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어디에서도 렘무트란 자를 찾을 수 없었다.
진작 자리를 떠난 것 같았다. 게다가 더 암담한 건…….
“방명록에 이름이 없다고?”
“네, 그렇습니다. 오늘 방문객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분은 없습니다.”
“……설마 이름을 다르게 알려 준 건가.”
방문 기록도 없다니.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사서에게 렘무트의 외양을 설명했다.
“그럴 리 없어. 내가 도서관에서 분명 마주쳤거든. 적발에 적안을 가진 남자였어.”
“……죄송하지만 그런 분이라면 제 기억에 남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습니다.”
기억을 더듬는 것 같던 사서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실망감에 기운이 빠졌다.
미련이 남아 자리를 뜨지 못하자 사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날도 어두워졌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황녀님께서 말씀하신 분이 방문하면 제가 바로 기별을 넣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겠어.”
나는 마지못해 걸음을 돌렸다.
설마 오늘을 끝으로 렘무트를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원작을 피할 유일한 기회를 놓치게 된 것만 같아 속이 쓰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돌멩이를 발로 차며 돌아가고 있는데 뒤로 따라붙은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그림자?’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모른 척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는 내 속도에 맞춰 따라오고 있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궁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약 나를 해칠 생각이 있는 거라면 진작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동시에 렘무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또 보네.”
“당신……!”
“나 찾고 있었어?”
“……당신 누구야.”
애타게 찾고 있던 상대였으나 나는 렘무트를 경계하며 물었다.
도서관에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렘무트는 그게 중요하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누구기는. 지금부터 황녀님이 매달릴 사람이지.”
“…….”
“살고 싶잖아. 아니야?”
렘무트의 말은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내가 살려 달라 하면 정말 그렇게 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 정도로.
그러면서도 나를 도우려는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반가움보다는 거부감이 앞섰다.
“나한테 접근한 이유가 뭐야.”
“목적은 다르지만 서로 원하는 건 이룰 수 있으니까.”
“……나를 통해서 이룰 게 있다는 거야?”
“그래.”
대놓고 나를 수단으로 이용하겠다는 말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 말은 내가 필요 없어지면 바로 버리겠다는 것과 같은 거 아닌가?
내가 뜸을 들이자 렘무트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튜니아트 황실에서 도망가고 싶잖아.”
“…….”
“내가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당신의 뭘 믿고? 나를 끝까지 도울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그러자 렘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황성에서 빠져나간 후 네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알려 주는 것까지만이야.”
“…….”
“살아남는 건 스스로 해야지.”
그러니까 내가 황성을 빠져나가면 본인의 역할은 끝이라는 의미였다.
그럼 이 남자의 목적은 내가 탈출한 후 그가 알려 준 방법대로 이행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성사된다는 건가?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별로 좋은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말하는 뉘앙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면, 일단은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렘무트가 나를 이용하려고 접근했듯이 그를 이용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문제는 그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지만.
내가 살 방법까지 알려 준다고 한다면 적어도 렘무트의 목적이 내 목숨은 아니겠지.
“그럼 나 좀 도와줘요, 렘무트.”
썩은 동아줄이라 하더라도 그의 손을 잡아 보기로 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위험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 * *
“황녀님! 아침입니다. 식사를 거르지 않으시려면 지금 일어나셔야 해요.”
날이 밝았다.
어젯밤 렘무트와 만나고 난 후 긴장이 풀렸는지 돌아오자마자 바로 기절해 버리듯 잠이 들었다.
이틀간 잠을 설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리사. 몇 시인데 그러는 거야.”
“벌써 여덟 시가 넘었습니다. 오늘은 수업이 있는 날이잖아요.”
“아. 오늘 목요일이던가.”
“네.”
나는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났다.
리사는 벌써 내가 갈아입을 옷까지 앞에 준비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 옷을 언제까지 계속 입어야 하는 거지.
황성만 탈출해 봐. 저런 건 쳐다도 보지 말아야지.
무려 겹겹이 쌓인 옷만 다섯 벌이 넘었다.
게다가 입는 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는 제대로 입지도 못했다.
애초에 황족들이 입고 다니는 옷이니 혼자 입을 일이 없었지만.
나는 욕실에서 대충 몸을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새하얀 의복에는 금색 자수가 은은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
“그럼 저는 아침 식사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리사가 나가고, 나는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대로 거울 속에는 무척 청초한 여자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에 푸른색 눈동자가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었다.
게다가 옷까지 그렇게 입고 있으니 분위기는 한층 더 짙어졌다.
이렇게 예쁘면 뭐 해. 당장 죽지 않을 궁리나 해야 하는 팔자인데.
“황녀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아. 그래.”
“아침은 베이컨이랑 계란 프라이, 토스트예요.”
리사가 하나씩 식사를 내어 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그런데 황녀님.”
“응?”
“어제 어디 다녀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멈칫했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황실 사람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질문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어디 가기는. 근처 산책하다가 온 거였어.”
“그럼 드레스 자락을 들고 뛰어오신 이유는요?”
“……그냥, 그렇게 해 보고 싶었어.”
“네……?”
“아무도 없을 때 몰래 해 보고 싶었다는 말이야.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뛰어 본 적 없으니까.”
리사는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니 딱히 파고들기 어려웠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리사가 황실에서 붙인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만일 내가 황실과 한편이더라도 황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존재를 붙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역할은 누가 봐도 리사가 제격이었다.
‘게다가 리사는 어제 자리를 잠시 비웠었지.’
어디를 다녀왔던 걸까.
어쩌면 내 행실을 보고하기 위해 높은 분을 보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트리아 백작 가문이 황실에 협조하고 있다면 공작으로 승격될 수 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앞으로 공작의 자리에 앉기까지 두 달 가량 남았으니 시기도 아주 적절…….
‘잠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리사.”
“네?”
“……튜니아트 제국에 공작이 지금 몇 명이지?”
“세 분입니다.”
“공작위의 수가 더 늘어날 수 있던가?”
튜니아트 제국의 귀족은 인원수가 정해져 있었다.
특히 고위직으로 갈수록 그 수는 엄격하게 제한됐다.
영지의 할당과 직급을 중요도에 따라 제한한 것도 있지만, 귀족들이 끊임없이 권력을 확장하며 활개 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제국법상 공작위는 세 개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맞아. 세 개로 제한되지.”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걸 눈치채지 못했지?
내가 처한 상황에 몰두하느라 미처 주변의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트리아 백작가가 공작가로 승격됐다는 건 다른 공작 가문이 멸문했다는 것을 뜻했다.
원작에는 리즈벳만 없는 게 아니었다.
똑똑.
“황녀님, 로이드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리사가 서둘러 일어나 테이블에 있는 그릇을 카트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벌써 공자께서 오셨나 봐요.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리사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늘빛 머리카락에 연하늘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그를 경악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로이드 윈저.
그 또한 원작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