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07)
  • ‘갈까마귀…….’

    *** 북부에 새가 있을 리 없었다. 있다고는 해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철새뿐이었다.

    엘리아는 저 붉은 실이 묶인 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펠릭스가 피투성이로 바바리안의 침입을 막고 돌아온 날이었다.

    루카스는 치료받는 그의 앞으로 죽어버린 검은 새의 두 날갯죽지를 잡아 툭 던져놓았다. 그리고 곧장 허리를 숙였다.

    “바바리안의 전서구를 잡았습니다.”

    분명 갈까마귀라고 했고, 그 새의 다리에는 붉은 실타래가 묶여 있었다. 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자세한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검은 새는 북부의 불행을 상징했다.

    “그나저나,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됐는데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엘리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스카디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아……. 그게, 몸이 찌뿌둥해 조금 걷고 싶어서요.”

    ‘스카디가 바바리안이라니.’

    그녀의 과거도 모두 꾸며진 것이었을까. 스카디를 바라보는 엘리아의 입가가 잘게 떨렸다.

    “……그렇군요. 어쨌든, 어서 가요.”

    스카디가 엘리아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으며 말했다. 엘리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새가 날아간 방향을 힐끗, 바라보았다.

    검은 새는 멀리 날아가지 않고, 헐벗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펠릭스에게 서둘러서 알려야겠어. 그 역시 바바리안의 전서구를 알 테니까.’

    말없이 걷던 두 사람 앞으로 급한 걸음의 펠릭스가 다가왔다.

    “당신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오는 거지?”

    그녀를 찾고 있었는지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와서 놀랐나 보군요.”

    “당연하지 않나?”

    “죄송해요. 스카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서둘러 펠릭스의 팔을 붙잡은 엘리아는 슬쩍 뒤에 서 있는 스카디를 바라보았다.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했는데, 잊고 있었네요. 지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 제 개인적인 고민 상담을 하고 싶었는데. 대공 전하께서 오셨으니 다음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부인.”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스카디는 두 손을 흔들며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대화를 나누라며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져 갈 때쯤 엘리아는 펠릭스의 팔을 붙든 손을 뗐다.

    “펠! 마침 잘됐어요. 할 말이 있었는데.”

    엘리아는 그가 무어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주위를 여러 번 확인한 후에 숨을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검은 새를 봤어요.”

    “……뭐?”

    “새의 다리에 빨간 실타래가 있었어요.”

    “…….”

    펠릭스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바바리안의 전서구를, 봤다는 말이에요.”

    엘리아는 잠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을 꺼냈다.

    “바바리안의 전서구를 봤다고……?”

    “네. 분명 봤어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바바리안의 전서구 말이야.”

    “아……!”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눈을 깜박거리고 서 있었다.

    무어라 당장에 해줄 수 있는 말도, 둘러댈 이야기도 없었다.

    “그게, 그게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겨우겨우 입을 열어보아도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걸 그에게 말해도 될까 싶었다. 지금의 펠릭스가 그걸 순순히 믿어줄까, 오히려 시간만 질질 끌게 되는 게 아닐까.

    엘리아가 고민하는 사이, 펠릭스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럴 시간이 없군.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지.”

    그는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저었다.

    “네…….”

    엘리아는 그의 말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를 붙여줄 테니, 곧장 성으로 돌아가 기다리도록 해. 이곳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지.”

    “네. 무사히 돌아오세요.”

    엘리아의 눈가는 걱정으로 일렁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최대한 빨리 성으로 갈 테니.”

    “네. 저도 당신 믿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말고 돌아오세요.”

    “그래, 그러도록 하지. 당신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제 걱정은 마세요. 제레미도, 우리의 성도 꼭 지키며 기다릴게요.”

    엘리아는 어느 때보다 올곧은 눈빛으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여리지만 강인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분위기에 펠릭스는 잠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펠릭스는 그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저 가끔 엉뚱하지만 여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그녀의 모습에 펠릭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기서 기다려. 곧 루카스가 올 거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한시가 급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아를 바라보던 펠릭스가 뒤로 돌았다.

    수북하게 쌓인 눈과 꽃잎처럼 옅게 흩날리는 눈발, 그 아래 각기 다른 표정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 * *

    펠릭스의 지시로 루카스가 엘리아를 성까지 호위했다. 성 앞까지 당도한 그가 엘리아에게 묵례하고는 다시 말에 올라탔다.

    “잠깐만요! 루카스!”

