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07)
  • 터벅터벅.

    펠릭스가 문을 열고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루카스가 허리를 숙였다.

    펠릭스와 함께 곧장 마차에 올라탄 루카스가 상황을 빠르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제국의 번화가를 돌았다.

    “카타미아 왕국에 소식을 알렸습니다. 바바리안 역시 도움을 주겠다고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수고했군. 시간이 얼마 없어. 처형일은 3일 뒤다. 온 백성이 사형장으로 몰릴 테니, 황성을 가는 길까진 경계가 허술하겠지.”

    “네. 혹시 모르니, 사형장에 백성으로 위장한 기사단을 배치해 두겠습니다.”

    “……그래.”

    마차의 작은 창을 통해 주변을 살핀 펠릭스가 다시 루카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레미는.”

    “지금은 제국 선착장에서 대기 중입니다.”

    “말을 잘 듣던가?”

    “……가지 않으려고 떼를 쓰셔서, 전하께서 마님을 꼭 구하실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그 이후로 달리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루카스의 말에 펠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챙겨. 하필 닮아도 내 성격을 빼닮은 놈이니,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네, 알겠습니다.”

    “카타미아 왕국과 아르티젠에 출발하라는 전갈을 보내. 우린 선착장으로 이동한다.”

    “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대기 중이던 말에 올라타 북부 기사단과 함께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을 지키는 황실의 보초병들을 은밀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무장한 군단이 달려 나가자, 뿌옇고 건조한 모래바람이 크게 일렁거렸다.

    * * *

    탁탁!

    데니스가 커다란 나무 상자를 수레 안에 들인 채 호들갑을 떨며 손을 털었다.

    “아우, 무거워. 이게 끝입니까아?”

    “그래. 이 마차는 우리보다 하루 먼저 황성으로 출발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아. 근데 이게 뭔데 이렇게 무겁습니까아?”

    데니스의 물음에 게일은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었다.

    “이게, 카타미아 왕국에서 직접 보내준 어마어마한 화력의 폭탄이야.”

    “허. 그럼 정말 이것만 있으면…….”

    “그래. 우리는 마님을 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거야.”

    “……저만 믿으십시오! 빠르고 은밀하게 옮기도록 하겠습니다아!”

    바짝 기합이 든 데니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소리쳤다. 그에 게일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수레의 덮개를 마저 덮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도련님은?”

    “도련님은 지금쯤 주무시고 계시겠죠.”

    “단장님 말씀 못 들었냐? 도련님 잘 보좌해서 배로 모셔. 응?”

    “아, 그러믄요. 제가 또 누굽니까아. 도련님과 가장 친밀하다면 친밀한…….”

    “닥치고, 도련님 잘 계신지 살펴봐.”

    “당연히 침실에…….”

    “쓰읍!”

    “네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데니스가 선착장 근처 대공 소유의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오롯이 펠릭스 로이드 소유의 영역이었다.

    모두가 이곳을 그저 대공이 제국을 오갈 때 편하게 이용하는 별장으로 여겼지만, 사실은 달랐다.

    북부 기사단이 제국과 북부를 오가며 정보를 전달하기 용이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었다.

    타다다닥!

    데니스가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제법 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갸웃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문을 열어젖혔다.

    널찍한 내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반 층으로 제레미가 허둥지둥 뛰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도련님……? 술래잡기입니까아? 도려니임!!”

    데니스는 영문도 모른 채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엘리아는 황실 기사에 의해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 아래 억지로 몸이 눕혀졌다.

    우우우-.

    여기저기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비의 최후를 보기 위해 몰려든 고위 귀족들은 전부 마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백성들은 길거리에 몰려서 있었다.

    그 수많은 인파 위로 황제와 황태자가 우뚝 솟은 자리에 앉아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의 얼굴 위로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황제는 처형식이 시작되자 표정을 바꾸었다.

    “친애하는 백성들이여.”

    두 팔을 활짝 벌린 그가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모두가 시선을 돌려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대제국의 하나뿐인 공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악질적인 범인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의 연설에 백성들이 동조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살해범 엘리아 로이드에게 사형을 내리고 그녀를 방종하게 한 남편 펠릭스 로이드 또한 대공직에서 폐위시킬 것을 선포하는 바이다!”

    “……!”

    백성들의 함성이 온 하늘에 울려 퍼졌다.

    얼굴을 떨구고 있던 엘리아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설을 다 마치고는 백성들에게 여유롭게 두 손을 흔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결국, 펠릭스까지 건드릴 생각이구나!’

