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07)
  • “하이고야, 도려니임. 이미 잔뜩 지치셨네. 제가 왼쪽이 약한 거는 이미 아시지요?”

    안쓰러운 듯 눈가를 찌푸린 데니스가 아이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제레미 역시 목검의 날을 살짝 기울여 방어 태세를 취했다.

    탕!

    두 목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연무장 안에 울렸다. 목검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엘리아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뜬 채 제레미를 바라봤다.

    탁, 탁, 탕!

    일정한 간격으로 목검이 맞부딪혔다. 아이 손에 있는 굳은살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련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체, 저게…….’

    검술에 대해 무지한 엘리아가 봐도 아이는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든 아이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고, 침착했다.

    타닥, 쿵.

    “제, 제레미!”

    엘리아가 소리치며 쓰러진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아이는 어깨를 연신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넘어졌는데도 끝까지 목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아이에게 다가가서도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아이가 스프링처럼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게 학습이라도 된 것처럼, 일어서서 작은 맹수처럼 싸웠다.

    ‘이게 5살 아이의 검술 실력이라고?’

    다만, 아이의 힘과 기사의 힘이 평등하지 못했다. 기사가 아무리 힘을 조절해도 압도적인 완력이 그대로 아이 몸에 전해질 터였다.

    “너무, 불합리해…….”

    엘리아는 이대로 제레미의 수업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업 방식에 대해 루카스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지금의 내 말을, 과연 그가 들을까?’

    그럴 리 없었다. 엘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수업 내내 생각에 잠겼다.

    검술 수업은 세 시간 만에 끝났다. 아이는 만신창이가 되어 다리를 절뚝거렸다.

    “……제레미. 업혀.”

    엘리아가 무릎을 굽히며 아이에게 등을 보였다. 아이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살피며 얼굴을 붉혔다.

    “아프잖아. 얼른 업히렴.”

    그녀는 몸을 들썩이며 얼른 업히라는 자세를 취했다.

    “시, 싫어요……!”

    한참 망설이는 아이의 몸짓이 느껴졌다.

    “힘들 땐, 도움을 받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니?”

    “…….”

    머뭇거리던 아이가 그제야 엘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럴 거면서, 귀엽다니까…….’

    잠시 웃음 짓던 엘리아는 주변 시선을 뒤로한 채 연무실 문을 열기 위해 낑낑거렸다.

    그때 뒤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시퍼런 힘줄이 불거져 있는 투박한 손이었다.

    “나가십시오.”

    문 쪽에 가깝게 있던 기사였다.

    “아, 고마워요.”

    엘리아의 감사 인사에 짧게 머리를 깎아 이마가 훤히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가, 감사는요, 뭘.”

    기사의 어색한 웃음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쇠문이 닫혔다.

    “……안 무거워요?”

    “그럼. 제레미 정도는 가볍지. 그런데, 수업이 너무 힘든 것 같아. 안 그러니?”

    “몰라요. ……아버지는 더 대단했대요.”

    “으음. 누가 그래?”

    “루카스가요.”

    “그랬구나.”

    엘리아는 복도를 걸으며, 아이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한동안 뒤에서 별말이 없었다.

    “……자꾸 아버지 이야기를 해요.”

    이윽고 제레미가 엘리아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 “난 제레미인데…….”

    “…….”

    아이의 마지막 말에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제레미. 너도 훗날, 아버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는데, 어린 너는 이런 마음도 가지고 있었구나.’

    “음, 그래서 힘들어도 아빠처럼 뛰어난 기사가 되고 싶어서 싫어도 좋다고 했구나.”

    “…….”

    아이의 머뭇거림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그런데 제레미 꼭 아빠와 같은 속도로 갈 필요는 없어. 너는 너의 속도가 있는 거야.”

    “……?”

    “내가 보기에는 제레미가 아빠보다 더 뛰어난 기사가 될 것 같거든.”

    “……정말요? 하지만 어떻게요?”

    “그건 말이야, 힘들 때는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어른들에게 정확하게 이야기해 줘야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야.”

    “치이, 루카스한텐 안 되는데…….”

    아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녀의 옷을 다시 한번 잡았다 놓았다.

    “정말? 하지만 루카스한테 힘들다고 한 번이라도 이야기한 적 있어?”

    “……없어요.”

