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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사 도로테아 (2)화 (2/242)
  • 혼술사 도로테아 2화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지 하루가 지났다.

    그사이 재신은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시중을 드는 푸른 눈을 가진 소녀의 이름은 제인.

    집을 자주 비우는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데려온 하녀였다.

    “아가씨, 잘 주무셨어요?”

    어딘가 굼뜬 구석이 있던 첫인상과 달리, 아이는 재주가 많았다.

    아픈 아가씨를 돌보는 동시에 이 작은 저택의 크고 작은 일들 모두를 책임졌다.

    다 큰 어른도 버거워할 만한 일일 텐데,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아이는 이 모든 것들을 너끈하게 해내고 있었다.

    물론 아직 아이인지라 손이 가지 못하는 곳도 있긴 했지만.

    “거울을 가져다줘.”

    “또요?”

    갸웃거리며 가져다준 거울 너머에 낯선 얼굴이 비친다.

    보고 또 보아도 신기했다.

    옅은 분홍빛의 눈동자에 밝은 백금발 머리카락은 살짝 곱슬하게 말려 어깨 아래까지 늘어졌다.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피부를 갖춘 얼굴에는 또렷한 이목구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야위고 앙상한, 병색이 완연한 낯빛만 아니라면 대단한 미인이 될 조짐이 보인다며 감탄했을 것이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는 팔목의 투명한 피부 아래로 핏줄이 훤하게 비쳤다.

    “식사하셔야죠, 아가씨.”

    거울을 들여다보는 재신의 앞에 묽은 수프가 놓였다.

    정성을 가득 담은 수프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커튼을 걷어도 될까요?”

    “응.”

    밝은 햇살에 눈이 부시긴 했지만 창 너머 풍경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지나가는 이들이 좀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제인의 말에 따르자면 이 저택이 위치한 곳은 마을에서도 외진 구역이라,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아쉬움을 삼키며 밖을 구경하는 재신에게 어린 하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가씨, 좀 변하셨어요.”

    재신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변한 것이 아니라, 혼이 바뀐 것이다.

    그렇게 말한들 제인은 알아듣기는커녕 그녀가 미쳤다고 하겠지만.

    재신은 분주히 청소를 하는 하녀의 옆에서 스푼을 들었다.

    가져다준 수프를 떠먹는 일조차도 힘에 부칠 만큼 그녀의 새로운 신체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랜 시간 갖고 있던 병마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어.’

    건강한 육신을 갖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이 몸으로 들어오게 된 터라 갑갑함이 배로 더했다.

    잘게 떨리는 손을 움직여 식사를 하던 재신이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제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쪼르르 곁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누군가 낡은 저택의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동시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택을 가득 울렸다.

    “테아! 아가야! 도로테아!”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도로테아’가 그녀가 차지한 육신의 이름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외침을 듣던 제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 여는 것이 왜 이렇게 늦니!”

    타박과 함께 들어온 손님은 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섰다.

    대뜸 재신, 그러니까 도로테아의 곁에 앉은 그녀가 앙상한 손을 쥐며 친근한 척 말을 붙여 왔다.

    간드러진 목소리에서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잘 있었니?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고?”

    “아가씨는 크게 앓다가 이제야 막 일어나셨어요. 사람을 상대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구요.”

    이를 악문 제인의 말에도 여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우리 테아가 아픈 건 이 마을 사람들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이지. 내가 테아를 위해 아주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가 은근하게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파.

    도로테아는 손으로 전해지는 통증에 물끄러미 여인을 바라보았다.

    움츠러들기는커녕 눈을 맞추고 빤히 마주하자 기세등등하던 상대가 움찔했다.

    제인이 그 틈을 타 정색하며 여인을 도로테아에게서 떼어 냈다.

    “좀 떨어지세요, 부인!”

    오랜 세월을 살아온 중년 여인의 감일까.

    그녀는 병색이 완연한 이 작은 아가씨에게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챈 듯 의아한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테아, 너 괜찮은 거니?”

    억지로 꾸민 듯 간드러지던 억양이 줄어들었다.

