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07)
  • “당신도 알다시피 낮에, 그것도 바로그가 무리 지어서 다닐 리 없잖아요.”

    “고작 그것만으로?”

    “당신이 주머니를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바로그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걸 봤어요.”

    “…….”

    “물론 저도 확신은 없었지만, 이렇게 딱 맞아버렸네요.”

    ‘하, 이 여자가 진짜…….’

    바로그가 그녀에게 다가갈 때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위험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 엘리아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그녀를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휴, ……너무 위험했어.”

    펠릭스는 결국 한숨 섞인 한마디 외에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화났어요?”

    “…….”

    뒤따라온 엘리아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펠릭스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말했잖아요. 혼자는 싫다고.”

    바짝 따라붙은 엘리아가 그의 로브를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그를 살살 달래듯이 나긋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당신의 생각이 틀리기라도 했으면…….”

    펠릭스가 발길을 멈추고 억눌린 목소리를 냈다. 흔들리는 다리 중간,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모험을 하긴 했지만, 실패하더라도 당신이 저를 지켜줄 거라 믿었어요.”

    그를 향한 오롯한 믿음.

    그 시선에 펠릭스는 결국 화도 내지 못하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아.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

    하늘에선 또다시 눈발이 흩날렸다. 엘리아의 금발은 새하얀 눈송이와 맞닿으니 오히려 따뜻해 보였다.

    “하…… 이리 오라니까.”

    다시 한번 엘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풀려 버린 얼굴에 그녀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기자, 엘리아는 만면에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길게 느껴졌던 다리가 어느새 끝나 끝에 다다랐다. 수줍게 웃으며 손을 빼려는 엘리아의 손을 펠릭스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았다.

    “응?”

    그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헛기침을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야.”

    “아. 그렇네요.”

    꼭 잡은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수백의 나무 뒤, 판자로 된 집들이 띄엄띄엄 펼쳐져 있었다.

    모두 기술자의 도움은 조금도 없는 듯한 집들이었다. 외양은 투박했지만, 나름 추위와 강풍을 견뎌내는 걸 보니 많은 손길을 거친 끝에 만들어진 집일 터였다.

    “거칠지만, 아름다운 마을이네요. 아르티젠다워요.”

    엘리아는 북부만의 아름다움과 강한 생명력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녀의 반응에 펠릭스는 픽, 입꼬리를 올렸다.

    “듣고 보니 그렇군.”

    북부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마을을 펠릭스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 *

    엘리아는 펠릭스와 함께 판자로 이루어진 작은 집 문 앞에 섰다.

    “이봐, 레이놀즈 씨! 문 좀 열어보시게나! 응? 누가 왔는지 보면 깜짝 놀라 자빠질걸?”

    마을 입구에서 만난 나이 든 주민 한 명이 문을 두드리며 난감한 듯 혀를 찼다.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없나? 아이, 이 시간엔 꼭 집에 박혀서 안 나오는 사람들인데.”

    문 앞에 선 마을 주민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비치자, 뒤에 서 있던 엘리아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애쓰셨어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만 가보셔도 되세요.”

    “높디높으신 귀한 분들을 이런 차디찬 길바닥에 놓고 제가 어찌 마음 편히 갑니까! 자자. 우리 집으로 모시지요.”

    아니요, 하고 손사래를 칠 때쯤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레미보다 살짝 키가 큰 소녀였다.

    흑갈색 단발과 캐러멜 같은 연갈색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작은 다람쥐처럼 사뿐하게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휴고 아저씨. 이분들은 누구신데 우리 집 앞에 계세요?”

    아이는 올망졸망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고, 우리 샤미르가 왔구나! 어르신들은 다 어디 계시냐.”

    “강에 익사한 바로그 수십 마리가 동동 떠다닌다고 했더니 다들 구경 갔어요.”

    “으잉, 쯧쯧 그게 대공 전하께서 이곳에 납신 것보다 더 큰 일이라더냐?”

    휴고의 말에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당황한 듯, 아이는 우물쭈물 인사를 건넸다.

    “그래, 안녕? 우리는 아론 레이놀즈 씨를 만나러 왔단다.”

    엘리아의 말에 아이는 눈동자를 내리깔며 잠시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아, 아빠는 바로 얼마 전에 연구 때문에 이국으로 가셨어요.”

    “아이구야. 나한테 말도 없이 가셨어? 그 사람 그렇게 안 보였는데, 나 참.”

    “에, 아빠는 휴고 아저씨 별로 안 좋아하는데.”