    “그것 봐. 루카스는 제레미가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거야.”

    “정말요?”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엘리아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루카스도 제레미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야 제레미에게 맞는 훈련 방법을 생각하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거야.”

    “…….”

    “자신에게 맞는 훈련을 해야 실력도 더 쑥쑥 늘어나는 거란다.”

    고민에 빠진 듯 말이 없는 아이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업히는 거 처음이에요.”

    “자주 업어줄게.”

    엘리아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 *

    그날 이후 아이는 도망치지 않고 수업에 꼬박꼬박 들어갔다.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하라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이는 묵묵히 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아마 격려를 담은 엘리아의 따뜻한 눈빛 때문인 듯도 싶었다.

    그녀는 꾸준히 수업에 참관했다.

    아무리 루카스와 기사들이 불편하다는 눈치를 주어도, 엘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계속 그렇게 앉아 계실 겁니까? 방해됩니다. 두 분 모두! 나가주십시오.”

    참다못한 루카스가 엘리아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의 험악한 인상이 더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엘리아의 옆에 앉아 있던 앤드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진정시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저는 전하께서 부르신다는 말씀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러고 계시지 않아도, 금방 갈 겁니다!”

    엘리아의 방문으로 예민해진 루카스가 앤드류에게 버럭, 성질을 냈다.

    “아이고, 귀청 날아가겠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저들을 보십시오. 화가 안 나게 생겼나.”

    루카스는 혀를 쯧쯧, 차며 연무장 한편에 모여 있는 기사들을 흘겨보았다.

    “아아, 마님께서 간식거리를 가져오셨군요…….”

    한참 의아한 눈으로 기사단을 바라보던 앤드류가 눈길을 돌려 엘리아를 보았다.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북부를 위해서 싸우다가 전사하신 분들이었는데, 이렇게라도 감사를 전할 수 있어 다행이네.’

    함께 온 하녀들에게서 차와 쿠키를 전달받는 기사들은 다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해적 출신이라 마냥 거칠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격의 없이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은 보통 그 나이대 청년과도 같았다.

    “페니, 페니 양이라고 했나요? 감사합니다.”

    “하하하. 자네,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구만, 괜찮나?”

    “……닥치게.”

    다들 한곳에 뭉쳐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엘리아는 아직 20대의 혈기 왕성한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기사단 모두 처음과 다를 바 없이 하나같이 바지만 입은 모습이었다. 벌판처럼 드넓은 어깨와 두꺼운 팔뚝, 그 밑으로 탄탄하게 조여진 뱃가죽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펠릭스만큼이나 한 덩치 하는 사내들이었다. 펠릭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해사한 엘리아의 물음에 루카스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흡, 마님께선 아무 문제도 없으십니다. 이 깐깐한 사람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그 옆에 있던 앤드류가 대신 대답했다. 그를 노려보던 루카스가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하, 안 보이십니까? 다들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습니까, 지금.”

    생각만으로도 루카스는 혈압이 오르는지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사이에 제레미가 엘리아에게 다가와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녀는 웃으며 아이의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주었다.

    “기사들을 몰아세운다고 기강이 세워지나요?”

    무릎을 굽혀 아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루카스에게로 시선을 옮긴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그저, 아르티젠을 지켜주는 기사님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을 뿐이에요. 루카스도 이 순간을 조금 즐기시는 건 어떠세요?”

    “대공 부인. 이곳은 제 영역입니다. 훈련에 대해서 대체 무엇을 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루카스의 말에도 엘리아는 아이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주며 다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맞아요. 전 잘 몰라요.”

    엘리아의 당당한 태도에 당황한 듯 그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어요. 제레미가 왜 검술 수업을 피했는지 말이에요.”

    루카스는 말없이 제레미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샌가 땀이 식어서 그런지 아이가 추위에 굳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이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요. 어린아이가 쉬지도 못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견뎌내는 건 무척 힘든 일이기도 하고요.”

    엘리아는 아이 몸에 외투를 덮어주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기사에겐 어른과 아이의 구분 따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엘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루카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저는 루카스를 훌륭한 기사이자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니까, 제 생각을 강요하진 않을게요. 그저 제 말을 한 번만 깊이 생각해 주세요.”

    며칠 전 그녀가 찾아와 제레미의 훈련 강도를 조절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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