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내가 당신을 노린다면
(59/154)
59 내가 당신을 노린다면
(59/154)
#59 내가 당신을 노린다면
2022.01.20.
“방금 뭐라고 했지……?”
언제나 여유가 넘치던 모습과는 다르게 동요하는 황제를 보면서 이엘은 자신의 추측이 맞아 들어갔음을 깨달았다.
‘황제의 능력이 정말 마음을 읽는 거였나. 예상했는데도 놀랍네. 결계가 없었으면 죽을 뻔했어.’
이엘은 씁쓸하게 조소했다.
사실 황제의 능력은 어렴풋하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심증을 확실히 굳히기 전까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때, 쓸모도 없는 승부사 기질이 발동한 것인지.
“이엘 바이스. 네가 어떻게…….”
황제의 노한 음성에 멀리 떨어져 있던 기사들이 시선을 쏟기 시작했다.
이엘은 그들의 관심이 불편했다. 그건 황제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폐하. 자리를 옮겨서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침묵하는 황제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엘은 황제가 별로 두렵지 않았다.
그를 정말 두렵게 만드는 건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황제의 등 뒤, 저 멀리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걱정스레 보고 있는 리엘라의 눈빛이었다.
*
“헉……. 헉……. 리엘라 님!”
루의 목소리가 기나긴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닌 밤중에 이게 웬일이람!?’
루는 황제의 집무실 앞으로 내달렸다. 호수궁 시녀 숙소에서 곤히 자고 있던 와중에 호출을 들은 것이다. 리엘라 님이 당장 애타게 자신을 찾고 있다고.
“루. 미안해요. 자고 있는 거 아는데……. 그런데 혼자 있기가 너무 불안해서…….”
“리엘라 님! 무슨 일이에요? 이 차림은 다 뭐고요. 왜 여기에 계세요? 침실에서 잠드셨던 것 아니었어요?”
“그게…….”
리엘라는 급하게 달려온 나머지 제대로 머리도 빗지 못한 루의 손을 덥석 잡았다.
리엘라는 추위 속에 발가벗기라도 한 듯이 떨고 있었다.
“폐하는요? 폐하는 어디 계세요?”
“안에요.”
“그런데 왜 들어가시지 않고요.”
루의 말에 리엘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보다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건 바로 리엘라 자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겁이 나기도 해서 도무지 문에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안에 폐하와 이엘 경이 함께 있어요. 밖에 술집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엘 경이 그자들과 잘 아는 듯이 굴었어요, 그런데 이엘이 또 폐하께 불복해서…….”
“리엘라 님. 천천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루는 횡설수설하는 리엘라를 일단 꼭 끌어안았다.
리엘라의 망토 자락에 달라붙어 있던 밤이슬들이 아직 잠기운을 다 떨치지도 못한 루의 볼을 차갑게 적셨다.
*
“그래서, 네 부친의 가문이 한때 연맹에서 일한 이력 덕에 후손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고. 내 정체를 파악한 것은 황실에 들어온 뒤고?”
“예.”
이엘의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그의 모든 해명이 그랬다.
자신이 황제의 능력을 파악한 과정, 또 리엘라의 자질을 눈치챈 과정. 모든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엘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논리적이었다.
“단서는 충분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성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던 폐하보다 쉽게 알아챌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결론은 리엘라를 곁에 두고도 한참 몰랐던 내가 바보라는 것인가.
헤르한은 이엘의 말이 하나하나 고깝게 들려 조소했다.
“네 속을 읽을 수 없으니 진위를 알 수 없군.”
“어릴 적 부친이 제게 어떤 약을 먹이셨습니다. 능력자들에게 조종당하는 것을 막는 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그 탓일 겁니다.”
“연맹에서 사용했던 약물인가. 전범 집단인 주제에 버젓이도 아직까지 악습을 답습하고 있었다……라.”
“송구합니다.”
일부러 자극하려는 말에도 이엘은 차분하기만 하니 헤르한은 더 혼란스러웠다.
정리하자면 이엘은 가문의 이력으로 인해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 뿐, 이렇다 할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 셈이었다.
그림자 상인에 대한 해명도 그랬다. 가난으로 험하게 자란 탓에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밀매상들의 존재를 알았고 그 덕에 그들의 사기 수법도 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왔지?”
“예?”
“왜 내 뒤를 쫓아와서 가게에 들어가려는 것을 막았냐는 것이다. 그저 충심에서 비롯한 행동이라고 대답할 건가?”
“그건…….”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던 이엘은 그때 처음으로 주춤했다.
“……물론입니다.”
“나에 대한 충심?”
“…….”
“아아. ‘대사님’에 대한 충심인가.”
헤르한이 비꼬듯 물은 말에 이엘은 끝까지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의 앞에 꿇어앉아 해명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고하는 침묵이었다.
헤르한은 처분을 내리기 전까지 밖에서 대기하라는 말로 이엘을 내쫓았다.
의문에 대한 답은 전부 들었는데도 헤르한은 이엘이 등을 보이는 그 순간까지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어째선지 이엘의 모든 게 거짓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늘 능력에만 의존해서 그런가. 이젠 그 힘 없이는 사람의 진심을 알아보는 방법을 다 까먹은 것 같다.”
