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방으로 돌아가려 걸음을 옮기는데, 이안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멀찍이 서서 우리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는 잘만 달려와서 용건부터 꺼내더니 왜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색이 환해진 그가 빠르게 다가왔다.
“이안? 저쪽에서 뭐 하고 있던 거예요?”
“아……. 두 분 대화 끝나셨습니까?”
“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이안이 곤혹스럽게 내 눈치를 보다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라히트리안 님, 이제 그만 성문이라도 열어 주는 게 어떻습니까. 벌써 이틀째입니다.”
뭐가 이틀째라는 거지?
이안은 내 뒤에 숨어서 냅다 외쳤다.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사절단을 문전박대하는 것도 이제 한계라고요.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들어 보기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튜니아트 신성 제국의 사절단이라는 말에 몸이 경직됐다. 황제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니.
‘확실히 이틀 동안이나 성문을 개방하지 않은 거라면 문제가 크겠네.’
그리고 그걸 잘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다.
이안이 울먹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나를 방패로 삼은 이안은 어쩐지 든든한 아군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저기, 이안. 이렇게 한다고 한들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전 오히려 라히트리안의 결정을 환영하는 입장인데요.
그런 시선으로 이안을 바라봐 주고 있는데, 돌연 이안이 내 어깨를 살포시 잡고 아예 등 뒤로 고개까지 함께 숨어 버렸다.
덕분에 마치 이안이 하는 말이 내가 하는 것 같은 우스운 모양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라히트리안 님, 황녀님께서도 가족이 무척 보고 싶으실 거라고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셨잖아요.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가족?”
내가 의아하게 중얼거리자 이안이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듣기로는 윈저 공작 가문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아……! 설마 로이드 윈저예요?!”
나는 튀어 오르듯 라히트리안에게 물었다. 그리고 대답은 역시나 뒤에서 들려왔다.
“역시 황녀님도 가족과 만나고 싶으셨던 게 틀림없다고요! 그러니 이제 제발 사절단 좀 맞이하게 허락해 주세요, 라히트리안 님!”
로이드가 사절단으로 찾아왔다니.
황실 입장에서 보면 너무 당연한 결정이었지만, 이건 내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로이드는 유일하게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라히트리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어왔다.
“황녀는 그자를 만나고 싶나?”
“만나 보고 싶기는 하지만…… 라히트리안이 곤란하다면 무리해서 만나진 않아도 돼요.”
그 순간 이안이 벌떡 일어나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만나셔야죠. 가족인데요! 그렇지요?”
“……만나 볼까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나는 마지못해 넘어가는 척 이안의 주장에 동조했다.
또 황실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기도 했고, 지금이라면 로이드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마음 놓고 물어볼 기회였기에 놓치기 아까웠다.
라히트리안이 이안을 보며 생긋 웃었다.
“갈수록 잔머리 굴리는 게 늘어가는군.”
“과찬이십니다.”
“가서 원하는 대로 해, 이안.”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이안이 부리나케 모습을 감췄다. 곧 성문이 열리고 튜니아트 제국의 사절단이 입궁하겠지.
나는 이안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라히트리안을 흘겨보았다.
“전부 다 말했다면서요? 사절단이 왔다는 건 말 안 했잖아요. 그건 언제 말하려고 했어요? 사절단이 돌아가면?”
“황녀가 물어본 건 거의 다 말했으니까 전부 한 셈이지.”
“그럼 내가 물어보지 않은 건 평생 말할 생각이 없었구나. ……아니 잠깐만, 거의라니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요.”
나는 그냥 지나칠 뻔한 것을 놓치지 않고 콕 짚어 물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에 하마터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길 뻔했다.
“치사하게. 말해 줄 거면 다 해 주든가!”
“안 돼, 비밀이야. 그러다 황녀의 흥미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라히트리안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순간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나를 놀리려는 거였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보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스치듯 귓가에 속삭여 왔다.
“나는 시시해지고 싶지 않거든.”
“……네?”
“지금부터 나는 사절단을 맞이하러 가야 하니 황녀는 자유 시간을 즐기지 그래. 설마 사절단이 왔는데 사고를 치지는 않겠지.”
“…….”
“자리가 마련되면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나는 멍하게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라히트리안이 자리를 뜨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나는 혼란스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 *
“……로이드 님. 벌써 이틀째입니다. 이카르센에서 성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력에 중독된 자가 있나?”
“성기사들은 상태가 괜찮습니다만, 그 외의 사람들이 슬슬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테드의 보고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로이드가 굳게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로 벌써 이틀째인데 이카르센 성에서는 아무런 기별도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튜니아트 제국에서 사절단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텐데도 깜깜무소식이니 로이드의 속은 타들어 갔다.
게다가 마력에 중독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니 더욱 초조해졌다.
“……다들 환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환청을 듣는 자들도 속출하고 있고요. 중독된 자들 먼저 안전한 지역에 피신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군. 마력에 중독된 자들을 선별해 제도 근처에서 대기하라고 해.”