    도로테아는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다 이내 은은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부인.”

    마샤 부인이 멈칫했다.

    그녀가 오랫동안 보아 온 도로테아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대화를 할 때에도 상대의 말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네, 네 답하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소심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웃는 이 아이가 정말 도로테아인가?

    옅은 분홍빛 눈동자는 마치 그녀의 영혼을 옭아매듯 마샤 부인을 끌어당겼다.

    “아, 아가.”

    몸을 떨며 당황한 부인을 보자, 도로테아는 마주하고 있던 눈을 내리깔았다.

    ‘감이 좋네.’

    늘 함께하는 제인조차도 그저 ‘아가씨가 희한한 데 관심이 생겼다.’고만 생각하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의 눈에 경계하는 기색이 떴다.

    이런 이에게는 함부로 술법을 걸어서는 안 된다.

    자칫 튕겨 나오기라도 하면 애먼 이쪽이 손해를 보니까.

    평소라면 이 정도 술법의 반동이야 코웃음 칠 수준이지만, 지금의 육신으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도로테아의 시선에서 해방된 마샤 부인의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불안이 한 겹 덧대어졌다.

    ‘불안이라…….’

    저 여인은 무엇을 걱정하는 걸까.

    도로테아가 생각하는 틈을 타 제인이 까랑까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부인, 모셔 온다던 유명한 치료사는요?”

    세모꼴이 된 제인의 눈이 마샤 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성이 자자한 치료사가 옆 영지에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데려오겠다며 주인어른께 돈을 타 가셨잖아요.”

    날카로운 힐난에 어느새 여유를 찾은 마샤 부인이 느릿하게 답했다.

    “그게 말이지, 내가 분명 그분을 모시러 세인트 광장까지 갔었는데…… 그분이 또 홀연히 다른 영지로 떠났다고 그러지 뭐니. 안타깝지만 허탕만 친 셈이지.”

    “무슨…….”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니? 치료사의 방랑벽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손을 뺨에 가져다 댄 채 과장되게 한숨을 쉬는 여인의 모습에 제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하녀와 달리, 중년의 여인은 노련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나도 한숨도 자지 않고 그곳에 다녀온 거란다. 혹시 몰라 치료사가 어디로 갔을지 수소문까지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거야.”

    밤을 새워 옆 영지에 다녀오고, 여기저기 수소문까지 했다는 여인의 혈색은 아주 훌륭했다.

    튼튼한 바느질로 만들어진 새틴 드레스에는 얼룩 한 점 없었다.

    여기저기 낡아 너덜거리는 제인의 복장과도, 단출한 재신의 복장과도 달랐다.

    가죽으로 만든 고급 구두는 오래 걸은 흔적은커녕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것처럼 광이 났다.

    아마 그녀는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았으리라.

    “말도 안 되는…….”

    “제인.”

    도로테아가 제인의 말을 끊어 냈다.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다.

    여인의 거짓말에는 성의가 없었지만 태도는 자못 당당했다.

    그건 거짓을 들킨다 하더라도 자신을 탓할 이가 없다는 뜻이다.

    어린 하녀 따위가 하는 고발로 그녀가 불리해질 리 없다는 그 확신이 그녀를 당당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만하고 수프를 다시 가져가.”

    제인이 입술을 앙다물고 곁으로 와 수프가 담긴 쟁반을 거두어 갔다.

    도로테아의 표정에서 다른 것을 읽어 내지 못한 마샤 부인은 평소와 같이 주절거렸다.

    “대신 내가 약초상에 가서 몸을 보신할 만한 약초를 좀 사 왔단다. 알다시피 요즘 약초값이 워낙 올라서…….”

    “부인.”

    도로테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약초를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 부엌이 텅 비었으니, 남은 돈은 식재료를 구입하는 데 써 주셨으면 해요.”

    끊길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용케 할 말을 마쳤다.

    마샤 부인의 벙찐 얼굴이 도로테아에게로 향했다.

    ‘이 아이가 내 앞에서 이렇게 말을 술술 한 적이 있던가?’

