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누이가 꿈만 같아서 염은 허망한 눈동자만을 어둠 속에 두었다.
그런 염의 눈에선 마치 죄인처럼 몰래 집으로 와서 자신을 낳아준 어미도 못보고 가는 누이가
가여워 내리던 눈물조차 말라버리고 말았다. 염은 차가운 추위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뗀 걸음은 사랑채와 안채를 오가는 뒷길의 쪽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곳에 간 걸음이 순간 우뚝 멈춰졌다. 누군가가 쪽문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유심히 살펴보지 않아도 설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 따라 온 것이냐?”
“아닙니다. 주인께 온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염의 표정을 살피며 설이 다시 말했다.
“사람 마음이 어찌 한낱 문서 아래에 놓일 수 있겠습니까? 쇤네의 마음 속 주인은 오직 단하나,
도련님이십니다. 처음 이 집으로 팔려왔을 때부터 줄곧 그러하였지요. 쇤네가 읽지도 못하는
글자가 적혀있는 종이 쪼가리 따위가 건네졌다 하여 제 마음까지 이곳에서 팔려갔던 것은 아닙니다.”
염은 설의 말과 마음이 무의미하다는 듯 아니, 세상 모든 것들이 무의미 하다는 듯
허한 미소를 들어 하늘로 뿌렸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네 마음속의 주인이 나라 한들, 난 네 마음을 단 한 번도
소유한 적이 없으니······.”
염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입김이 한숨과 함께 토해져 나왔다. 그래서 설은 자신의 사랑이 아픈지,
그의 사랑이 아파서 자신의 마음도 아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염의 눈길이 천천히
돌려져 쪽문을 넘어 안채를 향했다.
“내 존재가 죄구나. 내 마음은 더 큰 죄로구나.”
“그래서 벌을 자청하시는 것입니까?”
“자청하는 것이 아니다. 응당 받아야 하는 벌이니 상감마마의 성심을 평안히 하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가장 잔인한 복수이기도 하지요. 공주자가껜 도련님 스스로 벌을 받은 것 보다 더한
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벌을 받는 것이 가장 큰 복수라······. 슬프구나.”
“도련님······.”
설이 염의 애달픈 입김을 위로하려 발걸음을 떼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멈춰 세웠다.
“더 이상 내게로 오지 말고 가거라. 그리고 나를 사내로 볼 것이라면 이제 이곳에 오지마라.”
설의 걸음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슬프게 돌아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염에게 말했다.
“도련님. 스스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몫만큼 연우아가씨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실 것입니다. 쇤네, 비록 아무 것도 못하고 아가씨 옆에 있기만 하였지만, 그 동안의
세월을 보아왔습니다. 무덤 속에서 살아나 공포에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기씨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왔던 말이 ‘오라버니’였습니다. 제일 먼저 찾았고, 가장 많이 불렀던 말이었습니다.
왜 아가씨가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는지, 누구를 위해서였는지 헤아려주십시오. 아가씨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 누구보다 가장 행복해지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동안의 죽어있던 아가씨의
삶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알기에 그의 마음이 더 아픈 것이었다. 그를 애타게
불렀을 것이기에, 그런 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기에, 작은 누이가 오라비를 위해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알기에······. 망설이고 있던 설의 슬픈 흔적이 뒷길에서 사라졌다.
염은 홀로 서서 쪽문을 보았다. 한참을 보고 있던 그의 입술이 자조적인 미소와 더불어 움직였다.
“어찌하면 행복해지는지 이젠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구나.”
염이 큰 목소리로 행랑채를 향해 말했다.
“여봐라! 누구 깨어 있느냐?”
염의 소리에 놀란 청지기가 눈을 비비며 냉큼 뛰어나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이었다.
“주인어른! 이 시간에, 이리 추운데 바깥에서 무얼 하십니까요?”
“내가 널 깨웠구나.”
“아, 아닙니다요. 마당에서 자꾸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잠결이 어렴풋하게 깨어나
있었습니다요. 바람소리인가 했는데, 아니었습니까?”
“잠이 깼으면 못과 길고 단단한 나무를 가져오너라. 망치도.”
청지기는 어리둥절했지만 염의 모습이 너무도 슬퍼 보여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창고로
가서 주인이 시킨 것을 한 아름 가져왔다. 염은 청지기가 가져다 놓은 것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힘겹게 그의 입이 떨어졌다.
“쪽문을 첩박도록(첩박다: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대문을 닫고 나무를 가로 걸치어 못을 박는 것) 해라.”
“네에?”
청지기가 당황하여 염과 쪽문을 번갈아 봤다. 쪽문은 일반 문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청지기도 잘 알고 있는 것이기에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무얼 하느냐? 어서.”
“아니, 저기······, 저, 주인어른······.”
“부디, 나에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할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청지기는 어렵사리 나무를 들어 쪽문에 가로 걸쳤다.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
무거운 망치로 못을 박았다. 밤공기를 가르며 못 박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러 퍼졌다.
그 소리는 몇 배의 고통으로 염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청지기가 박는 못은 바로 염의 가슴에
들어와 박히는 녹슨 못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안채의 민화 방에도 들어갔다.
울다 지쳐 까무러쳤던 민화가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물로 퉁퉁 부운 민상궁이
민화를 불렀다.
“자가, 정신이 드옵니까?”
“이 소리가 무엇이냐? 무슨 소리냐?”
여종이 재빨리 일어나 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가 새파랗게 질려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에서
민화는 어렴풋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설마······.”
“엉! 어찌 합니까? 지금 쪽문을 첩박고 있사옵니다. 엉엉!”
“누, 누가? 서방님? 서방님이?”
민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민상궁이 울면서 민화를 가로막았다.
