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35화 (35/47)

#35

방안에 넋을 잃은 채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염의 책은 오랫동안 한곳만 펼쳐져 있었다.

며칠째 계속 그 쪽이었다. 그의 사라진 넋은 어둑해져 책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사내종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촛불을 밝히고 나가는데도

아무 기척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염은 책에 열중해 있으면 누가 방안에 들었다 나가는 것을

못 느끼기에 사내종은 염이 평소와 같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사내종이 나간 뒤,

염은 초점 없는 눈길을 들어 흔들리는 촛불을 보았다. 그 불꽃 속에는 죽은 어린 연우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고, 힘없이 떨어져 있던 누이의 작은 손이 보였다.

그리고 염의 뒤에는 임종 직전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다 연우를 부르며 죽어간 아버지가 있었다.

맺힌 한이 사무쳐 감지도 못하고 죽어간 아버지의 두 눈을 덮었던 자신의 손이 있었다.

염은 아버지의 한이 닿았던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연우가 살아있습니다. 이 오라비에게 오지도 않고 살아 있습니다. 혹여 저 세상에서

아직도 연우를 찾아 헤매십니까?’

염은 아버지의 뜬 눈이 닿았던 손바닥에 자신의 눈을 대고 눈물을 흘렸다. 연우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어디 있는지도 아는데 볼 수는 없는 마음이 그의 심정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그의 입술만 이에 짓눌려 멍들어 가야만 했다.

“작은 불꽃이라도 타올라야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것인데······, 세상엔 타오르지

못하는 불꽃도 있군요.”

문득 들려오는 설의 목소리에 염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설은 먼발치의

방구석 어둠에 몸을 숨기고 앉아 있었다. 자객의 칼에 다친 어깨를 묶어 옷 아래에 숨기긴

했지만, 아직은 움직이면 안 되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염을 훔쳐보러 나온 것이었다.

“도련님의 상심이 깊어 보여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에 그리 슬픈 것입니까?”

“설······? 너로구나.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는······.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간혹 이곳에 왔었느냐?”

설은 염의 의심 섞인 눈빛을 보았다. 그가 하고 있는 의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답 없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그리워한 거리보다 그의 얼굴은 더 멀리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의 조용한 음색은 설을 묘하게 들뜨게 했다. 설은 천천히 염의 곁으로 다가갔다.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아픈 상처자국이 그녀의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 냈지만,

염은 어두운 불빛 탓에 알아채지는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 앉은 설에게로 염의 난향이 덮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들려온 염의 말이 설의 정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었다.

“네가 지금 모시고 있는 주인이 예전의 주인이냐?”

“······그 물음을 위해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 하시었습니까?”

“말해다오. 어떻게 된 것이냐?”

“쇤네가 무얼 알겠습니까? 돌아가신 주인어른께서 쇤네를 팔았고, 쇤네는 팔려간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디로 팔려갔던 것이냐? 우리 연우가 간 곳과 같은 곳이 아니겠느냐?”

설은 그가 느끼는 슬픔을 고스란히 가슴에 담았다. 가엾게도 그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어디에 있었느냐? 언제부터 경북궁 안에 있었느냐? 너와 같이 있었느냐?”

“같이 있었습니다. 그 이상은 묻지 말아주십시오.”

완강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이상 다그쳐 묻지 못하고 염은 가만히 설을 훑어보았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 못하는 연우를 그동안 같이 있었다는 설을 통해 대신 보고자 했다.

향기 없는 눈꽃은 난향을 묻혀 전하고 있었다. 설은 염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의 섬세한 눈길에 몸이 달아올랐다.

“우리 연우가 널 보낸 것이었나? 내 소식을 듣고파서?”

울먹이는 염의 목소리였다. 설은 물기어린 그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제 의지였습니다. 제가 보고파서였습니다.”

염의 슬픈 표정이 멈췄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 묻은 표정으로 설을 보았다. 연우가 아닌

설을 보는 그의 눈은 서운하리만큼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설의 눈길은 그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입술로 흘러들었다. 마치 염의 입술을 처음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사내의 입술도 색기라는 것을 머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정하고 청렴하기에

더욱 짙은 향기가 느껴졌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설은 염의 입술이 움직이자 화들짝 놀라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자신의 음탕한 생각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쇤네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사람이 사람 얼굴을 보는데 뭐가 그리 죄송하다고.”

