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07)
  • “아이참, 진정 좀 하세요. 아버지, 어머니. 언니도 그래,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왜 이리 날카롭게 받아들여.”

    천박하다니, 엘리아는 자신이 무슨 면박을 들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북부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조차 받지 못한 사랑을 준 건, 바로 북부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세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엘리아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세레나 연기는 그만해. 이런 연기도 이젠 지겹지 않니?”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연기라니. 내 진심을 몰라주는 거야?”

    애처로운 표정으로 엘리아를 바라보던 세레나는 급기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 못돼먹은 년. 저것 좀 봐요, 여보! 동생이 우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정없이 구겨진 얼굴로 후작 부인은 엘리아를 질책했다. 그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쉰 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 부부에게 다가섰다.

    “키워주신 은혜에 참 감사드립니다, 그 감사한 어머니께선 제가 이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구하기 힘들다는 멜라네시아 찻잎까지 가져다주셨죠.”

    “……!”

    “아, 멜라네시아 찻잎이 불법이란 사실은 알고 계셨겠죠?”

    고래고래 소리치던 후작 부인이 낯빛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세레나도 마찬가지였다.

    후작은 사색이 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더니 엘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 엘리아. 지금 그걸로 우릴 협박이라도 하는 게냐? 감히? 네까짓 게?”

    후작이 날카롭게 벼린 목소리로 소리치자, 후작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어차피 여기에 내 편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

    어릴 적에도 후작은 엘리아를 볼 때마다 마땅치 않다는 듯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 어린 나이에 후작 부인에게 뺨을 얻어맞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심한 눈길과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던 차디찬 목소리.

    이곳에 엘리아의 자리는 없었다. 과거로 돌아와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거 아세요? 얼어붙은 땅이라 불리는 북부보다, 저는 이곳이 더 추워요. 그러니 제발, 다시는 저를 부르지 마세요, 아버지.”

    후작이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탁!

    루카스가 재빠르게 후작의 손을 붙잡아 저지했다.

    “그만하십시오. 대공비 전하십니다. 오늘의 무례한 언행, 대공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북부 기사 따위가 감히, 감히 날 협박해?! 뭣들 하고 있어! 기사를 불러와!!”

    후작의 노기에 후작가 기사 두어 명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 루카스에게 검을 들이댔다.

    “아버지!”

    엘리아가 경악하여 소리쳤지만, 후작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옆에 선 루카스가 잠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이 정도로 저를, 북부의 기사단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루카스의 말을 다 듣고 있었는지, 네 명의 북부 기사단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훠이, 훠이 비키십시오!”

    커다란 덩치와 압도적인 분위기에 경직된 후작 기사단과 달리 네 명은 느긋한 표정으로 들어와 날렵하게 엘리아 주위를 감쌌다.

    “그나저나 말썽 피우지 말라는 전하의 전언……? 아니, 마님! 고우신 얼굴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방긋방긋 웃던 데니스가 엘리아를 보더니, 분노하며 씩씩거렸다.

    “……대장, 대체 누굽니까! 마님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싹 다 베어버리려니까요!”

    살기가 넘실대는 데니스의 호통에 후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곤 기사단 뒤로 슬쩍 뒷걸음질 쳤다.

    “대장 아니고 단장,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라. 비 전하께서 곤란해하신다.”

    후작의 손을 놓은 루카스 역시 검을 들며 중얼거렸다. 후작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이, 이놈들을 당장에 무릎 꿇려라! 제아무리 전하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이런 무례는 참아줄 수가 없지! 쯧쯧.”

    후작의 호통에 기사들이 점점 거리를 좁히긴 했으나, 이미 북부 기사단의 덩치와 기에 눌려 겁을 먹은 듯 주춤거렸다.

    “뭘 꾸물거려!”

    후작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점점 거리는 가까워지나, 섣불리 덤비질 않는 묘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루카스 옆에 선 데니스는 검을 든 손을 내린 채 따분하다는 듯이 하품을 했다.

    “……올 거야, 말 거야, 하나만 하지이.”

    그의 말에 후작저 기사 한 명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챙! 쾅! 쿵!

    좁은 식당에서 뜻하지 않게 칼이 맞부딪혔다. 데니스의 일격에 기사는 검을 떨어뜨린 채 바닥에 엎어졌다. 데니스가 곧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너야? 마님을 저렇게 만든 사람?”

    “……저놈이겠냐? 데니스 이 멍청한 놈아!”

    “아잇, 멍청이라니요! 어쨌든 위협했으니 죽여도 되겠죠?”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데니스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 눈을 보며 씩 웃은 데니스가 툭툭 장난하듯 기절한 기사를 건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내부가 고요해졌다.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세레나는 데니스의 발언에 경악하며 숨을 죽였다.

    데니스가 검을 들어 올려 기사의 목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다들 그만!!”

    쏴아아아, 콰광!

    엘리아가 두 손을 꽉 쥔 채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비가 억수와 같이 쏟아졌다. 식당에 난 커다란 창 너머로 불빛이 번쩍이더니 천둥이 몰아쳤다.

