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61)

* * *

운이 좋게도 나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금서 구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곳은 튜니아트의 기원과 역대 황족들에 관한 기록이 저장된 장소였다.

나는 안을 거닐다가 튜니아트 황실의 기원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역사서를 꺼내 들었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나는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신성력을 지닌 최초의 인간은 여신 튜니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초대 황제, 이엘 튜니아트였다.]

이 제국의 초대 황제는 여신 튜니아가 가장 사랑한 인간이었다. 그녀와 가장 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익히 아는 내용이었기에 다음 장으로 넘겼다.

[여신께서는 튜니아트 황족의 가호를 약속하시어, 그들을 인간의 모든 지병에서 자유롭게 하셨다.

또한 본인과 가장 닮은 존재에게 신성력을 허락하셨으니, 튜니아트의 주인이 되기 마땅했다.]

그 증표로 여신은 자신의 권능인 신성력을 황족의 후계자에게만 허락했고, 튜니아트 제국은 어떤 다툼도 없이 평화롭게 황위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성력이 없으면 애초에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위를 계승한 자는 여신의 신탁을 받을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튜니아트의 황제를 ‘여신의 대리인’이라 불렀다.

그가 노하면 곧 여신이 노한 것이고, 그가 슬퍼하면 곧 여신이 슬퍼하는 것이라 여겼다.

다만 이 대목에서 걸리는 게 있다면 바로 현재 튜니아트의 황제인 카로스였다.

“지금까지 어떤 신탁도 공표한 적이 없어.”

너무 평화로워서 그런가?

나는 태어나서 카로스를 일 년에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참고로 그 일 년에 한 번은 에테르온의 생일이었다.

[여신께서는 튜니아트의 황위가 피로 물드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

새로운 튜니아트의 주인은 여신의 부름을 받아 제국의 앞날을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이 대목이 바로 에테르온이 신성력을 잃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여주인공인 시에타에게 눈이 멀어 결국 황제의 자리를 피로 물들이며 차지하고, 결국 여신은 그에게서 권능을 앗아간다.

나는 읽던 것을 도로 넣고 신탁이 기록된 고서를 찾았다.

여신의 예언이 담긴 신탁은 아주 귀한 것이었기에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신탁이 기록된 책도 아주 얇았다.

책장을 열었을 때, 나는 아주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다.

“응?”

[튜니아트의 앞날이 다시 밝아지리라.]

정확히 천 년 전에 내려온 신탁을 끝으로 아무런 기록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새로운 튜니아트의 주인은 여신의 부름을 받았다며?”

여신의 부름이 바로 신탁을 의미했다.

그런데 왜 천 년 전을 끝으로 아무것도 기록된 게 없어?

그렇다고 여신의 가호가 사라졌다고 하기에는 아직 황실에는 신성력을 타고난 후계자가 있었다.

“어느 황제부터 신탁이 끊긴 거지?”

나는 역대 황족들의 족보를 꺼내 들었다. 신탁이 천 년 전에 끊겼으니 그 당시 황제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면 될 것이었다.

그 당시의 황제는…….

[딜리언트 샨 튜니아트 (1505~1595)]

은발에 벽안을 지닌 황제가 무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생애가 함께 기록된 상태였다.

“이때부터 왜 신탁을 못 받았지?”

나는 한 장씩 페이지를 무심히 넘겨 보다가 멈칫했다.

[아리사 튜니아트 (1485~1505)]

인간의 모든 지병에서 자유로워야 할 튜니아트 황족이 어째서 스무 해밖에 살지 못하고 사망한 걸까.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기록이었다.

“……잘못 기록한 건가?”

나는 급히 다른 황족들의 초상화도 확인해 보았다.

[벨로나 레브 튜니아트 (1616~1636)

엘시어스 셀레나 튜니아트 (1667~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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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사 테니 튜니아트 (2352~2372)]

……그러나 이어서 살펴 보니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닌 듯싶었다.

게다가 이 기이한 상황은 전부 황녀에게만 해당되었다.

다른 황족들은 모두 제 수명을 누리다 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금씩 내가 가진 단서들이 하나로 꿰어지고 있었다.

나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이게 뭐야…….”

특이하게도 튜니아트 황가에는 황녀가 태어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스무 해를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내게 남은 수명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잖아……?

툭.

손에 들려 있던 책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매번 태어나는 단 한 명의 황녀.

신성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황태자 에테르온.

그리고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황녀인 나.

