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07)
  • “다행이네요. 아! 숙녀를 앞에 두고,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로이드 부인.”

    황태자의 청회색 눈동자가 어느새 펠릭스 옆에 서 있는 엘리아에게 닿았다.

    엘리아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왜 이렇게 빤히 쳐다보시지……?’

    엘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흘리며 그 시선을 견뎌야만 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아아, 편하게 대하시면 됩니다. 제가 그리 어려운 사람은 아닙니다.”

    “네, 배려 감사드립니다.”

    남자의 말투나 행동은 정제되어 있으며, 산뜻했다.

    ‘이렇게 보면 괜찮은 분 같은데, 펠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지만, 엘리아는 애써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제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셨다니, 놀랍군요.”

    감탄하던 황태자는 엘리아를 향해 손을 달라는 듯 한쪽 손을 내밀었다.

    ‘황실도 아닌데, 굳이 손등 키스를…….’

    황태자가 엘리아의 손을 기다리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고심하던 엘리아가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황태자의 입술이 엘리아의 손등에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다. 그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인사는 이쯤 하도록 하고, 식당으로 가지.”

    펠릭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엘리아의 손목을 꼭 움켜쥔 채 뒤돌아 걸었다.

    돌아선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순 없었으나, 자신을 잡은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였다.

    엘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새하얗던 펠릭스의 목덜미가 살짝 불그스름했다.

    “잠, 잠시만. 대공님?”

    “……펠이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

    “아, 그랬죠. 펠. 조금만 천천히 걸어줘요. 너무 빨라요.”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전했다.

    유독 빨랐던 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 탓에 그녀는 널찍하고 딱딱한 등에 머리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앗!”

    짧게 샌 비명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나?”

    드디어 그의 얼굴이 보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혹시 화, 나셨어요?”

    “…….”

    엘리아의 물음에 그는 말없이 다시금 앞을 보고 걸었다. 붙잡은 손목은 여전히 놓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뒤에서 졸졸 따라가던 엘리아는 펠릭스가 속도를 맞춰주어 어느샌가 그의 옆에서 걷게 됐다.

    타다다닥!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제레미가 빠르게 엘리아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 너머로 다소 난처한 표정의 황태자와 집사가 보였다.

    “……왜 나만 두고 가요!”

    아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엘리아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이런, 제레미. 우리랑 함께 오고 싶었구나. 이리 오렴.”

    아이의 녹색 구슬 같은 눈동자 위로 물기가 서려 있었다.

    곧 쏟아질 것 같은 눈물에 당황해 두 팔을 벌렸다.

    하지만 아이는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제레미의 코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팔짱까지 끼고 토라진 아이를 보며 엘리아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어머나, 제레미가 많이 화가 나 같이 가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흥!”

    “지금이라도 같이 손잡고 걸어가고 싶었는데, 안 될까?”

    엘리아는 아이의 얼굴을 살짝 살피며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

    “싫은 거구나. 그럼 난 꼭 제레미와 같이 돌아가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대공님과 먼저 가야겠네.”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선 엘리아는 펠릭스의 팔 언저리를 살짝 붙잡고 걸어갔다.

    “잠깐 실례 좀 할게요.”

    “……?”

    그녀가 살짝 소곤거리자, 펠릭스는 잠시 엘리아를 쳐다보다 시선을 거뒀다. 괜스레 민망한 마음도 들었지만, 내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조금쯤 안도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엘리아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하하, 역시나.’

    예상하였기에 얼른 뒤돌아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레미 혹시 같이 가줄 거니?”

    놀란 듯 반기는 말에 아이는 토끼처럼 새하얗고 토실한 뺨을 부풀리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너무 고마워. 호호호.”

    엘리아는 즐거워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그녀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펠릭스의 입가에도 피식, 미소가 새겨졌다.

    셋은 함께 걸어갔다. 아이는 가운데에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걸으며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입꼬리가 하늘로 올라가려 하는 걸 억지로 참아냈다.

    ‘그나저나, 전하는……?’

    문득 머릿속에 황태자가 떠올랐다. 엘리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저 표정은…… 뭐지?’

    황태자는 웃는 건지, 아닌 건지 조금 전 보였던 호탕한 모습은 간데없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엘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안색을 달리 바꾸며 살짝 미소 지었다.

    ‘잘못, 봤나……?’

    엘리아는 아리송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보인 아이의 볼은 아직도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어 모두 식당에 들어섰다. 상석에 앉은 황태자는 여전히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시간에서도 별일 없었지. 나는 그이와 아이만 신경 쓰면 돼.’

    황태자에게로 향하는 불안한 감정을 펠릭스를 바라보며 쫓아냈다.

    “형님께서 이번에야말로 진짜 인연을 만나신 건 아닌가 싶습니다.”

    “…….”

    펠릭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사죄의 선물을 좀 챙겨 왔습니다.”

    “……수고스러운 짓을 했군.”

    “하하, 수고스럽다니요. 하나뿐인 동생이라 형님께서 이리도 각별히 생각해 주시네요.”

    “허…….”

    펠릭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기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황태자는 그런 반응에도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죠?”

    그는 엘리아를 향해 눈을 휘어 보이며 웃었다.

    그에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람인 거지……?’

    살아온 세월 동안, 꽤 여러 종류의 사람을 겪어 왔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중에서 가장,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보였다.

    * * *

    엘리아는 식사 내내 물만 들이켜며 펠릭스와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막 결혼하여 북부에 오신 탓에, 아직 이곳 지리를 잘 모르시죠?”

    “아무래도, 처음이니까요.”

    성 내부는 오랫동안 지내 대부분 잘 알지만, 외부는 달랐다. 그와 처음 결혼했을 때도 아르티젠을 돌아다녀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으니, 영 거짓은 아닌 셈이었다.

    “흐음. 형님께선 아무래도 바쁘시니, 괜찮다면 저와 돌아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

    황태자는 어색한 분위기에도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그런 그의 태도에 당황한 건 엘리아뿐이었다.

    ‘내가 황태자의 청을 마음대로 거절해도 되는 걸까.’

    선뜻 내키지 않아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살짝 펠릭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황태자에게 향한 시선만큼은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부인에게 관심이 지나치군. 체이스 로이드.”

    한참 서먹한 분위기에 펠릭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낮고 음산한 목소리에도 황태자는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앞에 앉아 있는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 “형님의 부인인데, 그만큼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요.”

    “…….”

    촤악, 쨍그랑.

    살짝 이 자리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찰나였다. 옆에서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앗……!”

    찻잔을 떨어뜨린 제레미가 놀랐는지 짧은 비명과 함께 작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괜찮니? 제레미, 가만히 있으렴.”

    “어…… 난 괜찮아요!”

    아이가 볼 언저리를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찻잔이 쏟아지며 아이의 하얀 셔츠와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었다.

    다행히 유리 파편이 튄 바닥에 아이 발이 닿지 않아서 베인 것 같지는 않았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 몇몇이 분주히 유리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엘리아는 일어나서 아이를 안아주려 했다.

    “괜찮다구요!”

    아이가 당황한 듯 엘리아의 손길을 거부했다.

    탁.

    그리곤 그 행동에 본인이 더 놀랐는지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제레…….”

    “제레미.”

    아이의 다소 버릇없는 행동에 펠릭스가 나서려는 순간, 엘리아가 제레미에게 조금 더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찻물이 아직 식지 않았잖니. 그리고 유리 파편 때문에 네가 다칠 수도 있어.”

    “…….”

    “도움이 필요하잖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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