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07)
  • 주변을 둘러보니 제국의 침공이 있던 그 날처럼, 북부 성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내부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깨진 액자와 촛대, 검, 그리고 언뜻 보이는 핏물과 다수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활짝 열린 정문으로 눈발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제레, 미……?”

    엘리아는 제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제레미를 멍하니 불러보았다. 제레미는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휠 정도로 해맑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

    “이게, 대체…….”

    영문을 몰라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제 몸을 살폈다. 그때 펠릭스가 입혀준 로브와 슈미즈 드레스 차림으로, 복부에는 커다란 핏자국이 있었다.

    “어머니.”

    엘리아는 얼굴을 들어 다시금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는 모습만큼은 5살 때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곧 제레미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왜 다시 북부로 돌아오셨어요. 험난하고 추운 북부와 무뚝뚝한 아버지 옆에서 많이 힘들어하셨잖아요.”

    “…….”

    ‘제레미? 설마……!’

    엘리아의 가슴이 불안하게 퍼득거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하잖아.’

    “제레미, 아니지? 너의 이능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거, 아니잖아. 그렇지?”

    “……북부에 오시지 말라고, 기껏 16년이나 되돌렸는데 다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

    “하하. 그래도, 어머니. 저 정말 행복했어요. 제가 어렸을 땐 우리 둘 다 서로 말 한마디 못 걸었잖아요. 근데 이번엔 어머니께서 다가와서 먼저 말도 걸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셔서 정말, 정말 행복했어요.”

    제레미는 여전히 숲길과도 같은 눈동자로 따스하게 엘리아를 바라봐 주었다.

    “제레미, 안 돼……. 아니라고 해줘!”

    샤미르의 걱정 어린 말이 떠올랐다. 본인의 능력 이상을 사용할 경우 몸이 사라지고 말 거라고.

    16년을 되돌린 게 제레미라면 아이의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5살, 첫 만남 때부터 항상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상냥한 미소를 몰래 훔쳐보곤 했어요.”

    엘리아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이미 그녀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으흐흑흑, 제레미……!”

    끅끅거리는 엘리아의 등을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제레미는 너른 품으로 엘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녀 역시 제레미를 꼭 끌어안았다.

    “어머니,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나직하게 읊조리는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제레미…… 마지막이라니, 제발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제레미는 대답 없이 한동안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부디, 제가 없는 세상에서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 “흐윽, 흑. 너 없이,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이니……. 안 돼, 안 돼! 제레미!!”

    엘리아의 주변이 어둑해졌다. 어둠이 태양을 삼킨 것처럼, 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사랑해요, 어머니.”

    그 말을 끝으로, 제레미의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품에 남은 건 공허한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조그마한 빛줄기 하나가 어둠의 균열을 뚫고 엘리아의 몸에 스며들었다.

    * * *

    “정말, 정말 금방 올…… 쿨럭, 쿨럭.”

    다시금 눈을 떴다. 황태자와 마차에 오르기 직전, 제레미를 달래던 그때로 되돌아와 있었다.

    잠시 휘청거리던 제레미는 작은 손으로 엘리아를 꼭 붙잡았다. 아이는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말을 마치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제레미!!”

    털썩.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엘리아는 헉헉, 숨이 찼다.

    “쿨럭…… 제레미, 아파, 가지 마요.”

    “미안해. 미안해. 엄마 어디에도 안 갈게. 제레미랑 같이 있을 거야.”

    “쿨럭, 쿨럭, 응. 엄마, 같이…… 쿨럭.”

    엘리아는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를 바라보다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으흑, 윽, 으, 아아! 제레미……!!”

    처절한 비명이 성 전체에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도련님!!”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서 있던 집사와 하녀들이 다급히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의원, 의원을 불러와!”

    앤드류의 목소리와 함께 모두가 바삐 움직였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제레미.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죄책감과 함께 걷잡을 수 없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엘리아는 가슴을 연신 내려치며 눈물을 쏟았다.

    “마님! 진정하십시오. 마님!!”

    “나, 나 때문에, 나 때문이야. 제레미가 이렇게 된 건…… 끄흑, 끅, 끄윽!”