    오랜 병에 지쳤던 아이는 몸을 가누지 못해 잠들어 있거나 자신을 힘없이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병색이 완연했지만, 아이의 눈 깊은 곳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마샤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마. 그러고말고.”

    그녀는 다른 변명을 하는 대신 허둥지둥 부엌으로 향했다.

    한참 뒤, 부인과 함께 부엌에 들어섰다가 홀로 돌아온 제인이 분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돈은 두 배로 받아 갔는데, 약초는 늘 건네던 것들뿐이에요. 정말 너무하잖아요.”

    “어쩔 수 없지. 그녀 외에는 먼 약초상까지 다녀올 사람이 없으니까.”

    도로테아는 아팠고, 누군가가 필요했다.

    주변에 다른 이웃들과 교류하기에 두 사람은 너무 어렸다.

    “마샤 부인은 고작해야 좀도둑이야.”

    그녀는 딱 두 사람이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남겼다.

    위선적이고 가끔 욕심을 부리긴 해도 아직까지 선을 넘지는 않으니 위협이 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부인은 꼭 아가씨가 금방이라도…….”

    제인이 말을 하다 말고 울컥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아가씨가 죽을 것처럼 굴잖아요, 하고 삼킨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록 어린 하녀가 말을 삼켰어도 알 수 있었다.

    마샤 부인이 치료사를 찾기는커녕 값싼 약초를 던져 주고 마는 것이, 도로테아가 머지않아 곧 죽을 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임을.

    “괜찮아.”

    도로테아가 제인을 달래며 부인이 앉아 있던 자리를 훑었다.

    거뭇한 그림자가 아직 남아 그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누군가가 오래전에 만들었던 악연이 슬슬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소인배인 까닭에 큰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을지도 모르나, 욕심이 지나친 인물인 것만은 확실했다.

    자신보다 부족하거나 약한 자들을 갈취해 주머니를 채우는 것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니까.

    어린 두 소녀에게만 그랬을 리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겠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테고.

    희끄무레하게 움직이던 악의가 그녀의 흔적을 따라 스르르 물 흐르듯 따랐다.

    뒤늦게 사라진 검은 얼룩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제인이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

    “아가씨?”

    “응.”

    “무엇을 보고 계셨어요?”

    제인의 물음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니야.”

    제인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아프고 난 다음부터, 도로테아는 유독 허공을 보는 일이 많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노려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제인의 불안함도 점점 크기를 키웠다.

    크게 아팠던 아가씨에게 후유증이 남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누우실래요?”

    깨끗이 빨았음에도 세월의 흔적이 남은 베개 위로 머리를 누이며 도로테아가 불쑥 말했다.

    “오늘 받은 식재료로 내일 오후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렴.”

    “네?”

    “손님이 찾아올 모양이야.”

    뜬금없는 말에 제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님이요?”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뜩이나 우리가 먹을 것도 없는데 손님이라니요.”

    하녀의 솔직한 표정에 도로테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 손님이 아니라 마샤 부인의 손님일 거야.”

    “그 부인은 이제 본인 손님까지 이 집에 들인대요?!”

    기가 막힌 듯 제인의 목소리가 빽 올라갔다.

    *   *   *

    도로테아는 어두워지는 창밖을 보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창을 두드리며 묘한 소리가 저택을 채웠다.

    “같이 자도 될까요, 아가씨?”

    기이한 소리 탓인지 오늘따라 어둡고 낡은 저택이 유독 음침하게 느껴졌다.

    제인의 조그마한 목소리에 도로테아는 손을 뻗었다.

    “옆에 누워.”

    이윽고 저택의 마지막 불이 꺼졌다.

    마샤 부인이 아니면 기웃거리는 이웃 하나 없는 저택 부근을 누군가가 서성였다.

    불 꺼진 방을 바라보던 인물이 이내 몸을 돌려 돌아갔다.

    남자가 걸을 때마다 허리에 찬 장검에서 철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군화를 신은 남자의 발자국이 비가 와 물렁해진 땅 위에 깊게 새겨졌다.

    누구도, 그 발자국을 깊게 눈여겨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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