    최악의 상황 끝에 선 엘리아가 퍼석하게 메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그런 엘리아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백성으로 위장한 북부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늦어지는 대공의 모습에 긴장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마님!’

    기사단은 모두 같은 생각으로 그녀와 제법 가까운 거리에 섰다.

    사형 집행인이 사형 언도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우다다다.

    그때 어린아이가 사형장 앞에 떼로 몰린 군중을 헤치며 달려 나갔다.

    작은 목검을 휘두르며 열심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백성으로 위장한 기사들은 그 아이가 대공의 아들, 제레미 로이드라는 것을 알아챘다.

    “엄마!! 엄마!!”

    아이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때마침 아이 근처에 서 있던 데니스가 재빨리 사람들을 헤치며 제레미의 팔을 붙들었다.

    “위험합니다. 도련님 기다려 주세요. 제발!”

    “이거, 이거 놔!!”

    아이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많은 군중을 헤치고 엘리아와 가까운 곳까지 도착하니, 아이의 옷은 다 해지고 머리카락은 땀과 먼지로 잔뜩 뒤엉켜 있었다.

    더군다나 몇 번이나 넘어졌던 건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안 됩니다! 도련님임. 제발, 얌전히 계십시오!”

    데니스의 간절한 외침에도 제레미는 연신 몸을 뒤틀었다. 힘으로 이길 수 없자, 아이가 작은 두 손을 입에 모은 채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어, 엄마, 데리러 와써요! 제레미가 왔다구요!!”

    “제레미…….”

    그 목소리를 들은 엘리아가 눈물을 참으며 제레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이에겐 닿지 못했다.

    목청이 찢어지도록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에 당황한 사형 집행인이 난처한 눈으로 황제와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죽는 자들을 위한 사제의 기도가 남아 있었지만, 황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걸 확인한 그가 얼른 커다란 칼날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단두대의 밧줄을 자르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엄마, 엄마 건들지 마! 이 나쁜 놈!”

    제레미가 거칠게 발버둥 치자, 데니스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렇게 날카로운 검이 허공을 가르던 순간이었다.

    피융! 퍽!

    “크흡, 큭, 쿨럭! 쿨럭!”

    사형 집행인이 고개를 숙여 제 가슴에 박힌 화살을 확인하며 검을 떨어뜨렸다.

    “으, 으아아아악!”

    그 비명을 시작으로, 엄청난 수의 기사들이 광장을 덮쳤다.

    엘리아는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 너머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쥐고 있는 펠릭스를 보았다.

    그의 주위에는 카타미아 왕국 기사단과 바바리안족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가, 펠릭스가 왔구나…….’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 순간, 엘리아는 빠르게 일그러지는 펠릭스의 얼굴을 보곤 멍하니 두 눈을 깜박거렸다.

    “……엘리아!!”

    “엄, 엄마아!!”

    다급히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그와 아이의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엘리아가 두 사람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낄낄낄, 얼빠진 얼굴하고는. 왜,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크하하하!”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광기에 사로잡혀 웃고 있는 황태자가 서 있었다.

    투둑.

    그의 날카로운 칼날이 밧줄을 내리쳤다.

    우우웅-!

    날카롭고 커다란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끔찍한 소음이 울렸다.

    ‘제레미! 펠릭스!’

    두 눈을 꽉 감은 엘리아는 속으로 두 사람을 부르짖었다. 시퍼런 칼날이 순식간에 그녀의 새하얀 뒷덜미를 가르던 순간이었다.

    제레미의 눈동자 위로 새하얀 빛이 번쩍거렸다.

    그러자 황태자의 광기 어린 웃음도, 엘리아의 뺨에 흐르던 눈물도, 절망 어린 얼굴로 펠릭스가 쏘아 올린 활도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상은 고요해졌다. 머지않아 째깍, 째깍, 시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서 엘리아만이 투명한 빛에 휘감긴 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빛은 봄 햇살처럼 따사롭고, 어린 새싹이 자라날 때처럼 몽글했다. 엘리아는 그 빛을 느끼며 부유하는 감각에 몸을 맡겼다.

    * * *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에 엘리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그 손길이 싫지 않았다.

    머리 아래로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펠인가. 아닌데, 펠릭스는 이렇게 달짝지근한 향이 나는 이가 아니었는데.

    엘리아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앞엔 제레미가 있었다.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 그대로, 엘리아보다 훌쩍 커버린 제레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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