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07)

엘리아의 침착하고 다정한 모습에 모두가 입을 다물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멍하게 앉아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안전한 곳에 내려주었다.

“실례지만, 먼저 일어서 보겠습니다.”

엘리아는 아이의 손을 꼭 붙들고,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아이를 잘 보살펴 주세요.”

놀란 표정을 갈무리한 황태자가 너그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걸을 수 있겠어?”

“……에, 네.”

엘리아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아이를 데리고 방문을 나섰다.

“……화, 화났어요?”

“화나지 않았어. 제레미가 다칠까 봐 걱정한 거야.”

엘리아의 말에 아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왜요?”

아이는 고개를 든 채 엘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게 왜 중요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엘리아는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당연히 받아야 할 걱정과 보살핌이었지만, 아이는 오히려 어색해했다.

‘왜냐면, 왜냐면 제레미. 내가 너로 인해 구원받았거든.’

이전 삶의 나를 후회했다.

다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많이 사랑하고 사랑해 줄 것이다.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도록 아주아주 많이 사랑해 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엘리아는 조금 더 밝게 웃어 보였다.

“나는 제레미가 너무너무 좋거든, 그래서 더 친해지고 싶어.”

“음, 어디가 좋은데요??”

살짝 볼을 긁적이던 아이가 한 번 더 되물었다.

“콕, 집어서 하나만 말할 수가 없겠는데? 다 좋거든.”

“그, 그게 뭐야…….”

능청스럽게 대답해 주자, 아이가 얼굴을 붉혔다.

“그럼 우리 이제 갈까?”

엘리아가 내민 손을 보고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국엔 엘리아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손안으로 아이의 말랑말랑한 작은 손이 쏙 들어왔다.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돌린 아이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 * *

엘리아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젖은 아이의 옷을 벗겨내며 어딘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잠깐만, 제레미. 이게 대체 뭐니?”

“앗, 보지 마요!”

아이가 깜짝 놀란 듯 엘리아의 어깨를 밀치며 소리쳤다.

아이에 의해 밀려난 엘리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이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저기 상처와 멍 자국이 있었다.

아이는 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다소 가라앉은 듯한 엘리아의 목소리에 제레미는 어깨를 움찔하며 커다란 눈동자를 굴렸다.

“보, 보지 말라구 그랬자나여…….”

울먹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 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레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래도 제레미. 왜 이런 건지 나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대공의 유일한 후계자인 아이가 저렇게 학대받을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쏟아지는 혼란을 억누르며 엘리아가 침착하게 물었다.

아이는 손을 잡혀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뿌리치지는 않았다.

“검술 수업에서…….”

제레미는 작고 통통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혹시…… 맞은 거야?”

“아냐! 아니에요.”

“그럼 대체, 이 상처랑 멍 자국은 대체 뭐란 말이니.”

“몰라요. ……말 안 할래.”

아이는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런 아이의 반응에 속이 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더 물을수록 입을 다물 것 같았다.

엘리아가 살짝 한숨을 내쉬자, 아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좋아. 대신, 앞으로 검술 수업에 같이 가도 되겠니?”

“같이?”

“그래. 그리고 제레미.”

“……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가끔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줘도 괜찮단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들은 제레미의 마음을 알 수가 없거든.”

“…….”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는 거란다.”

엘리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레미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아이는 여전히 작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맞은 거 아니에요.”

“그래, 그렇구나. 세상에 누가 우리 제레미를 괴롭힐 수 있겠니.”

“누, 누가 우리 제레미예요!”

툴툴거리면서도 아이는 두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검술 수업은 싫지만, 좋아요.”

아이의 말에 엘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떨 때 싫고, 어떨 때 좋은데?”

“응…… 몰라요.”

솜사탕 같은 분홍 머리가 갸우뚱거렸다.

“그러면 좋을 때는?”

“…….”

우물거리며 말하지 못하는 제레미를 엘리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꼭 끌어안았다.

“뭐, 뭐예요!”

“……그냥, 안아주고 싶어서.”

“됐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이는 엘리아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쥘 뿐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자.’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이내 제레미가 엘리아의 팔을 작은 손으로 툭툭 쳤다.

“숨, 숨 막혀!”

“어머, 미안. 괜찮니?”

엘리아가 급하게 팔을 풀었다. 그에 제레미는 토라진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으나, 미미하게 달아오른 뺨과 귓불은 그대로였다.

아이의 팔뚝 위에는 우수수 소름이 돋아 있었다.

“어머, 추운데 미안.”

순간, 엘리아는 너무 시간을 오래 지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 이제는 그만 씻고 잘까?”

“……네.”

대답하며 앞서 걷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나보다 더 커진다니…….’

엘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한편으론 검술 수업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 * *

제레미는 목욕을 마치고 피곤했는지 엘리아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한참 아이의 가슴팍을 도닥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엘리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도 겨우겨우 잠든 터였다.

‘누구지? 펠인가…….’

엘리아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사람이 서 있었다.

황태자였다.

“전하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대공 부인의 침실에 늦은 시간 방문하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네?”

“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아직 취침 전일 듯하여 편하게 왔습니다. 사적으로 저의 형수님이기도 하니 괜찮으시죠?”

그가 과장된 친근감으로 순진하게 물었다.

“……그렇죠. 네 괜찮습니다.”

엘리아는 이 상황 자체가 불편했지만, 쉽게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보다 잠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시죠?

“……저 그게…….”

방으로 들어가겠다는 그의 이야기에 엘리아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뚜벅.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펠릭스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이런 형님께서 오시는군요.”

황태자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빠르게 얼굴을 바꾸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조금 천천히 오시지.”

그리곤 굳이 대공을 향해 무언가 감추듯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여긴 무슨 일이지?”

“하하, 아름다운 형수님이 궁금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황태자는 그를 향해 능청스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그 모습을 펠릭스는 잠시 말없이 응시하였다. 그의 존재감이 복도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에 등장한 펠릭스의 모습에 엘리아는 큰 안도감이 들었다.

“이 시간에?”

“가족인데 괜찮지 않습니까?”

황태자의 손이 자연스럽게 엘리아의 어깨에 닿았다. 그 순간 엘리아는 놀라 몸이 굳었다.

탁.

펠릭스가 황태자의 손을 걷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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