    *** “아, 아니 이게 무슨……!”

    모두가 당황해 얼어붙었다.

    “설마, 설마 이, 이걸 네가 한 거냐?”

    후작이 말까지 더듬거리며 바깥을 바라보다가 엘리아의 푸른빛이 흐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에 검을 들고 있던 루카스도 살짝 자세가 흐트러진 채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끝끝내 제게 다정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유일한 혈육이라고 전 아버지가 싫지 않았어요. 절 배척했던 모든 행동이 부정을 저질렀던 아버지가 스스로를 벌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요.”

    “너!”

    “하지만, 저의 착각이었어요. 당신은 단 한 번도 나를 딸로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당신? 이 미친…….”

    “그만!”

    콰과광!! 와장창!

    엘리아의 뒤로 번개가 번쩍했다. 그리고 그 번개가 저택 가까이 있던 나무를 내리쳤는지, 식당의 창을 뚫고 검게 타버린 나무가 내부로 침범했다.

    ‘이,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우연찮은 상황에 덩달아 놀란 엘리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에 연신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저를 위협해서 갈취하려는 생각은 접으세요. 대공님 도움 없이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충분하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엘리아는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 상황에 잠시 말을 잃고 있던 북부 기사단도 허리춤에 검을 집어넣으며 엉거주춤 그녀를 따라나섰다.

    뒤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유리에게 짐을 가져오라고 전하렴.”

    “네, 네. 그러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엘리아는 뻐득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식당 문 앞에서 대기하던 하녀에게 명령했다.

    “우와! 정말 그거, 마님께서 하셨어요오?!”

    데니스는 그녀가 갑자기 신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듯 존경의 눈빛을 마구 쏘아 보냈다.

    “으응? 흐흠, 그렇지.”

    엘리아는 그 눈빛을 피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마님, 마니이임! 아이고 이 꼴이 이게 뭐람!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엘리아의 얼굴을 보곤 커다란 짐 가방을 떨어뜨린 채 우당탕, 계단에서 내려온 유리가 두 손을 꼭 모아 물었다.

    “유리, 나중에, 나중에 설명해 줄게.”

    “감히, 마님을 누가…….”

    유리가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뒤따르고 있는 기사들을 쏘아보았다.

    “다들 뭐 하시느라 마님을 이렇게…….”

    유리의 비난은 기사들에게 향했다. 그 소리에 기사들도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유리, 그만, 일단 가자.”

    엘리아가 밖으로 나오자 흐렸던 하늘이 다시 푸르게 맑아져 땅 위로 태양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마차에 오르려던 그녀는 멈칫 동작을 멈추었다.

    “……황성으로 가시지요. 대공 전하께서 오늘 이곳으로 오실 예정이었으나, 비 전하를 황성으로 모신다고 전하겠습니다.”

    루카스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대공님이요?”

    “네. 후작저에서 비 전하와 함께 가족분들을 만날 계획이셨습니다.”

    “……그래요. 그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엘리아는 호들갑 떨며 울먹이는 유리와 함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님, 고운 얼굴에 이게 무슨 일이래요? 이리 좀 와보셔요. 약 좀 발라 드릴게요.”

    엘리아는 속상해하는 유리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주었다.

    “응. 고맙구나.”

    유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에이, 나쁜 사람들.”

    유리는 자꾸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궁시렁궁시렁 지켜주지 못한 기사들에 대한 욕도 빼지 않고 하고 있었다.

    “덩치만 멀대같이들 커서 다 쓸데없네. 쓸데없어.”

    그 소리가 마차 밖 마부석 옆의 기사에게까지 들렸는지 민망해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내 옆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네.“

    엘리아는 그녀를 대신해 화를 내고 있는 유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여러 일이 있어서 그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잠시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려 보던 엘리아가 몸을 살짝 뒤로 뉘었다.

    ‘펠,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 긴 하루였어. 피곤하다, 유리…….”

    “……좀 주무셔요. 도착하면 깨워 드릴게요.”

    엘리아는 정성스러운 유리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지친 건지 마차의 움직임과 함께 서서히 의식이 멀어졌다.

    * * *

    “그래. 체이스에게 듣기론, 아르네스 후작의 장녀가 이능 보유자라던데?”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발현되어 미처 황실에 신고할 새가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황제가 시종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펠릭스를 얼굴을 훑었다.

    “……네, 폐하.”

    “듣기론 꽤 출중하다던데 제국에 능력을 헌신할 마음은 없고? 비록 결혼했으나 아카데미에는 가야 하지 않겠느냐.”

    “폐하, 물론 아카데미에 가 제국을 위해 헌신하면 좋겠지만, 원체 몸이 약해서 이능 사용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거기다 몸속 마나의 양조차 미미하여…….”

    “쯧, 됐다. 하긴 네가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리 없지. 내 알아서 할 테니, 가거라.”

    황제가 손을 휘휘 내젓자 펠릭스는 인사를 올리곤 뒤돌아섰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라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체이스 로이드가 황제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이능을 잃은 뒤 이능 보유자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곤 했다.

    ‘일이 꽤 골치 아파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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