“네.”
허락이 떨어지자 테드가 사절단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시간이 더 지체되면 다른 사람들도 곧 모두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카르센의 성에 리즈벳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벨리언이 물어다 준 실체 없는 정보보다 증거가 확실했기에 로이드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아트레시아 2황자는 어떻게 리즈벳 황녀님이 이카르센 제도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거지?’
아트레시아 2황자의 행보였다. 그는 리즈벳의 행방을 찾고 있던 걸로도 모자라, 튜니아트 제국에서 사절단을 꾸리기도 전에 리즈벳의 행방을 알려 왔다.
이게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아직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로이드는 결국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살기를 내비쳤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이 히힝- 울며 앞발을 들어 올렸으나 고삐를 잡아 진정시킨 그가 참을성 있게 호흡을 골랐다.
“로이드 님, 당장 대피가 필요한 인원은 합해서 총 여덟 명 정도 됩니다만…… 왜 그렇게 분위기가 살벌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네. 그럼 저들에게 여유분의 이동 스크롤을 내어 주겠습니다.”
“그래.”
로이드는 힐끔 뒤를 보았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덟 명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황제 카로스가 사절단 명단을 꾸리면서 감시자로 붙인 몇몇이 눈에 들어왔다.
‘오히려 잘됐군.’
저들이 붙어 있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의외인 점은 트리아 백작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백작은 사색이 된 채로 이를 악물며 참아내고 있었다. 대단한 집념이었다.
로이드는 혀를 차며 다시 성문을 올려다봤다.
문제는 성문이 언제 열리느냐는 것인데……. 오늘은 이쯤하고 적당히 돌아갈까- 하려던 때였다.
쿠우우웅―.
바닥에 깊게 파고 들어가 있던 성문이 서서히 위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 너머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회색 머리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진한 눈매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본의 아니게 오래 기다리시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본의 아닌 게 맞나?”
로이드가 빈정대며 묻자 회색 머리 남자가 뻔뻔스러운 낯으로 대답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누가 보면 열렬히 성문을 열고 싶어 한 줄 알겠군.”
“……저는 누구보다 열렬히 환영하고 있습니다.”
로이드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완전히 성문이 열리자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카르센 성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 작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튜니아트 황성과는 또 다른 근사함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이카르센 본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각기 다른 이국적인 느낌의 성들이 본성을 지키듯 세워져 있었는데, 흡사 체스 판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성문 너머를 보던 로이드는 설핏 미간을 구겼다.
회색 머리 남자 말고는 그 주위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 혼자 나온 건가?”
“그렇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자신감이 대단하군.”
튜니아트 제국의 사절단을 무시하는 태도에 불쾌함을 담아 대답하자, 회색 머리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분 탓이겠지만 목소리에 억울함을 담아 대답했다.
“나름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튜니아트 사절단을 맞이하려고 최선을 다한 것이니 불쾌해 마시기를.”
그러나 로이드는 무척 불쾌했다.
* * *
성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양 뺨을 아프게 때렸다.
짝! 짝!
“정신 차려, 리즈벳!”
이런 상황에서 라히트리안이 지나가면서 흘린 말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지금 중요한 건 라히트리안이 의미심장하게 남기고 간 말이 아니라, 튜니아트에서 사절단이 왔다는 사실이잖아?
“……뭐지. 정말 뭐지?”
하지만 혼란스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라히트리안이 저런 말을 하다니. 혹시 나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건 아닐까?
아니, 뺨이 얼얼한 것을 보면 현실인 듯했다. 그럼 방금 들은 말도 현실…….
그래서 따라다닌 거였나?
내가 사고 칠까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럼 내가 깨어나고서 과보호했던 것도, 세이어드 아트레시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예민하게 굴었던 것도 전부 내게 호감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
“침착하자. 라히트리안이 무슨 고백을 한 것도 아니잖아.”
괜히 설레발치지 말자.
나는 라히트리안이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그런 달콤한 말에 넘어갈 줄 알고. 그 말을 믿기에는…….
“정신 차려, 리즈벳. 상대는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야.”
목적 없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남자가 저렇게 나온다는 건 숨겨진 속내가 있는 게 틀림없다.
애초에 라히트리안이 나를 이성으로서 감정을 갖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럼 뭐가 목적인 거지?’
나는 고심 끝에 머리 속에서 팟 하고 스치는 광선을 느끼며 답을 도출해 냈다.
“나를 마력 조절용으로 놓치기 아쉬워서 수작 부리는 거야!”
추가로 그는 튜니아트 황실의 대가 끊기길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튜니아트 신성 제국에서 사절단을 보낸 상황과도 아주 절묘하게 떨어졌다.
나를 이카르센 제도에 잡아 둘 마땅한 구실이 없으니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려는 거였구나!
본인 잘생긴 걸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니.
“누가 뻔한 수작에 넘어갈 줄 알고.”
나는 금세 여유로움을 되찾고 배부른 사자처럼 느른하게 해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