[또한 본인과 가장 닮은 존재에게 신성력을 허락하셨으니.]

어쩌면, 이 문장에서 본인과 가장 닮은 존재가 황녀라고 한다면, 튜니아트는 이미 천 년 전부터 여신의 뜻을 거역하고 있었다는 건가?

“……거짓말.”

신의 영역인 신성력을 무슨 수로 옮겼는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걸 황실에서 성공적으로 해냈고, 이제 나도 그 희생양이 될 차례라는 것이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녀궁으로 달려갔다.

황실의 예법은 모두 무시하고 발목이 드러나도록 드레스를 바짝 올려 무작정 뛰었다.

“황녀님, 어디 다녀오세요? 세상에, 행색이 왜! 발목이 다 드러나셨잖아요!”

정원에서 날 마주친 시녀 리사가 사색이 되었다.

튜니아트의 황족은 절대 살갗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궁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급한 일이 있어서! 잠깐 혼자 있고 싶으니까 방에는 들어오지 마.”

“네?!”

나는 쉴 새 없이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탁상 달력을 잡아챘다.

“세이어드 아트레시아가 황태자가 되던 시기가 건국제였어.”

달력에는 대륙의 모든 연례행사가 표시되어 있었기에 원작이 시작될 시기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한 장, 두 장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아트레시아 제국의 건국기념일이 정확히 두 달 후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일주일 전이 바로 내 생일이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트리아 가문이 아직 백작가였기에 원작까지 여유가 있다고 단정 지은 게 실수였다.

앞으로 두 달.

그게 내게 남은 시간이었다.

* * *

이제야 내가 원작 전에 죽을 거라는 게 실감이 났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 중 하나인 아트레시아 세이어드는 불완전한 혈통을 지닌 황자였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뛰어난 검술 실력과 비상한 머리 때문에 황후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녀의 아들인 아트레시아 제국의 1황자를 황위로 올리는 데 있어, 세이어드는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이어드는 일찍이 변방으로 쫓겨나 황성의 어떤 일도 개입할 수 없게 된다.

변방으로 몰아냈어도 세이어드의 능력은 황성을 넘어 황제의 귀까지 들어갔다.

세이어드가 포섭해 놓은 중앙 귀족들은 매일같이 그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며 간청했다.

“……그리고 세이어드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진행한 일이 시에타의 고국, 라리에트 왕국을 점령하는 일이었지.”

그때부터가 원작의 시작이었다.

여주인공이 시에타의 몸에서 깨어나는 것도 그쯤이었다.

하루아침에 나라가 쫄딱 망해 버린 그녀는 세이어드에게 그대로 볼모로 잡혀 황태자비가 될 위기에 처한다.

세이어드는 자신의 혈통으로는 황태자 직위를 안전하게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그녀를 비로 맞이하기로 한다.

라리에트 왕국은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여 그의 혈통을 보완하기에 적절했다.

또 왕국령 지하에 매립된 순도 높은 마력석와 대륙을 잇는 운하까지 얻게 되면 탄탄한 입지까지 갖출 수 있었다.

문제는 만족할 만한 군대를 꾸리기에는 황후가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이어드는 황성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도국의 ‘라히트리안 이카르센’과 접촉한다.

그는 라리에트 왕국 침공을 제안하고, 라히트리안은 그 제안을 수락한다.

“……확인 사살 당한 기분이야.”

나는 벽에 기대 앉아 무릎을 세운 상태로 얼굴을 묻었다.

만약 내가 살아 있었다면 세이어드는 라리에트 왕국까지 건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신의 후손으로 혈통도 완벽하고, 튜니아트 제국을 등에 업은 리즈벳이 누구보다 탐났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세이어드가 전쟁을 원치 않았다는 건 원작에서도 나와 있었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전쟁이라니. 정말 지긋지긋하군. 라리에트에 미안하게 됐어.”

그는 국경을 지키면서 이미 전쟁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나는 모든 의욕을 잃고 침대에 힘없이 누워 천장을 봤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남자가 떠올랐다.

렘무트.

도서관에서 만났던 독특한 외양을 가진 이상한 남자.

“……튜니아트 황녀는 고대어를 배우지 않을 텐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남자는 다 알고 있었던 거야.”

튜니아트 황실에서 내게 숨기고 있던 진실을.

단순히 나를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고대어를 모를 거라고 확신했던 거였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튜니아트의 황녀들은 고대어를 배우지 못했을 테니까.

렘무트를 다시 만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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