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07)
  • 후작은 예전과 다름없이 꼿꼿하게 등허리를 세운 채 표정이 없었고, 세레나는 한 손을 흔들며 엘리아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언니!”

    세레나가 엘리아의 두 손을 꼭 움켜쥐며 커다란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엘리아는 예상치 못한 환대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언니! 정말 보고 싶었어. 저번에는 내가 정말 미안해.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결혼에 예민했을 텐데, 내가 참 철없이 굴었지?”

    “…….”

    눈물까지 글썽이는 세레나를 보며 엘리아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의중이 뭘까, 힐끗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으나 자신만 보면 욕하기 바빴던 입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제 와 대공비 대접이라도 하려는 걸까.’

    북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환대를 받아 다행스럽긴 했으나, 그 의도가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오거라, 엘리아.”

    “……네,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세레나.”

    8개월 만에 가족을 만났으니, 감격스러울 만한 상황이겠지만 엘리아는 전혀 아니었다.

    “그래. 오는 길이 고단했을 텐데, 식사는 미리 준비해 뒀단다.”

    후작 부인이 안내하듯 저택을 향해 손짓했다. 불편한 기류 속에 엘리아는 후작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세레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환한 미소로 엘리아와 팔짱을 낀 채 걸었다.

    “언니 이렇게 호위 기사도 많고, 전속 하녀도 있으니 아무리 척박한 북부여도 살 만한가 봐? 언니가 거기서 힘들게 살까 봐 걱정했는데, 참 다행이야!”

    “……내가 그리 걱정됐으면 편지라도 쓰지 그랬니?”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던 엘리아는 쉽게 떼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뱉어내듯 한마디를 했다.

    “……으응, 그게 내가 좀 바빠서 정신이 없었네. 나도 곧 결혼해야 할 나이잖아. 언니처럼 좋은 남편감을 찾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그래, 그렇겠지.”

    이맘때쯤 세레나는 후작 부인과 함께 온갖 연회와 무도회를 누비고 다녔다고 들었다.

    그리고 후보를 고르고 골라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후에야 겨우 만족스러운 남편감을 찾아 결혼했다고 했다.

    엘리아는 호위 기사단을 연신 힐끗거리는 세레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층 로비를 지나니, 식당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세레나가 들어가 앉았다.

    유리는 엘리아의 짐을 옮기기 위해 후작저 하녀에게 안내를 받았고, 호위 기사들은 식당 문 앞에서 대기했다.

    후작저의 시종장은 후작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섰다.

    “어서 앉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간 엘리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세레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다 같이 하는 식사는 또 처음이네.’

    자조 섞인 웃음이 터지려는 찰나 후작 부인의 따가운 눈총을 느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욕설을 참아내는 얼굴이었다.

    그 옆에 자리한 세레나는 눈웃음치며 엘리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후후, 아! 맞다. 언니 그거 알아? 오늘 이 자리, 언니의 이능 발현을 축하하는 자리야. 어때? 북부 만찬이 좀 더 근사하려나?”

    세레나의 말에 엘리아는 식탁 밑에 맞잡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서 불렀구나. 내가 이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아르네스 후작은 항상 황실에 줄을 대고 싶어 했지만, 작위에 맞는 인맥도 부도 없었기에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그 수단이 될 무언갈 찾은 기분이겠지. 그러니, 끝까지 나를 이용하고 싶을 테고.’

    식탁 위에는 화려한 촛대와 함께 갖가지의 육류, 채소, 희귀한 과일들까지 올려져 있었다.

    엘리아가 이곳을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먹지도, 보지도 못했던 음식들이었다.

    “흠흠.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아, 그게…….”

    “어허, 어서 식사부터 하자구나.”

    고개 숙여 살짝 입술을 삐죽이던 세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후작 부인의 못마땅한 시선도 계속 이어졌다.

    엘리아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드레스 자락만 꾸욱 움켜쥐었다.

    * * *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엘리아. 오랜만에 왔으니, 함께 차를 마시는 게 어떻겠니.”

    성대한 식사를 마치고, 엘리아가 방으로 가려던 때였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건 바로 후작 부인이었다.

    “…….”

    엘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후작이 내 이능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궁금하기는 하네.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는 봐야겠지.’

    하녀들이 테이블을 정리한 뒤 디저트와 차를 내오자 후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엘리아. 내일 황실에서 입을 드레스를 내주마.”

    “……아니에요. 아버지, 저도 여벌을 챙겨 왔습니다.”

    “쯧. 됐다. 북부에서 가져오는 드레스야, 뻔하지.”

    후작의 말에 엘리아는 찻잔 손잡이를 꾹 움켜쥐었다.

    “아버지. 북부는 지금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열린 축제 역시 성황을…….”

    “엘리아. 대공 전하와의 사이가 어떻니.”

    “네?”

    그녀의 말을 가로막은 후작이 대뜸 펠릭스를 입에 올렸다.

    ‘그래도 아버지께선 나를 걱정, 해주셨던 걸까?’

    기대도 못 했던 질문에 엘리아가 살짝 커진 눈동자를 깜빡거리더니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저흰 아무런 문제 없어요.”

