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법궁(경복궁)지도가 은밀히 양명군의 처소로 흘러들어왔다. 지도! 그 중 궁궐내의 지도란 것은
기밀 중의 기밀에 속하는 것으로 관상감에서만 특별히 관리되는 대상이었다. 그런 것이 양명군의
눈앞에 펼쳐졌다. 지도를 보며 차가운 미소로 양명군이 말했다.
“역시 관상감에도 우리 쪽 첩자가 있었군. 하긴, 관상감과 성숙청이 연관되지 않은 역모 사건이
역사상 어디 있었는가. 왕의 목숨조차 가벼이 들었다 내리는 자들!”
양명군의 차가운 미소를 파평부원군과 그 외의 일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양명군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왕권을 잡은 이후에도 이들이 지금의 금상의 목숨을 쥐락펴락 하듯 나의 목숨 또한
그리 할 것인가?”
방안 가득 침묵만 차올랐다. 양명군은 어차피 그들에게서 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니라는 듯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여 방바닥에 펼쳐진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그리하더라도 훗날 내가 등극한 뒤엔 관상감이나 성숙청에서 새로운 첩자를
발굴하는 것이 나을 것이야. 나 모르게······.”
이 말은 그가 왕권을 탈취하자마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쥔 관상감의 첩자들부터 죽이겠다는
엄포였다. 파평부원군은 경계를 하다가도 이렇듯 왕권을 잡은 이후까지 염두에 둔 그를
대할 때마다 비로소 조금씩 안심이 되고 믿음이 갔다.
“광화문의 위용이 너무나 높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야.”
양명군의 일그러진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파평부원군의 눈도 양명군에게 저절로
돌아가 박혔다.
“어디 넘지 못할 것이 광화문뿐이랴. 근정전을 넘어 강녕전으로 가는 향오문 또한 넘지 못할 터.
허니 뒷구멍이 제일 일세. 그렇게 엄금엉금 조악하게 강녕전에 들어가면 또 무얼 하나.
금상의 침상을 찾아 헤매다 시간 다 갈 것인데. 법궁도를 빼낸 자가 어침소까지 미리 알 수 있는가?”
“그것까지는······.”
말꼬리를 흐리는 자에게 양명군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섬뜩할 만큼의 냉기를 토해내는 눈동자였다.
“그런 준비도 없이 무슨 일을 도모하겠는가! 어침소를 미리 파악할 수 없다면 먼저 움직일 순
없을 것이다!”
“어침소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매일 달라지는데다가, 그것을 아는 자는 관상감의
세 교수와 운검뿐입니다.”
“그렇다면 거사도 있을 수 없다. 금상이 걸어 나오지 않는 한에는!”
마지막 흘리듯 내뱉은 양명군의 말 끝에 파평부원군의 눈빛이 반갑게 변했다. 양명군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기에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의 입이 말을 풀어냈다.
“금상이 걸어 나오지 않는 한에는 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허나 의식 없이 누워있는 금상이 어찌 걸어 나오겠소?”
“있습니다! 궐내에 조심스럽게 떠도는 소문으로는 조만간 큰 굿이 있을 거라 하였사옵니다.
대비전에서 성숙청에 일러 금상의 병을 치유하고자 한다는. 그날, 금상의 옥체가 근정전의
기단 위에 놓여 질 것이옵니다.”
양명군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파평부원군을 보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금상을 위한 큰 굿이라······. 광화문과 근정문이 일시에 활짝 열릴 것이오!
하지만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경계는 더 삼엄해 지는 법!”
옆에 있는 다른 자가 말을 받았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기은제(왕의 장수·무병을 기원하는 굿)가 거행된다는 날은 이번
보름달이 뜨는 밤이라 하였사옵니다. 즉, 5일 정도만이 남았단 뜻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숙청과 궁녀들의 움직임만이 활발할 뿐 궐내, 궐 밖의 군사의 움직임은 전혀 없사옵니다.”
기쁘게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도 양명군 만큼은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의 분위기 때문에 순식간에 다른 이들의 분위기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대비전에서 주관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왕의 의식이 있었다면 기은제 자체가 거행되지
못했을 것이고, 깨어있다 하면 궐의 경비부터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마라. 금상을
대신해서 운검의 의식은 뚜렷하게 깨어있다는 것을!”
“그에겐 군사통솔권이 없으니 손쓸 수 없을 것이옵니다. 단지 의식 없는 금상과 더불어
검받이가 될 수밖에······.”
“구름이 그물에 걸리는 것을 보았는가? 그를 허투루 보지 말라!”
“허투루 볼 리가 있겠사옵니까?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인데요. 소인의 말은 그렇기에 양명군께옵서
그를 검받이에 지나지 않게 만들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를 넘어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신을 넘어 가야하옵니다.”