    숨을 쉬기가 어려워질 때쯤, 누군가 엘리아의 어깨를 거칠게 뒤흔들었다.

    “엘리아 님! 정신 차리세요!”

    작은 손이었음에도 목소리만큼은 단호했다.

    “……!”

    엘리아는 잔뜩 젖은 눈을 들어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렇게 울고 있을 시간 없어요! 제레미, 살려내야죠.”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얼굴로 샤미르가 엘리아 앞에 서 있었다.

    * * *

    샤미르는 아르티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르티젠에 서식하는 마물들의 특이한 행보를 연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몇 년을 머물렀음에도 어떠한 결과도 얻지 못했다.

    샤미르가 열셋의 나이에 이능이 발현되자, 아버지는 딸의 아카데미 진학을 위해 연구를 접고 다시 제국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열여덟, 샤미르는 아카데미 졸업 후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최연소 이능 연구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북부 대공의 아들 제레미 로이드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후배님.”

    “…….”

    새하얀 피부에 맑은 녹안, 포슬하지만 단정한 분홍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상냥하게 인사하는 샤미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외양과 달리 그는 눈썹을 사선으로 찌푸린 채 별 표정이 없었다.

    “샤미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로이드 공.”

    “……날, 어떻게 알지?”

    “유명하니까?”

    샤미르가 싱긋 웃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보통 아카데미에 함께 몸담고 있다 하더라도 서로의 이능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샤미르가 제레미의 이능을 알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제레미의 사수가 되어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할 당시였다.

    “용액이 희석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액체를 추출해야 해. 완전히 희석되기 전에 용액을 넣으면 유리가 터질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

    제레미는 언제나 그랬듯이 묵묵히 샤미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느샌가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샤미르! 나 좀 도와줘!”

    아카데미 소속 연구원 중 유독 샤미르에게 자주 의존하던 남학생이 그녀를 찾아왔다.

    “잠시만.”

    샤미르는 얼른 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등 뒤에선 제레미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 차는 소리가 잠시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저 실험 중 자리를 이탈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온도가 좀 올라간 것뿐이야. 잘 조율하면, 봐. 원상태로 복귀됐지?”

    “어, 어어. 고마워, 샤미르. 그런데, 혹시 오늘 시간…….”

    “어어? 제레미!!”

    온도기를 확인하며 한숨을 돌리던 찰나, 샤미르는 제레미의 행동을 보곤 서둘러 달려갔다.

    펑-!!

    “꺄아악! 샤미르!”

    “으윽…….”

    실험실에 있던 연구원들의 비명이 들렸다. 거대한 잿빛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샤미르는 안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에 힘없이 신음을 토했다.

    “왜, 왜……?”

    샤미르 아래에 깔린 제레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위험하다고, 했잖…….”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새끼.

    차마 마지막 문장은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샤미르는 말을 안 듣는 이 귀족 부사수를 어찌해야 할까, 까무룩 잠기는 의식 속에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새하얀 빛이 부드럽게 샤미르의 몸을 감쌌다. 신기한 일이었다. 무수한 빛 조각이 살갗에 스며들면서, 몸의 일부가 되는 그런 생소한 감각.

    샤미르가 번쩍 눈을 떴다.

    “샤미르! 나 좀 도와줘!”

    동료가 자신을 부르기 전, 정확히는 화상을 입기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어?”

    샤미르는 별거 아니었던 동료의 부름을 무시한 채 제레미의 팔목을 덥석, 움켜쥐며 아카데미의 가장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아버지 덕분에 샤미르는 꼭대기 층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답답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샤미르는 늘 그곳으로 향했다.

    “가, 갑자기 뭐야?”

    당황한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샤미르는 옥상 문을 닫을 때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열지 않았다.

    “……뭐긴! 이능을 함부로 사용하면 어떡해. 이 멍청아!”

    “뭐? 무슨 헛소리야.”

    “아, 답답해. 제레미, 네가 시간을 되돌린 거잖아!”

    “내가, 이능을 사용했어?”

    멍하니 깜박이는 녹안은 거짓 없이 투명했다. 샤미르는 그의 팔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너, 설마 기억이 없는 거야……?”

    언젠가 큰 힘에는 부작용이 따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제레미가 이능을 사용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