    엘리아는 서둘러 루카스를 불러 세웠다. 푸르릉, 먼 길을 달려 성난 말이 고개를 저으며 눈을 털어댔다.

    “서둘러야 합니다.”

    “알아요! 아주 잠시면 돼요. 외부에서 또 다른 무리가 침입하면, 분명 마을을 먼저 헤집으려 들 거예요. 무조건 막아야 해요!”

    생각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에 놀란 루카스가 이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스카디가 아르티젠 성에 대해서도 말했었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만 했다. 엘리아가 발걸음을 서둘러 정원을 가로질렀다.

    “마님!”

    때마침 밖에 나와 있던 앤드류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홀로 돌아온 엘리아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앤드류, 지금 성을 호위하는 기사단이 얼마나 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앤드류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아는 걸음을 멈춰, 그를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다 호위를 위해 나가고 열댓 명 남아 있을 겁니다.”

    “기사들을 호출하세요. 다들 지금부터 성 안팎으로 외부 침입자가 없는지 살펴야 해요. 제레미는 자고 있나요?”

    “그보다 대체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앤드류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직 전달이 안 되었군요? 마르가리타 상단이, 바바리안이었어요.”

    “헉! 우려한 일이……. 네. 제레미 님은 지금 방에 계십니다.”

    앤드류의 얼굴은 사태의 급박함을 느꼈는지 순식간에 굳었다.

    “대공님께선 외부 세력을 처단하려 움직이고 계실 거예요. 우리는 성을 지켜야 해요.”

    “네, 지시대로 따르겠습니다.”

    앤드류는 한쪽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며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성으로 들어온 엘리아는 몇 번의 심호흡을 한 후, 2층으로 올라섰다.

    그녀의 딴에 가장 빠른 발걸음으로 제레미의 침실로 향했다.

    똑똑.

    노크 후 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늦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엘리아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제레미…….’

    조심스레 아이에게 다가가서 침대맡에 앉았다. 아이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슬쩍 포슬포슬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연분홍 머리카락은 사르륵 부드럽게 넘어갔다가 제자리를 찾으려 발버둥을 쳤다.

    아이를 깨워야 할까. 아니면 잠든 그대로 어딘가에 숨겨야 할까.

    지금쯤 펠릭스가 해란에 있는 바바리안을 모두 포박했으리라 믿고 싶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으응, 엘리아, 님?”

    고민하던 찰나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애써 부드럽게 미소를 띤 채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났니?”

    “언제 왔어요?”

    아이에게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바로 조금 전에 왔지.”

    후후, 웃으며 제레미의 머리카락을 연신 쓰다듬었다.

    “웅, 제레미가 마중 가려고 했는데!”

    벌떡 일어선 아이가 볼멘소리를 내며 툴툴거렸다. 안 그래도 홍조가 있는 통통한 볼이 한층 짙게 불그스름해졌다.

    제레미를 바라보며 고심하던 엘리아가 입을 열었다.

    “제레미. 우리, 놀이할까?”

    “……놀이요?”

    “응, 놀이.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는 놀이야. 씩씩하고 멋진 제레미는 당연히 해낼 수 있겠지?”

    다소 과장된 엘리아의 말에 잠이 덜 깨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아이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네! 제레미 할 수 있어요!”

    제레미는 멋지니까. 속삭이는 아이의 말에 엘리아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제레미에게 숨으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꺄아악!”

    바깥에서 사용인들의 비명이 들렸다. 잠시 멈칫한 엘리아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설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슨 일이지, 하고 두툼히 튀어나온 붉은 입술로 중얼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아는 얼른 제레미의 두 어깨를 붙잡고 웃어 보였다.

    “제레미.”

    “네?”

    “지금부터 놀이가 시작된 거야. 다들 우리 제레미 잡으려고 돌아다닐 텐데, 제레미는 뭘 해야 할까?”

    “수, 숨어야 해!”

    “그래. 어디 숨을까?”

    제레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오도도, 벽장 문을 열었다. 아직 팔다리가 짧아 발꿈치를 들어야만 겨우 벽장 손잡이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아이가 엉망으로 옷가지를 헤치고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리곤 슬며시 옷 틈새를 열어 빼꼼히 엘리아를 내다보았다.

    *** “어, 어때요? 제레미 안 보여요?”

    엘리아는 잘게 웃음 지은 뒤 제레미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제레미. 지금부터 여기 숨어서 절대 나오면 안 돼. 그러면 그땐 제레미가 술래가 되는 거야. 알았니?”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제레미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준 엘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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