헤르한의 심란한 고백에 아시온은 씁쓸하게 웃었다.
“넌 이엘 바이스가 어떤 자로 보이나?”
“폐하께 충성할 자로는 안 보입니다.”
아시온이 대답했다. 헤르한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리엘라 양을 위험에 처하게 할 자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시온이 덧붙인 말이 헤르한의 머릿속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뭉스러운 주제에, 아까 몸을 던져 앞을 막고 리엘라를 구하려고 했을 때의 눈빛만은 어쩐지 진심이었던 것 같아서.
“……난 그래서 저자가 더 위험하게 느껴져.”
*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리엘라는 일단 이전과 같이 일상 업무에 복귀하라는 처분을 받고 집무실에서 나온 이엘에게 나아갔다.
당장 이엘을 내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니 곁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황제의 심산이었지만, 리엘라는 그저 일이 잘 풀린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엘은 그런 리엘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저를 걱정하셨습니까?”
“당연하죠!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요? 이엘 경이 아까 그자들과 한패라고 누명을 쓰고 벌을 받게 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리엘라는 이엘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루와 벌써 황제가 따로 붙인 감시병 때문에 애써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꼭 이엘을 품에 안고 보듬는 듯했다.
“이엘 경.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제발 그러지 말아요. 자꾸 폐하께 대적하지 마세요. 네? 이엘 경이 폐하의 오해를 살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요.”
‘오해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정말 그자들과 한패면……. 내가 정말 당신을 노리고 있는 거라면…….’
이엘이 혼란스러운 마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집무실 문이 열렸다.
리엘라는 곧장 그 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 들어가 봐야겠어요. 이렇게 얘기 나누는 모습 보이면 이엘 경이 또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
“저, 대사님…….”
이엘이 용기를 내서 리엘라를 불렀지만, 리엘라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미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리엘라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황제에게 다가가 그를 걱정하고, 궁금해하고, 애틋하게 어르기도 하는 다정한 말들이.
이엘은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
‘오늘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주제에 같잖게, 왜 당신을 구한다는 생각 같은 걸 했을까.’
*
이른 아침이었다.
날이 밝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선 그레타는 곧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지하 술집에 도착하자마자 기겁했다.
“이게 다 뭐야!”
터억.
그레타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 안엔 그림자 상인이 요구한 돈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각에 약속한 금액을 가져왔는데도 놈들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설마 선금만 들고 다 튄 거야? 이 개자식들! 어디 있어! 당장 나오지 못해?”
빈 술병. 유리잔. 부러진 촛대.
그레타는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다 집어 던지면서 패악을 부렸다.
그러기를 몇십 분. 드디어 누군가가 슬쩍 나타나길래 곧바로 그의 멱살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그림자 상인이 아니라 그레타가 행패를 부리는 소리를 듣고 온 옆 건물 주인이었다.
“이거 놔요! 대체 무슨 난리를 치는 거요? 여기 사람들은 다 잡혀가고 없는데!”
“뭐, 뭐라고요? 잡혀갔다고요?”
“그래요! 어젯밤에 한바탕 시끄럽더니 새벽같이 위병들이 들이닥쳐서 줄줄이 체포해갔다고요. 아, 술집을 운영하는 척하면서 불법 약물을 거래했다나 뭐라나……. 세상에 난 내 옆집에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이 사는지도 몰랐다니까!”
그레타는 멍했다.
하루. 돈을 구해오는 그 딱 하루 만에 그림자 상인들이 다 잡혀가고 말다니.
굳이 제국에 힘겹게 온 것은 바로 이 자들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럼 나는? 나는 어쩌라고? 왜 하필 이 시점에……. 당장 약을 구하지 못하면 파비안은 정말……!’
그때 허탈하게 주저앉은 그레타의 머릿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벽에 위병들을 동원해서 밀매상을 통째로 털 사람은 당신뿐이지. 헤르한 황제.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내 뒤라도 밟았어? 이렇게 나를 엿먹이겠다?’
황제의 짓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약을 구할 유일한 거래처까지 잃은 마당에, 파비안을 살릴 길은 이제 어차피 단 하나뿐이었다.
그레타는 당장 여관으로 돌아가 파비안을 일으켰다.
그레타가 직접 말을 몰아 향한 곳은 황궁이었다.
번쩍번쩍한 위용을 뽐내는 황궁 성벽 앞에서, 그레타는 기도 죽지 않고 문지기를 노려보았다.
“당장 성문을 열어.”
“누구시오? 황궁에 들어가려거든 신분증과 출입증을 보여주…….”
‘짜악-!’
말에서 내린 그레타는 제 앞을 가로막는 문지기의 뺨을 다짜고짜 휘갈긴 뒤 발악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명령하는 거야? 당장 문을 열어! 그리고 너희 황제에게 가서 전해. 리오타 왕국의 왕녀가 도착했다고!”
당장 그레타를 포박하려던 문지기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이 리오타의 왕녀라고?”
수행인도 없이 직접 말 한 필만 몰고, 그것도 다 죽어가는 청년 하나를 싣고 와서 발광하는 이 여자가?
“당장 성문을 열라고. 내 말 못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