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07)
  • 더 강해질 것이다. 이제는 절대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의 곁에서 평안할 수 있도록.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고 있어도 자꾸자꾸 보고 싶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답답한 듯 웅얼거렸다.

    “제레미…….”

    “……이런 꿈속에서도 제레미 생각뿐이군.”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건 결국 제 아들의 이름이었다. 펠릭스는 그 말에 살짝 심술이 났다. 아들을 질투하는 아비라니.

    ‘당신은 참 이상해. 당신이 낳은 아이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 제레미를 사랑할 수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심술 난 마음이 곧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그녀의 이런 마음씨가 그녀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같았다.

    출렁이는 물길 따라 배가 움직였다. 방에 난 작은 창 위로 조각난 바다의 풍경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북부였다.

    “잘 돌아왔어, 엘리아.”

    그녀의 얇은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맞추며 작게 중얼거렸다.

    *** 카타미아 대륙을 한참 지나 아르티젠 해협까지 다다르니, 기온이 확 바뀌었다.

    의복을 벗어젖혔던 기사들이 주섬주섬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드디어, 북부…….”

    어느 정도 멀미가 가신 엘리아가 난간에 기대어 푸른 바다 너머 새하얀 대륙이 점차 가까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뒤로 펠릭스가 다가와 두툼한 숄을 걸쳐주었다.

    “춥지?”

    “……고마워요.”

    그의 숨결에 그와의 뜨거웠던 시간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펠릭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사이 배는 빠르게 육지에 다다랐다.

    그들이 타고 이동할 마차는 이미 항구에 대기 중이었다.

    카타미아에선 숨 막히는 더위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마주한,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순간마다 살이 에일 듯한 감각이 조금은 낯설었다.

    배에서 내린 엘리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 그녀를 마차 앞으로 이끈 펠릭스는 그녀가 마차에 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뒤따라 올라탔다.

    ‘북부는, 여전히 겨울이구나.’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감회가 새로웠다.

    엘리아를 실은 마차가 대공 성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넘어섰다.

    성은 조금씩 흩날리는 눈발에도 견고하게 제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제레미.’

    곧 성에 도착할 텐데도 엘리아는 제레미를 빨리 보고 싶어 애가 탔다.

    성문을 지나 들어서니 저택 앞에는 하인들과 기사들이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내려 가까이 다가서니 모두 감격의 겨워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마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그녀도 그들을 보며 기쁜 마음을 전했지만, 제레미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어, 제레미가, 없네?’

    가장 먼저 반겨주리라 생각했는데. 제레미는 그곳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마님.”

    앤드류가 단정하게 인사를 올리자, 뒤에 서 있던 사용인들 모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숨은 게 아닐까, 너무 늦게 돌아와서 미운털이 박혔나.

    “……제레미는요?”

    아무리 둘러봐도 제레미의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저, 그게…… 아프십니다.”

    “네?”

    “열흘째 열이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주치의가 진단하기로는 이능 때문이라고 합니다. 열만 내리면 문제는 없다고 하는데……. 다만, 발현 시기가 너무나 일러서 잘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열셋이 되자마자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니, 제레미에게 이능이 있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발현하다니. 이런 상황은 이전에는 없었던 터라 몹시 불안했다.

    “……제, 제레미에게 가봐야겠어요.”

    엘리아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펠릭스 역시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프다니,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손이 벌벌 떨렸다. 퍼덕이는 심장에 금세 숨이 찼다.

    “엘리아.”

    덥석, 펠릭스가 손목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잿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당신, 지금 너무 떨고 있어. 알아?”

    “……제레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엘리아는 곧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강해, 엘리아. 날 믿어.”

    그의 흔들림 없는 표정이 엘리아를 조금이나마 진정시켰다.

    ‘이런 나약한 마음으론 아픈 제레미만 더 불안해질 거야.’

    “네. 고마워요.”

    엘리아는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고 그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가 움켜쥔 손을 부드럽게 다시 감싸며 제레미의 방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괜찮을 것이다, 엘리아가 아는 제레미는 누구보다 강한 아이였으니까.