    당황한 휴고가 헛기침하며 아이를 살짝 노려보았다.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하는 사람이 어딨니, 샤미르. 너는 애가 참 제 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나.”

    “그건 칭찬이죠, 아저씨?”

    휴고의 눈길도 모른 채 수줍게 고개 숙였던 아이는 아빠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휴고는 얼굴이 벌게진 채 말을 말아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샤미르도 왔고, 여기서 뭔 창피를 더 당할까 무서워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부디 몸 성히 돌아가십시요.”

    휴고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대공 부부에게 인사를 전했다. 펠릭스는 고개만 까딱였고, 엘리아는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아이는 휴고의 삐진 목소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어느샌가 덩그러니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아이는 코끝과 귓불이 살짝 붉어진 채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음, 10살쯤 되었니?”

    엘리아가 정적을 뚫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올해로 8살이요!”

    “어머나. 그런데 이렇게 똑부러진다고?”

    칭찬이 살짝 부끄러웠던 건지 아이는 눈동자를 또륵 굴리며 발로 눈밭을 살짝 헤집어놓았다.

    “아버지는 언제 오시지?”

    엘리아와 샤미르 사이에 펠릭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 올지 몰라요…….”

    아이는 고개를 들어 펠릭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혼자서 집을 보는 거니?”

    엘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아이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그때, 샤미르가 어느 한 곳을 응시하다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천천히 뒤로 돌자, 놀란 표정의 노부부가 허둥지둥 펠릭스와 엘리아를 향해 고개 숙였다.

    *** 엘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무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옆에 앉은 펠릭스도 별달리 말이 없었다.

    “이리 귀한 분께서 방문하셨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노부인이 머그잔 안에 차를 담아 내오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희가 갑자기 찾아온걸요.”

    “그나저나, 아론 그 녀석이 사고라도 친 겝니까. 어찌 이리 높으신 분들이 그 아이를 찾는지…….”

    샤미르의 할아버지 레이놀즈의 말에 엘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며 뜸을 들였다. 말을 해도 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이능에 관해 정보를 줄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

    때마침 펠릭스가 엘리아 대신 답했다.

    “…….”

    노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대, 대공 전하께선 이능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다 헛소문이었습니까?”

    “내가 아니라, 이쪽. 이능을 연구하고 싶다더군.”

    그가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며 눈짓으로 엘리아를 가리켰다. 세 쌍의 동그란 눈동자가 모두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했지만, 엘리아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미소 지었다.

    “아카데미까지 가고 싶진 않아서요. 조금의 도움만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그렇군요. 그것참. 아론이 없어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혹, 이능을 가진 사람의 답변도 괜찮은가요?”

    “물론 그래도 좋기는 한데.”

    레이놀즈가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아, 그럼 샤미르에게 물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샤미르? 이 아이요?”

    “네, 제 어미를 닮아 이능 보유자거든요.”

    “이 아이에게, 이능이요……?”

    “네. 또 아카데미 연구원 소속이었던 아론 옆에서 보고 들은 것도 많은 아이라, 더 도움이 될 겝니다.”

    엘리아와 펠릭스는 그 이야기에 의구심 느끼며 아이를 살피듯 바라보았다.

    너무 어린 아이였다. 곧 두 사람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리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천천히 다가온 샤미르가 뭔갈 보여주듯 덤덤히 손을 뻗었다.

    툭.

    엘리아의 손등 위로 아담한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순간, 샤미르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떠지면서 놀랍다는 듯이 입술마저 벌어졌다.

    “아, 아아…….”

    아이가 곧장 제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당황한 엘리아와 레이놀즈 부부가 아이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샤미르, 괜찮은 게냐? 샤미르!”

    “가, 갑자기 아이가 왜 이러는 거죠?”

    “……이 아이는 정보의 이능이 있어요. 그걸 보여주려고 했던 모양인데…….”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듯이 중얼거리던 레이놀즈 부인이 아이를 부축해 의자 위에 앉혔다. 샤미르는 넋이 나간 듯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정보의 이능……?’

    엘리아가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내 초점이 없던 아이의 눈꺼풀이 닫혔다.

    “샤미르, 얘야!”

    레이놀즈 부인이 연신 아이의 몸을 흔들었다. 옆에 있던 펠릭스가 샤미르의 심장 부근 가까이에 귀를 갖다 댔다.

    “기절한 것 같군…….”

    “아,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람. 샤미르!”

    펠릭스의 말에 사색이 된 노부인이 곧 쓰러질 듯 탄식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엘리아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마을에 의원은?”

    “마, 마침 머물러 계시는 분이 있어요. 불러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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