”

낑낑대며 물을 받아 온 제인이 물었다.

그녀의 동그랗고 맑은 눈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테아를 살폈다.

“쓸 곳이 있어서.”

별다른 설명이 없자 제인은 실망한 눈치였지만 설명해 달라며 조르는 대신 얌전히 옆에 섰다.

도로테아는 물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서늘한 수온이 그녀의 손가락과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조금 더 미지근하면 좋을 텐데.”

“도대체 어디에 쓰시려고요.”

제인이 다시 한번 물었다.

도로테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을 들여다보는 하녀에게 지시했다.

“이걸 아까 부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손으로 뿌려 주렴.”

“물을요?”

“응, 물을 붓는 대신, 손을 넣어 살짝 퍼내듯이 그 자리로 터는 거야. 세 번. 알겠니?”

“안 그래도 축축한 방에 물을요? 아가씨…….”

매일 같이 이 좁은 방을 쓸고 닦는 제인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지만 도로테아는 웃었다.

“제인, 내 말대로 해.”

금방 꺼질 듯한 자그마한 목소리에서는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제인은 뭐에 홀린 듯 도로테아의 말에 따라 낡은 테이블과 의자 위로 물을 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제인은 요구한 일을 끝내자마자 재빠르게 물그릇을 치우고 아가씨를 살폈다.

“아가씨, 역시 열이 나시잖아요.”

안절부절못하는 제인의 말에 도로테아가 태연히 말했다.

“괜찮아.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쇠약하긴 해도 아직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수, 숨이 넘어가시다뇨!”

제인이 기겁했지만, 도로테아는 바닥에 발을 디뎠다.

걷는 속도는 더뎠지만, 휘청이면서도 넘어지는 일 없이 저택에서 한 걸음 나설 수 있었다.

“바깥바람이 차요, 아가씨.”

“괜찮아. 저 밖을 보렴, 제인.”

도로테아의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별다른 풍경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엉망인 담 안쪽, 엉겨 자란 덩굴들 너머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새가 있어.”

“그러게요. 왜 저기 있는 걸까요. 이 저택은 가뜩이나 먹을 것도 없는데.”

제인이 뚱하게 말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새똥이 얼마나 냄새가 고약한데요.”

“살아 있으니 나는 냄새인걸.”

도로테아의 말에 제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택을 청소해 본 적 없는 아가씨다운 말이라 여기는 듯했다.

기웃거리는 새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도로테아와 새의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텃새가 한순간 멈칫한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제인이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요즘 들어 자꾸 기이한 행동을 하는 도로테아 때문에 제인마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꼭 도로테아와 저 새가 서로 통하는 것 같았다.

“곧 오겠구나.”

핏기 없는 도로테아의 입술이 열렸다.

“예?”

“내 다리가 조금 있으면 올 것 같아.”

“아가씨!”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도로테아의 말에 제인이 정색했다.

털이 숭숭 난 굵고 흉측한 다리가 성큼성큼 제인에게로 걸어오는 광경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굳은 제인의 표정을 본 도로테아가 드물게 소리 내어 까르르 웃었다.

그것도 잠시, 들뜬 웃음에 숨이 찼는지 몸을 웅크렸다.

“제인.”

그렇게 큰 소리도 아니었건만 도로테아의 부름에 소녀가 빠르게 반응했다. 도로테아가 제인을 향해 재차 당부했다.

“혹여 손님이 오기 전에 내가 잠이 들거든,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제인은 도로테아의 말에 가까이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요. 아가씨의 말인걸요. 특별히 부탁하지 않으셔도 저는 꼭 들을 거예요.”

“착하구나.”

도로테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녀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샛바람이 창을 세 번 두드리고 나면 손님이 올 거야. 제인, 네가 문밖까지 나가서 그분이 찾는 이에 대해 알려 드리렴.”

모호하고 뜬금없는 말에 제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샛바람이 창을 세 번 두드리는’ 시기라는 것도 애매모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때에 맞춰 온 손님이 ‘찾는 이’가 있다는 것도, 그걸 제인이 알려 줄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다.

혼란으로 가득한 어린 하녀의 얼굴에도 도로테아는 태연했다.

“그러니까 손님이…….”

“찾고 있는 사람에 대해 그저 솔직하게 말해 주면 돼.”

“제가 그분이 찾는 사람을 어찌 알고요.”

제인의 얼굴이 울상이 되자 도로테아가 잔잔히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는 이미 알고 있단다.”

“아가씨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아시는 건데요?”

“새가 알려 줬어.”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재잘거리듯 하는 이야기에 제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거짓말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세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제인은 도로테아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아가씨.”

“착하구나.”

병색이 짙은 얼굴을 내려다본 제인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칭찬하는 도로테아를 보며 애써 눈물을 참아 냈다.

‘가여운 아가씨, 아픈 이후로 부쩍 헛소리가 느셨어.’

그렇게 잠이 든 도로테아의 옆에서 제인은 뜨개질에 열중했다.

서툴고 모자란 솜씨지만 늘 서늘한 도로테아의 손과 발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두 번째 줄을 엮던 차였다.

툭, 투둑.

어디선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었던 제인은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가 낸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내렸다.

‘가만.’

무언가 번뜩 떠오른 제인이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가 다시 창을 두드렸다.

세 번째였다.

도로테아가 말했듯이 바람이 창문을 세 번 두드린 것이다.

제인이 벌떡 일어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로?’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서두르라는 듯 울어 댔다.

멍하니 서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듯 재빠르게 겉옷을 챙겨 입었다.

“다녀올게요, 아가씨.”

헐레벌떡 밖으로 나간 제인이 불안하게 삐걱거리는 바깥문을 열자,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제인은 본능적으로 그가 바로 도로테아의 ‘손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덥수룩한 수염 탓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꼿꼿한 허리와 체격으로 봤을 때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낡은 체인 메일 위의 흠집과, 흙탕물 범벅인 신발을 보니 며칠째 씻거나 쉬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초라한 차림새와 달리 형형하게 살아 있는 눈이 인상적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린 하녀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

걸걸한 목소리에 제인의 몸이 굳었다.

“이 근방에 중매 노릇을 하는 여인을 아느냐.”

중매란 마을에 인맥이 있는 여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제인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가씨, 제가 손님이 찾는 사람을 알 수 있다면서요.’

사내의 조건은 지나치게 모호해 누굴 찾고 있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고개를 젓는 제인의 눈에 그가 찬 검이 보였다.

손잡이에 끈적하고 검붉은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

제인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커졌다.

낡은 군화, 허리에 찬 검, 허름한 옷차림.

‘타, 탈영병……!’

민가를 약탈하는 탈영병에 대한 말을 주워들은 적 있던 제인이 창백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주, 중매를 하는 여인이라면 아주 많아요. 마을 안에만 하더라도 다섯은 될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꺼낸 말에 남자의 무심한 시선이 제인을 향했다.

“나이는 마흔 즈음. 아들이 둘 있고 딸이 하나다. 늦둥이라 애지중지한다고 들었고. 눈에 띄는 자리에 모반이 있어 챙이 넓은 모자를 즐겨 쓴다지.”

2남 1녀의 자녀를 둔, 챙 넓은 모자를 즐겨 쓰는 중매쟁이.

제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마샤 부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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