“공주자가, 고정하시옵소서. 이러다가 태중 아기시께 일 생기옵니다.”
“놔라! 서방님이 이 가슴에 못을 박으시는데, 어찌 고정할 수 있단 말이냐? 나를 버리시려
하시는데!”
민화는 기어이 민상궁을 밀치고 방을 뛰쳐나갔다. 차가운 땅을 맨발로 밟으며 달려가는 민화 뒤로
민상궁과 여종도 따라 뛰었다. 쪽문에 도달한 민화는 힘껏 쪽문을 밀었다. 하지만 단단하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못을 박던 손이 민화가 미는 힘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그 사이
나무 틈 사이로 초조하게 건너를 훔쳐보다가 등을 보이며 서있는 염을 발견하고, 눈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민화가 말했다.
“청지기냐? 못질을 멈춰라! 기어이 못을 박으려거든 내 가슴에 직접 박아라!”
“멈추지 마라!”
조용한 듯 감정 없는 염의 목소리가 못 박는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민화의 귀로 들어왔다.
“서, 서방님······.”
“아이고, 나도 미치것네.”
못을 박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 박을 수도 없는 청지기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 했다.
그리고 민화의 뒤에선 울며 비는 민상궁의 소리가 들렸다.
“제가 자결하여 용서를 빌겠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거두어주시옵소서.”
민화의 울음소리가 큰 소리를 내며 염의 가슴으로 박혀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첩박는 소리보다
더 고통스럽게 염의 가슴을 파헤쳤다. 더 이상 고통스러울 것이 없게 되자, 염의 입에서
가까스로 마지막 말이 나왔다.
“못을······단단히 박아라.”
민화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전 이곳에서 단풍잎에 입 맞추던 염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그의 입술이 닿았던 그녀의 입술도 웃고 있었다. 그 붉었던 단풍잎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나무 틈 사이의 염의 등도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가마가 소리도 없이 강녕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훤과 연우가 내렸다. 훤은 달빛 아래에 선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이름을 불러보았다.
“연우낭자.”
그녀의 입술이 아름다운 경련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그 어떤 것이어도 상감마마의 뜻에 따르는 것이 백성된 도리인 줄 알고 있기에 소녀, 이제껏
단 한 번도 상감마마를 원망하여 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오늘밤 오라버니께 정녕
그리 할 수밖에 없었사옵니까?”
“이제껏 그대가 내게 한 말 중에 가장 고마운 말이오. 그리 나를 원망하여 주시오.
대신 이 이후부터 그대가 그대를 원망하였다간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하오면 정녕 오라버니를······?”
연우의 물음을 외면하며 훤은 강녕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들어가는 왕의 뒷모습도 애처로웠다.
훤이 들어가고 없는 곳에 비 오듯 퍼부어지는 달빛과, 어둠과 함께 흐르다 멈춘 구름만이 남았다.
운은 복면을 벗은 뒤, 자신의 등 뒤에 꽂힌 매화 가지를 연우 앞에 내밀었다. 그것으로나마
어지러이 흔들리는 달빛을 위로하고 싶었다. 연우의 손이 운의 손에 닿으면서 매화 가지를
받아들었다. 운은 그녀의 손이 닿았던 작은 면적이 몸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만 같아,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단정한 손끝으로 마치 오라비의 눈물을 감싸듯
매화를 감싼 연우의 눈에서 눈물 덩어리가 맺혔다.
“오라버니······.”
“꺾어진 가지에도 매화는 피어납니다. 그리고 가지가 떨어져 나간 매화나무는 다음 해
그 가지에서 더 화려한 매화를 피워 올립니다. 뜯기고 잘려나간 가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훗날 화려한 꽃은 더 많이 필 것이고 그 향기는 더 넓은 세상에 퍼질 것입니다.”
목소리는 더 없이 차가우나, 마음은 따뜻한 운의 위로에 연우의 맺혔던 눈물 덩어리가 길게
늘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 눈물을 감추려 그에게서 등을 돌려 섰다. 돌아선 연우의 허리에는
월의 댕기가 드리워져 운의 눈에 아릿하게 잡혔다. 운의 손이 댕기를 향했다.
하지만 차마 붉은 그것에 닿지 못하고 땋은 머리를 따라 손끝을 올려 그녀의 뒷목덜미에
맴돌다, 맴돌다 결국 주먹만 힘껏 쥐었다.
“소녀가 어리석게도 몰랐습니다. 더 푸른 하늘 위를 떠가는 맑은 구름도 마음이 있었음을······.”
운의 손이 움찔했다. 순간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댕기와 목덜미에 올라앉지 못하고 헤매던 운의 마음이 달빛의 장난으로
인해 땅에 그림자로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고, 그것을 연우가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운은 달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 이마는 일그러졌지만 목소리는 변함없는 태도로 말했다.
“구름 속으로 흘러 든 것은 달이었습니다. 이제 달은 가고 없으니, 구름 속에 있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애당초 구름 속에 있었어야 하는 것은 비겠지만, 이 구름은 비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연우는 운을 향해 돌아 서서 달을 올려보는 그를 올려보았다. 그의 강한 이마와 눈빛을 이렇듯
가까이서 똑바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참으로 강하신 분입니다. 연모의 정 아래에서 휘어지고 꺾이는 이가 그리도 많건만······.
원하신다면 원망이라도 받겠습니다.”
운은 연우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자신의 사랑에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달을 향해
싱긋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단지 지금 제가 원망스러운 것이 있다면, 처음 운우(雲雨, 구름과 비. 남녀 간의 짙은 정사를
비유한 것으로 주로 한시에서 관용적으로 쓰였던 단어)를 읊은 자, 그자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말 속에 그의 미소가 녹아있었다. 그동안의 숨죽인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무엇보다도 그를 미소 속에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