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모처럼 얻은 자유 시간.
나는 성 한복판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아직 목적지는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카는 만나러 가지 못할 거고, 아르고는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니까.
그때 누군가 알은체하며 뒤에서 어깨를 톡 톡 두드려 왔다.
“누구?”
“여기에서 뭐 하십니까?”
“아르고!”
나는 반가움에 크게 이름을 외쳤다.
아르고가 간단히 묵례하고는 누구를 찾는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누구 찾아요?”
“라히트리안 님이 본성에 잡아 뒀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왜 혼자 계시는지.”
뭐야. 언제 그런 소문까지 났어?
내 흔들리는 동공에 아르고가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황녀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라히트리안 님께서 본성 밖으로 나오지를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
“아, 모르셨습니까?”
몰랐다. 전혀 몰랐어!
나는 짐짓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라히트리안의 계획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이래서는 주변 사람들까지 진짜라고 여길 것 같았다. 그 증거가 아르고였다.
“소문 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르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부정할수록 어쩐지 오해가 쌓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르고가 흥미를 느꼈는지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는 아예 작정하고 내 옆에서 보폭까지 맞추며 걷고 있었다.
“황녀님이 쓰러지신 날, 아트레시아 2황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아트레시아 제국으로 날려 버린 건 아시는지요?”
“……얌전히 보냈겠죠.”
“말이 그렇다는 거죠. 죽지 않았으니까.”
저 말이 더 무서웠다. 죽지는 않았다니.
아르고는 키득거리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아니카는 지금 서쪽 별궁에 있습니다.”
“들었어요. 상태는 어때요?”
“멀쩡하다던데요. 벌써 마력까지 다룰 수 있게 되었다니 별일 없으면 하루 이틀이면 털고 나올 거예요.”
아르고의 은회색빛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아니카도 결계가 깨질 줄은 몰랐던 거겠죠. 아트레시아 황자가 그걸 깨 버리는 바람에 다친 거고요.”
아니카가 객혈하기 직전에 들렸던 굉음이 결계가 깨지는 소리였나 보다.
그 후 단 몇 초 만에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성벽을 타고 창가로 들어왔으니 정말 순식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글로만 볼 때는 몰랐는데 몇 초 만에 땅에서 3층 높이의 성까지 올라올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 깨달았다.
세이어드가 내게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그래도 조금만 침착했으면 좋았을 텐데. 위기감을 느껴 바로 렘무트를 소환해 버린 것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그 마룡은 지금 잘 있습니다. 황녀님을 뵙고 싶어 하던데요.”
“저를요?”
“네. 계약이 성립됐으니 황녀님과 거래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얌전히 목줄도 차고 있는 걸 보면 확실해요.”
“내가 감옥에 가 봐도 돼요?”
지하 감옥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 번은 렘무트와 만나야 했다.
아르고가 생긋 웃었다.
“알려드리면 저 죽습니다.”
“…….”
“앞으로 라히트리안 님과 같이 계실 때는 저한테 말 걸지 말아 주세요. 오래오래 살고 싶거든요. 사실 지금도 혼자 계신 것 같아서 잠깐 온 거고요.”
노골적으로 너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였다.
……취급이 너무한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내가 입술을 비죽이자 아르고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도 아르고의 모습을 보니 괜찮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됐다.
라히트리안이 벌을 내렸다기에 우울하게 형벌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지하 감옥에서 렘무트를 감시하고 계약을 파기하는 일을 시켰다고 하니까.
물론 그가 한 말이 전부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아까 뼈저리게 깨달았기에 이제는 믿지 않았지만.
“아르고. 몸은 괜찮아요?”
“뭐가요?”
“라히트리안한테 벌 받았다면서요.”
“아. 황녀님께 드렸던 단도로 찔려 죽을 뻔했습니다.”
“…….”
“그래도 마지막에 라히트리안 님께서 봐주셔서 살았어요. 이카르센 제도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거든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가 미안해요. 무리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그래서 꼭 신성력을 받아낼 생각인데요.”
“…….”
“주셔야 합니다. 전 어쨌든 드렸어요.”
뺏긴 건 황녀님 사정이잖아요.
생략된 다음 말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겠지.
나도 다시 금단술이 새겨진 단검을 달라는 부탁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알겠어요. 걱정 말고 몸 조심해요.”
“저야…….”
내 걱정 어린 말에 당황스럽게 허공을 배회하던 은회색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앞가림은 하고 있어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그가 품 안에서 얇은 팔찌를 꺼냈다.
얼핏 보랏빛 보석 안에 그의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짧은 머리카락이 여러 가닥 담겨 있는 게 보였다.
“연락할 수 있는 통신구예요. 아니카나 제 이름을 부르면 연결되는 겁니다. 지금은 아니카도 갖고 있고요.”
“이걸 왜 저를 주세요?”
“그냥. 주는 건 제 마음이니까 황녀님도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아르고가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바로 팔찌를 버리면 어쩌나 곁눈질하고 있었다.
일단 주니까 받기는 하는데.
“……나중에 이 팔찌 값 배로 쳐서 받아내려는 거 아니죠?”
“하?”