    “……흐음. 그래도 북부에 오래 머물긴 힘들지 않겠느냐. 안 그래도 네가 몸이 약한 데다 전하의 아이까지 돌봐야 하니, 얼마나 삶이 고달프겠니.”

    “그렇지 않아요. 다들 저에게 잘해주고, 저도 남편과 아이 모두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미 북부에 정도 많이 들었고요.”

    엘리아의 말에 후작이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세레나는 옅은 갈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한 눈치였다.

    ‘왜, 저러지?’

    의아해하던 찰나, 잠시 뜸을 들이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황태자 저하께서 후작저에 다녀가셨다.”

    “그러, 셨군요.”

    황태자가 언급되자 엘리아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었다.

    “저하께 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참 무지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잠깐 정적이 일었다. 후작은 결심했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북부 생활을 이만 정리하거라.”

    “네? 그게 무슨…….”

    “네 특출난 능력을 황실에 바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더냐. 마침 황태자께서 너를 정부로 맞아줄 생각이 있다고 하시더구나.”

    “……!”

    엘리아는 할 말을 잃은 채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딸이 아닌 물건을 보는 것과 흡사한 눈빛이었다.

    “폐하와 저하께 네 가치를 증명하고 후작가의 명예를 드높여 주길 바란다.”

    “하…… 하하하하.”

    후작의 말을 듣자마자, 엘리아는 넋이 나간 듯 잠시 실소를 터뜨렸다.

    후작 부인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년이, 지금!”

    “부인, 앉으시오.”

    “저 웃는 꼴을 한번 보세요!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나. 어디서 저런 못난 애한테 이능이 발현되었는지……. 쯧쯧쯧.”

    “부인!”

    후작의 호통에 후작 부인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엘리아. 내 말뜻을 이해했겠지?”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는 결코 아버지의 눈빛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밑바닥까지 보여줘야만 했나? 나 역시, 당신 딸인데?’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올린 엘리아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표정이었다.

    *** “전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봐 주었다. 당신이 아는, 모진 말을 참아내던 허수아비 엘리아는 이제 없다고 눈빛으로 말해주었다.

    “……엘리아. 네가 아직 철이 덜 든 게지. 지금 가문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단다. 그러니 네가 집안을 위해…….”

    “저는 이제 엘리아 아르네스가 아니라, 엘리아 로이드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부르지 마세요.”

    “뭐야?”

    후작이 엘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흥분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레나는 당황한 눈치였고, 후작 부인은 연신 부채를 펄럭이며 혀를 찼다.

    할 말을 모두 끝낸 엘리아는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더는 후작가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끼이익, 쿵!

    순간, 뒤에서 의자가 거세게 넘어지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억센 손이 엘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억지로 몸이 돌려진 엘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바로 앞에 있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에 흰자위에는 붉은 핏줄이 돋아 있었다.

    짝-!

    순식간에 몸이 의자 옆 바닥으로 내팽개쳐 졌다.

    콰쾅!

    뺨이 얼얼해지고 혀끝으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흐트러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쾅쾅!

    “무슨 소립니까!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식사 중입니다. 북부의 기사들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큰 소리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기사단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들과 후작저 사용인들 사이에서 소란이 난 것 같았다.

    “대공비가 되고 나니 네가 뵈는 게 없지!”

    “…….”

    “왜 아랫것들이 널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래서 애비에게 이리 건방지게 굴어?”

    잠시 힐끗, 문 쪽을 바라보던 후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닥에 쓰러진 엘리아는 아직도 얼얼한 뺨을 짚으며 자꾸만 멍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하, 아버지. 저를 북부에 팔아넘긴 건, 바로 아버지예요. 그런데 이제 와 이혼하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소릴 가만히 듣고 있으라는 건가요?”

    “저 건방진 년,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회초리 가져와!”

    후작 부인이 후작 옆으로 다가와 엘리아를 내려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녀 한 명이 잔뜩 움츠린 몸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워? 하, 대체 누가 누굴……?”

    “뭐?”

    엘리아가 중얼거리자, 곧이어 후작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주먹을 움켜쥔 채 어금니를 으득, 갈며 나란히 서 있는 후작과 후작 부인을 노려보았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당신들은 날 키운 적 없어!!”

    난생처음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엘리아가 있는 힘껏 내지른 목청에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큰 소리가 나……. 비 전하!”

    엘리아의 목소리에 후작저 사용인들을 밀쳐낸 루카스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루카스는 쓰러져 있는 엘리아를 보더니 단숨에 뛰어들어 와 부축했다.

    “이게 무슨 무례냐! 뭣들 하고 있어! 이자를 내보내지 않고!!”

    후작이 노발대발 소리쳤다. 루카스는 뺨이 새빨갛게 부풀어 오르다 못해 입가에 피를 흘리는 엘리아의 얼굴을 보더니 이를 갈며 후작을 노려보았다.

    “……괜찮아요, 루카스.”

    “괜찮다고요? 8개월 만에 만난 가족한테 뺨을 맞고 괜찮은 사람도 있습니까?”

    단숨에 상황을 파악한 루카스의 기세에 후작이 움찔했다.

    “북부는 기사조차 천박하구나,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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