양명군의 표정이 씁쓸한 미소를 띠며 슬프게 변했다. 그래서 모두들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다문 채 양명군의 눈치만 보았다.
“그렇겠지. 운검의 눈동자가 찢겨 나가고, 팔이 잘려 나가고, 다리가 잘려 나가도 그의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에는 수백 명의 군사라 한들 지나가지 못할 것이니······. 그의 심장은
내가 잠재워 줄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육신이 찢겨 나가기 전에, 벗된 자의 마지막 의리로!”
양명군은 옆에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칼날을 칼집에서 반쯤 빼내어 눈길로 훑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의아해 하는 이들의 눈빛을 더 빨리 훑었다. 양명군 혼자 운검을 상대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겠다는 의미였기에, 그가 진정 역모를 이루려는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그들의 의심에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양명군이 다시 말했다.
“난 그의 검을 안다! 그리고 결코 내 검이 그의 몸을 뚫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허니 내 옆에서
나를 엄호해줄 이들을 먼저 선발한 뒤에 궐내에 침입할 군대를 편성하도록 하라.”
양명군은 검을 완전히 꺼내 법궁도 위에 세웠다. 그리고 정확히 근정전 위치에 검을 꽂았다.
검 날 만큼이나 그의 눈동자도 날카로웠다.
“이곳에 금상의 옥체가 놓이는 날, 나는 열려진 광화문과 근정문을 당당히 지날 것이다!
이 길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다!”
방안에 모인 모든 이들의 머리가 지도 위에 모여 맞댄 채 세부적인 작전을 오랜 시간 동안
의논했다. 하지만 의논이란 명분하에 이끌어가는 것은 양명군이었고, 그 외는 그의 진두지휘아래에
고개를 끄덕이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파평부원군은 긴 의논 끝에 양명군의 방에서 나왔다. 모두가 비밀리에 빠져나간 그곳에서 그는
손끝으로 양명군의 감시를 위해 심어둔 무사 셋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귀를 가까이 하여
귓속말을 했다.
“거사의 날, 양명군과 함께 너희들과 다른 두 명, 도합 다섯 명이 선발대에 선다. 너희들은
양명군을 호위함과 동시에, 그가 헛으로 라도 움직일 시엔 일시에 그를 베어라!”
“네? 그라니요? 양명군 말씀입니까?”
“알듯 모를 듯 그 속을 짐작할 수가 없어. 조심은 하고 볼 일이다. 양명군이 우리의 뜻과
다르다 느낄 때는 내 즉시 신호를 보낼 터이니 너희들이 그의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다가 그를 죽여라.”
무사 세 명의 표정이 하나 같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들의 표정으로 인해 파평부원군의
표정도 불쾌하게 변했다. 그의 말이 매섭게 나왔다.
“그 사이에 그에게 매료되어 버렸느냐? 망각하지 마라. 너희는 양명군의 사람이 아니라,
윤씨 가문 사람이란 것을!”
파평부원군은 자신의 말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을 남겨두고 걸어 나갔다. 하지만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양명군의 사랑채를 물끄러미 보던 그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림이
나왔다.
“양명군! 역시 위험해도 같이 갈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내다. 그 어떤 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힘이 무서울 정도니. 상왕 자신은 부족하여도 아들 둘은 잘 두었어.
하지만, 한 대에서 국왕의 자질을 가진 자는 하나여야만 하는 법! 국왕의 자질을 둘 다 타고
난 것은 국왕 자질이 단 하나도 없는 것보다 더 혼란한 것이다. 상왕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
양명군의 집에서 나와 숨겨 세워둔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알 수 없는 불안함이
파평부원군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당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측근 한 명을 불렀다.
“사병들 중에 자객 셋을 양명군 몰래 미리 빼두도록 해라.”
“하지만 한명의 인원이라도 모아두어야 하는 상황에 세 명을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거사의 날에 우리가 움직이는 시간보다 약간 앞 서, 풍천위의 목숨부터 거두어야겠다.
그의 입을 아무리 봉합해두었어도 여전히 그의 존재가 불안하다. 양명군은 그를 떨칠 수가 없어!
그리고 민화공주! 금상의 약점임과 동시에 우리의 과거 죄업을 증명할 약점이기도 하다.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의빈 내외를 제거해야 되겠어.”
파평부원군은 조용히 뒷짐을 지고 땅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그림자
따위는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권력을 이어가는 것에만 정신이 쏠려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양명군은 대단한 사내임과 동시에 위험한 사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왕권을 탈취한 이후,
그의 움직임이 미리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 또한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외척들의
목줄을 쥐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명분을 찾기 위해 그와는 연관이
없었던 과거의 죄를 들춰낼 것이다. 그 증거가 되는 민화공주, 그리고 외척을 밀어내고
자리를 메우게 될 사림의 구심점이 될 풍천위는 미리 제거해 두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파평부원군은 양명군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왕의 팔다리를 미리 제거했던 것처럼, 양명군의 팔다리 또한 미리 제거해 두어야만 자신의
권세는 지켜질 것이 분명하고, 팔다리가 제거된 지금의 왕보다 양명군이 훨씬 쉬운 상대였다.