울컥하며 황당하다는 듯 보던 아르고가 가 보겠다며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이 팔찌는 정말 그냥 주는 거라고?
멀어져 가는 아르고의 뒷모습을 보다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아니카에게도 연락할 수 있다니.
“솔직하지 못하기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아니카랑 연락할 수 있는 거라고 대놓고 말하면 되지.
나는 얼른 손목에 팔찌를 찼다.
“근데 라히트리안은 뭐 이렇게 소식이 느려?”
사람을 보내겠다더니. 묘하게 늦고 있었다. 원래 사절단을 맞이하는 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던가?
하지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리즈벳 황녀님.”
“누구세요?”
한쪽 눈을 가린 남자가 인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그는 인간이 아닌지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라히트리안이 부리는 사역마 중 하나는 그림자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바로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묘하게 보더니 고개를 기웃거렸으나 바로 표정을 지웠다.
“라히트리안 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 * *
사절단 중 대표로 온 로이드 윈저와 서번트 트리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전면 창으로 가득 드리워지는 햇빛에 다소 눈이 부셨지만 트리아 백작은 인상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다분히 노력해야 했다.
로이드는 사절단을 맞이하는 장소치고 과할 정도로 화려한 내부에 눈을 가늘게 떴다.
양국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타국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인데, 이런 환대라니.
“갑작스럽긴 하나,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방문을 환영하지.”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이렇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사실 환영 여부는 잘 모르겠군요.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그 사이 마력에 중독된 자가 꽤 많아서 말입니다.”
로이드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이카르센의 주인께서 모르셨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틀 동안 성문이 열리지 않아 너 때문에 실려 나간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뜻이었다.
이걸 빌미로 리즈벳을 데리고 돌아가기 위한 명분의 물꼬를 튼 것이기도 하고.
라히트리안은 반박하지 않고 계속 로이드가 하는 말을 듣겠다는 듯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로이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쾌함과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시일이 지체되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즈벳 황녀님을 모시고 가려 합니다.”
“그렇군.”
“아트레시아 2황자가 리즈벳 황녀님을 이곳에서 마주쳤다고 하니 증거도 확실하겠지요. 저희로서는 무척 황당합니다만. 분명 이카르센 제도에서는 리즈벳 황녀님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이드가 따갑게 쏘아붙이자 트리아 백작이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번에 황제 카로스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사절단의 주역은 트리아 백작, 본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이드가 그럴 틈을 내어 주지 않아 속이 들끓었다.
‘권력에는 관심 없는 척 고상한 척하더니, 윈저가 혈통 아니랄까 봐. 모든 공을 가로채려 하는군.’
트리아 백작이 급히 주먹을 쥐고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윈저 공자, 이렇게 구구절절 말할 이유가 없지요. 당장 황녀님을 데리고 오세요. 이카르센 제도는 황녀님을 납치한 죄로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 합당한 대가도 치러야 할 겁니다.”
“납치?”
라히트리안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납치라니, 그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튜니아트 신성 제국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그건……. 황녀님을 납치한 범인이 마법을 사용했다고 하니 당연히 이카르센 제도의 소행 아닙니까.”
“트리아 백작, 잠시 말을 멈추…….”
“이미 리즈벳 황녀님의 행방도 모른다고 잡아떼 놓고서는,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겁니까?!”
로이드가 이마를 짚었다.
의기양양하게 언성을 높인 트리아 백작이 탁한 에메랄드 눈동자를 빛내며 가슴을 폈다.
저 멍청한 작자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카르센 제도가 황녀를 납치한 탓이라며 화살을 돌려 버리다니.
로이드는 당장 트리아 백작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트레시아 2황자의 증언에 자신을 얻은 것 같았으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입장이 그렇다니 유감이로군.”
라히트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매끄럽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그 증거도 내놓을 수 있겠지.”
“증거는 그쪽에서 다 없애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라히트리안의 입꼬리가 일자로 내려왔다. 서늘한 자안이 트리아 백작을 응시했다.
온몸이 옥죄인 사냥감이 되어 버린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에 트리아 백작이 간헐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없다?”
“…….”
“지금 증거도 없는데 이카르센 제도에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건가?”
“…….”
“그럼 더더욱 황녀를 내어 줄 수 없겠군.”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로이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마치 이 순간을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해 보였다.
로이드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
‘트리아 백작이 입을 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군.’
이카르센 제도는 대륙의 은밀한 정보까지 손에 쥐고 있는 곳이었다.
사절단이 튜니아트 제국에서 출발하는 순간, 이미 그들의 신상이 모두 이카르센 제도로 향했을 것이다.
당연히 트리아 백작에 대한 것도 예외는 아닐 터.
트리아 백작은 윈저 가문의 방계가 아니었더라면 절대 백작위에 앉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나, 권력을 위해서라면 순식간에 머리를 굴릴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단, 그 수가 조금 멍청하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 사실을 이카르센 제도에서 모를 리 없었다.
“서번트 트리아.”
역시나. 라히트리안의 입에서 트리아 백작의 이름이 나왔다.
“그럼 지금 그대의 목을 잘라 튜니아트 신성 제국으로 보내면 되는 건가?”
로이드는 아찔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