설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려 이마를 구기며 말했다.

“참으로 야속하신 분이십니다. 쇤네더러 사람이라니······.”

염의 눈이 둥그러졌다. 설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또 다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넌 언제나 알 수 없는 말만 던지는구나. 내가 널 사람이라 하여 야속하다니.”

설은 고개를 들어 그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차라리 그가 야비한 사내였다면, 그의 인품이

조금이라도 낮았다면, 그가 하녀조차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느냐? 내가 혹여 네게 잘못이라도 한 것이냐?”

미안한 듯 조심스러운 염의 목소리가 도리어 설을 화나게 했다.

“의빈이십니다! 그러니 하찮은 저 같은 것에는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잘못일 수가 없습니다.

저 같은 것이 감히 의빈이신 도련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매질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잘못한 것인지 물으시는 것입니까? 왜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변함없이······.”

자꾸만 튀어나오는 그를 향한 마음이 설을 슬프게 했다. 불빛조차 어두운 방안에 단둘만

앉아 있기에 더욱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조금만 용기 내어 향기로운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나중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옷고름을 잡아당겨 그를 범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처참한 죽음도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설은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몸을 떠올렸다. 옷깃 아래로 떨어져

들어간 염의 고운 목덜미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상처로 흉측해진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설은 원망스런 눈길을 촛불로 옮겼다. 어두운 불빛일망정 촛불이 꺼진다면

어쩌면 상처로 얼룩진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한 욕정이 입으로 하여금 바람을 일으켜 불을 끄게 만들었다. 갑자기 꺼진 촛불에

염이 당황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옷고름을 잡아당기는 설의 손동작에 깜짝 놀라 말했다.

“잠깐! 무얼 하려는 것이냐?”

“도련님, 부디 쇤네를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말해다오.”

“오랫동안 도련님의 숨결을 탐하였습니다. 하여 단 하룻밤이라도 도련님의 숨결을

나누어 받고 싶을 뿐입니다.”

염이 차분하게 당황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어두운 달빛 아래에 설에 대한 가엾은 눈빛을

보내왔다. 그 눈빛의 청아함에 설의 몸은 부끄러움으로 뒤덮였다. 그래서 더 이상 옷을 풀어

헤칠 수가 없었다.

“나는 대의도 명분도 없는 헛 사내다. 어찌하여 이 나를 품었느냐.”

그의 목소리가 슬펐다. 설을 감싸 안는 그의 배려가 더 슬펐다. 그래서 설의 목소리는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전 천하고 무지하여 대의가 무엇인지 명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거두어라. 난 네가 마음에 품을 이유도, 필요도, 가치도 없는 사내다.”

“이유도 제 마음이 만든 것이옵고, 필요도 제 마음이 원한 것이옵고, 가치도 제 마음이

매기는 것입니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거두라 하십시오.”

한번 드러낸 마음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드러낸 설의 사랑에 염의 눈빛은 애정이 아닌

연민만을 보였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감히 의빈을 마음에 품은 여종을 탓하지 않고 그 마음을

몰라 준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나누어 받고자 했던 염의 숨결은 한숨이 되어 조용히

방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하룻밤 만입니다. 쇤네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그러기에 더욱 안 되느니라. 마음 없는 사내의 몸은 네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숨어살겠습니다. 영원히 도련님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겠습니다. 한번만이라도 안아주십시오.

마음이 없다 해도.”

설의 애원이 방안의 어둠과 뒤엉켜있었다. 하지만 염의 태도는 단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가 타이르듯 말했다.

“나에겐 친한 벗이 둘 있다. 그들은 모두 서자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지. 내 그들의 슬픔을

아는데, 벗 된 도리로 어찌 그와 같은 슬픔을 또 만들겠느냐.”

열 여자 마다할 사내는 없다고 했기에 그의 단정한 태도는 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그의 속마음을 물었다.