생각에 빠진 파평부원군의 귀로 말이 흘러들어갔다.
“과거와 이어진 인물이라 하면 이미 우리와 다른 뜻을 가진 왕대비마마도 계시지 않사옵니까?”
파평부원군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세상을 손에 쥘 인간의 여유 있는 미소였다.
“그 여자의 옆에는 이미 나의 명령만 기다리는 자가 있지 않느냐. 거사의 날, 왕대비는 독이 든
맛난 음식을 손수 자신의 입에 넣게 될 것이다. 양명군! 왕권을 잡게 된다 해도 자신의 뜻은
펼칠 수 없을 것이다. 풍천위의 누이도 그의 품엔 없을 것이야!”
성숙청의 구석진 방에 앉아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바느질을 하고 있는 장씨 앞에 설이
선머슴 마냥 털썩 주저앉았다. 장씨는 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는 계속해서 바느질을 하며 말했다.
“입이 대여섯 발은 나와 가지고선, 쯧쯧. 웬일로 여기 있는 게야? 또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고.”
“어째 불안합니다.”
“네 년같이 독한 년한테도 내릴 귀신이 있다던? 뭔 불안 타령이야?”
“이제껏 보았던 굿 준비와는 달라서요. 궁녀들이나, 무녀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길쌈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길쌈한 천은 검은색이고. 대체 어떤 굿을 준비하기에······.”
장씨는 바느질 하던 손을 멈추고 주먹으로 허리와 무릎을 통통 때렸다.
“조만간 큰 비가 내릴 것이야. 비가 와야지. 그래야 봄이 오지. 에구, 뼈마디 쑤셔.”
설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런 예언쯤이야 신경통 있는 늙은이라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땡무당이라니깐.
그런 말 말고는 없습니까?”
장씨는 다시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설은 장씨를 쳐다보며 그녀의 말을 눈으로 재촉했다. 장씨의 입이 웅얼거리듯 열렸다.
“설아! 기은제가 있는 날, 넌 아무데도 가지 마라. 여기 이곳에만 있거라. 북촌엔 부디 가지마라.”
설의 눈썹사이가 심하게 구겨졌다가 미세하게 경련이 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입가에 미소를 애써 담으며 말했다.
“무녀님,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궁금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지금 문득 궁금하네요. 저를 낳아 준 어미는 지금 살아 계실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슬펐다. 장씨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받았다.
“땡무당이라믄서?”
“땡무당은 거짓말 잘하잖아요. 웃으면서 잘 살아있다고, 저를 보고파한다고, 그 정도 거짓말은
해주실 수 있잖습니까?”
장씨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바느질도 멈추지 않았다. 설은 포기한 듯 빙그레 웃으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나를 낳아준 어미도 나에게 이름을 주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이름이 종년의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예쁜 이름이어서 주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뿐이겠지요.
분명 예쁜 이름이었을 겁니다. 설처럼······.”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년. 발걸음이 더디 가면 정도 더디 가니, 그리도 발걸음을 끊어라
하였건만, 부득부득 정을 이어놓았지? 그래도 북촌에는 제발 가지마라.”
“저······가야만 될 것 같습니다. 안 가면 제가 죽을 것 같아서······.”
“가지마라. 왜 불꽃이 뜨거운 걸 몰라?”
“불꽃이 뜨거운 걸 어찌 몰랐겠습니까? 단지 제가 녹아질까 두려워 가까이 갈 수 조차 없는
눈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장씨는 바느질 하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설을 보았다. 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씨와 눈이 마주치자 소리 내어 밝게 웃었다. 언제나 퉁명스러웠던 그녀의 표정이 아니었다.
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저, 제 주인께 돌아가겠습니다.”
“주인을 제 멋대로 정하는 종년도 있다던? 미친 년.”
“하하하! 그럴 수 있는 제 종년 팔자도 괜찮은 겁니다.”
설이 소리 내어 웃으며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비워진 그녀의 자리에선 여전히 그녀의
웃음소리가 머물러 있었다. 장씨는 바느질을 끝내고 이로 마지막 실을 끊어낸 뒤, 다 지어진
옷을 매만졌다. 그리고 옷을 들어 자신의 팔 길이에 맞춰보았다. 그녀의 몸에 딱 맞는 수의(壽衣)였다.
“더런 년. 지 평생 저리도 환하게, 저리도 큰 소리로 웃는 게 처음이지. 더런 년.
웃고 가지나 말지, 더런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