    * * *

    “아파, 아파, 흐윽, ……님.”

    제레미는 커다란 얼음을 안고 자는 것처럼 추웠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온몸의 냉기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한참 이름을 외쳐 부르다가 지쳐서 속으로 작게 되뇌기만 했다.

    ‘엘리아 님.’

    심장이 꽝꽝 얼어붙은 것처럼 아팠다. 아프고, 또 아파서, 누군가 꼭 안아주고 다독여 줬으면 했다.

    “제레미…….”

    또 루시의 목소리를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어머니가 돌아온 것일까.

    제레미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침대맡에 앉은 여리여리한 인영이 보였다. 반짝이는 금발과 근심 어린 푸른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렇게 목 놓아 외치던 엘리아였다.

    “나, 나아, 아파요…….”

    “우리 제레미, 아프면 안 되는데. 내가 일찍 못 와서 미안해.”

    새하얀 손가락이 부드럽게 제레미의 창백한 이마와 볼을 쓸었다.

    그 손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제레미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엘리아 님…….”

    “그래, 제레미. 나 여깄어.”

    “자, 잘못, 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제레미.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놀러 가자고, 떼써서…….”

    연신 이마와 볼을 쓸어주던 손길이 멈추었다.

    제레미는 다시 눈을 떴다. 혹시나 꿈은 아닐까, 겁이 났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새빨간 눈가와 코끝, 그 위로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입술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울지 마세요.’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누군가 막아버린 것처럼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후우.”

    엘리아는 눈물을 멈추려 애쓰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제레미, 나는, 나는 제레미 엄마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제레미가 떼를 쓰는 건, 내겐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란다.”

    엘리아가 자장가를 들려주듯 다정한 목소리로 제레미를 위로해 주었다.

    “…….”

    “그러니까, 얼른 나아서 또 떼를 쓰면 좋겠어. 몇 번이고 괜찮으니까.”

    부드러운 손이 아랫배를 다독여 주니, 점점 몸에 힘이 풀렸다.

    온몸을 짓누르던 냉기도 서서히 빠져나갔다.

    ‘엘리아 님이 매일 옆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분명 눈을 감았는데, 제레미는 빛처럼 퍼지는 초록의 색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밤새도록 누군가 제 옆을 지켜주는 느낌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제레미 다 나았어요. 봐요!”

    엘리아는 침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는 제레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걱정과 다르게 아이는 금세 상태가 좋아졌다.

    “제레미가 다 나았으니, 오늘 하루는 함께 놀까?”

    엘리아의 제안에 아이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다가도 결국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보자, 뭘 하고 놀면 좋으려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엘리아는 유심히 제레미의 반응을 살폈다. 아이는 한껏 기대감에 들떠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좋아. 아직은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함께 차를 마시며 놀까?”

    “……에이, 그게 뭐야.”

    “음, 그럼 책 읽기?”

    “시시해.”

    “어어? 시시하다고?”

    엘리아는 과장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레미가 그렇담 하는 수 없지. 일하러 가야겠다.”

    꾸욱.

    뒤돌아 가려고 하니, 뒤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는 힘이 느껴졌다. 엘리아는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시시하다며.”

    “……시, 시시한데.”

    “응, 그런데?”

    엘리아는 참을성 있게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제레미는 아랫입술을 쭉 앞으로 내밀더니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치켜떴다.

    “안 시시해, 안 시시해!! 엘리아 님이랑 같이 있을 거야!”

    제레미는 그렇게 소리를 치곤 두 팔을 뻗어 엘리아의 허리에 달랑, 매달렸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제레미의 행동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레미는 얼굴을 폭, 그녀의 드레스 위에 파묻은 채 비비적거렸다.

    아이를 살짝 떼어낸 엘리아는 다시 의자에 앉자마자 제레미의 통통한 볼살에 촉, 입을 맞췄다. 놀란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레미, 앞으로도 이렇게만 어리광 부려줄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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