“단지······그뿐입니까?”

“난 한 여인의 지아비다.”

“제가 무슨 야망이 있어서 대감 마나님 자리를 탐하겠습니까? 전 소실 자리를 원하는 것도,

천첩 자리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하룻밤입니다.”

“여인에게만 정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내에게도 마음이 이끄는 정절이란 것이 있는 것이니.”

설의 손에 주먹이 쥐어졌다. 자신의 불안함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어렵사리 물었다.

“마음이 이끄는 정절이라 함은······, 공주자가를 일컫는 것입니까?”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곧은 눈으로 말했다.

“비록 나라에서 정해준 연이지만, 오랫동안 부부의 인연을 맺었고, 그 인연이 정이 되고

또한 사랑도 되었구나. 그리고 대의도 명분도 잃은 나를 살게 하여 주었다. 그러니 마음을

접고 너도 좋은 인연을 만나도록 하려무나.”

설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 흘러내렸다. 염에게 거절당한 마음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공주를 사랑하고 있다 말하는 그의 마음이 가엾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

자신의 대의와 명분을 앗아 가버린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염의 사랑이 불쌍했고, 그의 부질없는 정절이 불쌍했다. 이젠 연우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그가 느껴야 할 절망이 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는 점점 높아져갔고, 염은 숨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단지

미안한 생각에 울음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운은 다시 입궐하여 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왕에 대한 예를 끝마치고도

오랫동안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비록 들지 않아 보이지 않는 표정이긴 했지만 훤은 졸였던

마음을 쓸어내렸다. 놓아주기 싫은 신하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직은 슬픈 입매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박씨부인에게서 나누어받은 강한 의지는 슬픔을 가릴 여력은 가지고 있었다.

훤이 미소로 말했다.

“돌아왔구나.”

운은 움직임 없는 고개 숙인 그대로 기운으로만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하룻밤 사이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져 있는 왕의 모습이 더 반가웠다.

“어명을 받잡았사옵니다.”

“정경부인 박씨를 믿기에 그리 한 것이다. 내 비록 자네의 어미를 직접 보진 못하였으나,

너 같은 신하를 만들어 낸 여인이라면 그 어떤 신하보다 믿을 만 한 것일 터이니.

어차피 박씨는 왕인 내가 아니라 아들인 너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운은 고개를 들어 왕을 보았다. 하얀 야장의를 입은 왕이 벗의 눈으로 운을 보고 웃고 있었다.

왕 또한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훤에게 운은 단순한 신하가 아니었다.

그 마음이 미소에서 느껴졌다.

“운아, 나는 남녀 간에만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구 간에도,

그리고 군신 간에도 운명이 있지. 널 처음 만났던 날, 난 친구로 신하로 운명을 느꼈다.”

운은 긍정하는 눈빛으로 훤을 마주 보았다. 내삼청의 훈련 도중에 갑자기 행차했던 훤은

수백 명이나 되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군사들 가운데에 유독 운에게만 눈이 고정되어 있었었다.

그때의 마음이 새롭게 떠올랐다.

“운······. 구름······.”

훤은 낮게 읊조리며 닫힌 창문 너머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이, 구름 너머의 더 먼 곳을 보듯이

창 쪽으로 먼 시선을 두었다.

“너는 무슨 연유로 왕의 측근무사를 운검이라 하는지 아느냐?”

“모르옵니다.”

“환웅······.”

훤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운을 보았다. 운은 무표정하게 왕을 보았다.

“환웅이 하늘에서 조선 땅으로 내려오실 때 운사, 우사, 풍백 등을 거느리고 오셨지.

하지만 풍백과 우사는 먼저 하늘로 돌아갔지만, 마지막까지 조선 땅에 남아 환웅을 지킨

신하가 바로 운사! 그렇기에 왕을 보필하는 것은 대대로 구름이 아니겠느냐?

나의 구름은 너 뿐이다. 그러니 널 놓아줄 수가 없구나, 운아.”

운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훤에게 구름이 유일하게 운뿐인 것처럼, 운에게 있어서

태양도 유일하게 훤뿐이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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