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07)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도 제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 부인.”

딱딱하게 일관하는 그의 태도에 엘리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야기해 놨으니 생각은 하겠지…….’

수업에 참여할 때마다 이야기를 꺼냈지만 늘 조심스러웠다.

아이가 그녀의 손을 살짝 당겼다.

“……?”

“나쁘죠, 루카스?”

“으응?”

“데니스가 저래서 친구가 없는 거라고…….”

속삭이는 아이의 녹안이 반짝거리며 그녀를 주시했다. 엘리아는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위로해 주는 거니?”

“……아, 아니요!”

아이의 귓불이 불이 붙은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직 서툴러서 미안해, 엘리아는 씁쓸한 마음에 속으로나마 사과했다.

* * *

“항구 도시 해란에 머무는 기사들까지 전원 소집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그래, 가봐.”

루카스의 보고에 펠릭스가 서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루카스는 펠릭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인께서 며칠째 제레미 님의 수업 때마다 연무장에 머무시는 것, 혹시 알고 계십니까?”

“뭐?”

펠릭스는 서류에 고정하던 시선을 들어 올려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오실 때마다 간식거리를 들고 오는데, 명색이 기사란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루카스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쥐고 있던 서류를 와락 구겼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난처한 표정을 짓던 루카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연무장에 방문하신 뒤로 기사단 기강이 말이 아닙니다.”

“뭐?”

“지금도 연무장에 계시는데 제가…….”

펠릭스의 머릿속에 웃통을 벗어 던지고 훈련을 받았던 기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탕!

펠릭스가 서류를 세게 내려놓는 바람에 루카스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곳에 갔단 말인가?

“괜, 찮으십니까?”

“…….”

루카스의 물음에도 침묵하던 그가 하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어디 가십니까?”

“연무장.”

펠릭스는 루카스를 돌아보지도 않고 휙, 나가 버렸다.

쾅!

“저 주군……?”

닫혀 버린 문에 잠시 벌어졌던 입을 다물면서 루카스는 황급히 펠릭스를 따라나섰다.

다시 한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서 책상 위에 아슬아슬 쌓여 있던 종이들이 후두둑,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 * *

쿵쿵, 펠릭스의 걸음이 북부 성 바닥을 울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군…….’

그는 벌컥,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쇠문을 열어젖혔다.

“하……!”

그는 시야에 처음 들어온 광경에 눈을 찌푸렸다.

*** 엘리아는 하녀와 함께 기사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기사들은 힐끔힐끔 엘리아를 흘겨보며 귓불을 붉혔다. 그들은 모두 웃통을 벗은 채 오랜 연마 끝에 자리 잡은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몇 놈들은 숙녀를 처음 마주한 소년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엘리아와 하녀 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늘 상의를 벗고 훈련하는 기사단의 모습은 펠릭스에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 앞에 엘리아가 서 있으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엘리아는 이 상황이 이미 적응된 듯 그들과 시선을 맞추며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뚜벅, 뚜벅.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그들과 거리가 좁혀졌다.

엘리아가 제일 먼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발견했다.

“……펠?”

“당신, 나 좀 보지.”

펠릭스의 말에 그녀 역시 놀란 건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을 끔벅거렸다.

간식을 받고 있던 기사 놈들이 슬슬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엘리아 앞에서 헤벌쭉 웃으며 서 있던 기사들을 일일이 노려보며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아하하, 왜 갑자기 이렇게 덥냐.”

가까이 있던 기사 하나가 식은땀을 닦으며 후다닥 도망갔다.

“어허흠.”

그의 동료들도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리듯 먼 허공을 바라보며 그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여자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며, 연무장 구석으로 향했다.

“어어? 자, 잠깐만요…….”

뒤에서 엘리아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걸 들어줄 정도로 너그러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연무장에 들락거리는 거지? 사내들이 헐벗고 있는 걸 꼭 봐야만 하나?”

여자를 구석으로 몰아붙인 그가 깊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엘리아가 의문 섞인 말투로 물었다. 진심으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는 소리야.”

솟구치는 화를 내리누른 펠릭스가 엘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야, 당연히 아이의 수업 때문이죠. 검술 수업이 제레미에게 버겁게 진행되는 것 같아 참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건 귀족 아이들 대부분이 견뎌야 할 숙제요.”

“……맙소사, 펠. 이런 걸 견딜 수 있는 귀족 아이들은 없어요.”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뭐?”

“지금 연무장은 너무 추워요. 눈만 오지 않을 뿐, 바깥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레미 대련 상대가 문제예요. 장성한 기사와 아직 어린아이가 어떻게 동등하게 검을 나눌 수 있겠어요.”

여자의 침착하고, 차분한 설명을 듣던 그의 얼굴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왜 그렇게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 행동은 지나치군.”

“…….”

엘리아는 펠릭스의 말에 양쪽 눈썹을 찌푸렸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 듯 붉고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그 입술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그가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전 대공 부인과 제레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나?”

펠릭스가 묻자 여자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를 이용했지.”

“네……?”

“당신도 그런 건가?”

“…….”

여자는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얼굴빛도 살짝 붉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면, 더는 참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당신은 참, 무례한 사람이군요.”

펠릭스는 엘리아의 말에 살짝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뭐?”

“아이 방에 한 번도 찾아오신 적 없잖아요. 검술 수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건지는 알고 있으세요?”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직접 보지 않으셨잖아요.”

“…….”

차마 뭐라 대응할 수 없었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항상 아이를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잦은 출정과 정무 때문이었다.

“고작 스물일곱에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아이에게도 조금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잖아요!”

“고작?”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러는 부인은, 올해로 스물하나이지 않나.”

마치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 여자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

그에 당황한 듯 여자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털썩.

누군가 바닥에 쓰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제레미 님!”

엘리아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웅성웅성.

펠릭스 역시 소란스러운 쪽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어느새 사색이 된 채 제레미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이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빠, 빨리, 의원! 의원 좀 불러줘요!”

여자의 가냘프면서 높은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부르는 것보다, 내가 데리고 가는 게 더 빠르겠어.”

그는 얼른 아이를 받아 들고,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대체, 이게…….’

생각보다 더 가벼운 아이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 * *

“허, 이것 참. 쓰러진 원인은 피로로 인한 것이나, 골격근이 심각하게 파열됐습니다.”

의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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