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 님!”
“응?”
“제레미, 멋져요?”
엘리아는 울컥하는 마음을 잠재우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멋져, 라는 말을 덧붙였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린 제레미는 헤실헤실 풀어진 입술을 숨기기 바빴다.
끼이익.
그런 제레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엘리아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문 틈새로 아이의 녹음 짙은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찡그리며 괴물 흉내를 내자 제레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다녀올게, 제레미.’
속으로 짧은 인사를 마치며, 제레미의 침실을 나섰다.
걸음을 서둘러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니, 1층에 있는 하녀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계단 사이 층계참에 검은 로브를 두른 사람과 유리가 서 있었다.
그는 유리의 목덜미 쪽에 서슬 퍼런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유리!’
놀란 마음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려던 엘리아가 잠시 멈칫했다.
‘우선 알려야 해…….’
나선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시간을 더 버는 것뿐이었다. 곧장 고개를 들어 2층에 난 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적이 침입했다고. 그에게, 펠릭스에게 알려야만 했다.
쏴아아-.
창밖에서 은은하게 빗소리가 들렸다.
이 날씨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펠릭스가 어서 눈치채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로브를 쓴 자가 날카로운 창을 유리에게 내리꽂으려는 순간이었다.
“멈추세요!”
엘리아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메아리쳤다.
로브를 두른 사람이 유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흐윽, 아, 마님! 오시면 안 돼요! 어서 피하세요!”
바닥에 내팽개쳐진 유리가 엘리아를 보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님…….”
“마님, 위험해요!”
계단 아래 있던 하녀들 역시 오지 말라고 연신 소리쳤다.
“저들을 놔주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스카디.”
엘리아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리 로브를 뒤집어쓰고 뒤돌아 있어도 그게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로브를 두른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과 전혀 다른 눈빛으로, 스카디가 엘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이드 부인께서는, 이렇게 눈치가 빠른 분이셨군요.”
스카디가 형형한 눈빛으로 엘리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이 홀로 여기 있다는 건 당신에게 불리한 상황이란 거겠죠?”
덜덜 떨리는 손끝을 애써 뒤로 숨기며 최대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됐네요. 소수의 인원만 몰래 빠져나오는 것도 애를 먹긴 했지요.”
“…….”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쨌든 잘됐네요. 빚을 갚는다고 했으니,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로이드 부인, 당신이 죽겠습니까.”
스카디는 단숨에 엘리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뾰족한 창끝이, 새하얀 목덜미에 닿았다.
“마님!”
1층에 있던 하녀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계단을 오르려 했다.
“나는 괜찮으니, 다들 움직이지 말아라.”
스카디는 검술에 특화된 바바리안이었다. 무술에 젬병인 하녀들이 달려들어 봤자 다치기만 할 터였다.
‘저항해서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는데, 꼼짝도 못 하겠어…….’
애써 침착한 척했으나 검은 기운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아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창을 내려놓으세요, 스카디. 함께 온 동료들을 다치게 하고 싶은 건가요? 이미 아르티젠 기사들이 모두를 포위했을 겁니다.”
엘리아가 최대한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내 사람들이 한낱 아르티젠 기사 따위에게 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 그 괴물 같은 놈만 없었다면, 이 바바리안이 질 리가 없지.”
이를 바득거리던 스카디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한낮의 태양처럼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 시간이 없습니다. 선택하세요.”
스카디의 창끝이 목덜미에 바짝 다가붙었다. 섬뜩한 냉기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무리를 이끄는 책임감이 어떤 건지, 제게도 알려주고 싶은 건가요. 스카디?”
“…….”
스카디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픽,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그래서, 로이드 부인의 대답은 무엇이죠?”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하다니, 엘리아는 두려움을 애써 숨기며 스카디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죽으면, 저들을 꼭 살려주세요.”
“흐윽, 마님, 마님! 안 돼요!”
유리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뭐, 그건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대답이 늦어진다면 전 지금 당장이라도 모두를 학살할 수 있습니다.”
입가에 그려진 미소와 상반되게 스카디의 눈빛은 단호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바짝바짝 목이 타고, 숨이 막혔다.
“……그렇군요.”
힘없는 대답과 함께 포기하듯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창으로 꿰뚫린 제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나마 제레미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제레미!’
문득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많이 사랑해 주고 싶었는데. 죽음보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가슴이 저려 왔다.
“유감입니다. 로이드 부인이, 꽤 마음에 들었거든요.”
스카디가 서서히 창을 들어 올렸다.
“꺄아악!”
곧이어 하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안 돼!!”
그리고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앳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퍼억!
곧이어 둔탁하게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눈을 뜬 엘리아가 앞을 바라보았다. 휘청이는 스카디와 1층 바닥으로 나가떨어진 제레미가 보였다. 아이는 검술 수업 때 사용하던 작은 목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제레미!”
스카디와 부딪히며 날아가 계단 모서리에 찢긴 건지, 아이의 이마 위로 피가 흘렀다.
“도, 도련님!”
“도련님!”
하녀들이 허둥지둥 계단 밑에서 발을 굴렀다.
“윽!”
아이는 비틀거리면서도 목검을 꽉 쥐고 몸을 일으켰다.
“엘리아 님, 괴롭히지 마!”
아이는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경계하며 소리쳤다.
“제레미! 제레미 안 돼. 안 돼!”
애가 타는 목소리로 계단을 뛰어가듯이 디뎌 아이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곧장 스카디가 엘리아 앞을 가로막고 섰다.
스카디의 다리 사이로 아이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와우! 아파라. 무슨 애 몸이 이렇게 돌덩이 같담. 하아. 그래도 직접 찾지 않아도 되고 좋네.”
스카디가 아이를 바라보며 계단을 성큼 내려갔다.
“안 돼! 약속했잖아, 나만 죽으면 모두를 살려주기로!”
“흐음, 아이는 별개죠. 제 아들 하나쯤 없어져야, 비명이 더 처절하지 않겠어요?”
엘리아를 등지고 선 채 중얼거리던 스카디는 아이에게 천천히 창을 들어 올렸다.
“안, 안 돼! 안 돼!”
캉!!
창과 목검이 맞부딪혔다. 제레미는 그동안의 훈련 덕분인지 스카디의 공격을 방어해 냈다.
“으윽……!”
아이의 억눌린 듯한 신음이 들렸다.
“호오, 나쁘지 않은 실력이네? 하지만 운이 나쁜걸. 상대를 잘못 만났구나. 꼬맹아.”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스카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그만하라고, 스카디의 로브를 붙잡았다.
퍽! 쿵!
격한 타격음과 함께 창이 아이의 목검을 걷어냈다. 동시에 작은 몸이 튕겨 나가 벽에 부딪히면서 나동그라졌다. 목검이 창끝에 부서져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제레미! 제레미!”
뛰듯이 계단을 내려온 엘리아가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는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쿨럭, 쿨럭, 엘리아 님……. 괴롭, 괴롭히지 마…….”
희미한 목소리 탓에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은 것인지 아이의 입가에 주르륵 피가 흘렀다.
“쉬, 착하지? 제레미. 다 괜찮아. 이젠 엄마가 지켜줄 거야.”
그녀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의 이마와 입가에 고인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뻗어 엘리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엘리아, 님……. 제레미, 멋, 져요?”
“응, 너무너무 멋지네, 우리 제레미…….”
희미하게 갈라진 아이의 목소리에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생명줄처럼 옷깃을 붙잡은 여린 손을 쥔 채 그 작은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지켜줘서 고마워, 제레미…….”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스카디가 바로 뒤까지 다가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를 두 팔로 꽉 감싸 안았다.
*** 울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