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아침, 사랑채의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양명군은 아무 내색 없이 서안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방의 바깥 기척을 살피던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자리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제운, 자네 들어있는가?”
양명군의 등 뒤에 있던 병풍 너머에서 운의 싸늘한 목소리가 답했다.
“송구하옵게도 허락도 없이 숨어들어 있었사옵니다.”
“어명이라도 받자와 온 게로군.”
양명군의 목소리 속에 서운함이 담겨있었다. 옛날 언제나 얼굴을 마주하고 정을 나누던 벗도
이제는 어명이 가운데 끼어들지 않고서는 만나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 벗은 완전한 왕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직책이 운검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뜸함이 서운함이 되고,
그것은 왕에 대한 질투로 변질되었다.
“아직은 출타하시기에 이른 아침이옵니다. 헌데 어디를 다니시다 오신 것입니까?”
운이 왕의 사람으로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도 양명군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잡혔다.
“내가 생각 없이 쏘다닌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그 질문은 서운하네, 그려.”
“걱정되기에 무례한 말씀을 올렸사옵니다. 죄송하옵니다.”
“자네가 걱정하는 것이라고는 기껏 상감마마뿐이 아니겠는가?”
“하오나 현재로선 소인이 걱정되는 것은 양명군이십니다.”
양명군은 입술 끝에 잡은 씁쓸한 미소를 버리고 서안 끝을 손으로 힘껏 잡았다. 숨어 있는
운의 손을 대신한 것이었다.
“숨어 들은 연유가 무엇인가?”
“서안 서랍에 이미 두었습니다.”
양명군은 서안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왕이 보낸 봉서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긴 한숨만을
쉬었을 뿐 봉서를 뜯어보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깊은 상념을 떨쳐내지 못하는
손길로 귓불의 세환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시름을 달래시려다 귀고리가 먼저 닳겠사옵니다.”
눈길이 닿아 있지 않아도 마음은 닿아있기에, 보지 않고도 양명군의 버릇을 보고 있는 운이었다.
양명군은 운의 마음에 위로를 받은 것인지 펼치기 괴로운 봉서를 뜯어 천천히 펼쳤다.
글을 읽어 나가는 그의 눈동자가 어둠으로 변한 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끝까지 다 읽은 서찰을 서안 위에 무겁게 내려놓은 그는 더 이상 한숨으로 감정을 뱉어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눈길은 글자를 좇아 의미를 되새겼다.
“상감마마께오선 기어코 나를 사지로 밀어 넣겠단 것인가?”
양명군의 목소리엔 절망이 있었다. 그리고 슬픔도 있었다. 그 슬픔을 짓이기듯 왕의 서찰을
힘껏 손 안에 구겨 쥐었다. 구겨 잡은 그의 손이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제운! 살아 곁에 있는가? 풍천위의······?”
운은 양명군이 염의 누이인 연우를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운의 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살아있었어. 그 여인이 연우낭자가 맞았구나! 상감마마의 곁에······.”
양명군의 입술이 뒤틀렸다. 첫사랑의 그녀가 살아 있었던 것이 확실해진 기쁨보다 그에겐
그녀가 왕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더 이상 과장된 웃음소리는
나오지 않고 뒤틀린 감정만이 목소리에 담겼다.
“훗!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제나 상감마마의 것이지. 그리움조차 그렇지. 나 또한 같은
그리움을 품었었다네. 배는 다르나 한 아비의 아래에 태어났음에도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은
상감마마만의 것인가? 어찌하여 작은 비의 한줄기조차 내게 나누어주지 않는 것인가?”
병풍의 어두움에 파묻힌 운의 마음도 어두워졌다. 운은 비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양명군이 들떠 설쳐댔기 때문이었는지,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애당초 다른 신분이라 마음을 닫아버렸던 탓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연우란 여인은
그저 벗의 누이에 불과했었다. 가끔 전해 들었던 소식에 가슴이 설렌 적은 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운이 그리워한 것은 아주 작은 달빛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 달빛이 빗물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제운, 자네는 나에게 검을 겨눌 수 있는가?”
양명군의 물음에 구름은 말없이 하늘 위를 흘러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병풍 뒤의 운의 기척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운이 본가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달려 나와 허리 숙여 그를 맞았다. 운은 말의 고삐를 하인에게
건네준 뒤 곧장 안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안에서 운이 온 것을
박씨부인에게 알리는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운의 힘 있는
걸음소리 때문이었는지 뜰 쪽으로 난 안방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방안에는 나이는 들었지만
여인답지 않은 기골을 가진 박씨가 운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운이 안방 앞의 뜰에
서기도 전에 어느새 그곳엔 하인들이 멍석을 깔아놓고 있었다. 그는 멍석 위에서 박씨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마님! 새해 들어 처음 뵙습니다.”
운의 목소리를 들은 박씨의 표정은 싸늘하게 된 채로 그가 아직 고개를 들기도 전에 열었던
방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운은 고개를 숙인 채 닫혀 지는 방문의 소리를 들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안방으로 들어갔고, 그의 뒤에선 멍석을 말아 챙기는 하인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방문을 닫고 박씨와 단둘이 되자 운은 다시 한 번 큰절을 올렸다.
그제야 비로소 박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운이 서자로서 올리는 절이 아닌, 자식으로서
올리는 절만이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추운데 이리 가까이 오너라.”
운은 큰 키를 일으켜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늠름한 그의 모습이 자랑스러운 듯 박씨의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운은 품속에 있던 왕의 봉서를 꺼내어 박씨 앞에 내밀었다.
“상감마마의 밀서입니다.”
그녀는 그것에 눈길도 보내지 않고 집어서 옆의 서안 서랍에 넣었다.
“젊은 임금께서 다 늙은 나에게 연서를 보낸 것은 아닐 터이니. 하하하!”
그녀는 왕이 보낸 밀서가 자신에게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밀한 내방을
통해 어딘가로 건너갈 밀서로 인해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왕이 아니라 운이었다.
“몸조심 하거라.”
그녀의 걱정 어린 눈길이 상념이 깃든 운의 진한 눈썹에 머물렀다.
“우리 운이가 무언가 속상한 일이 있는 것이냐? 오랜만에 찾은 네 모습이 달라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운의 부정에도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놓지 않았다.
“널 힘들게 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왕이라 하여도!”
그녀의 눈빛이 운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운은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까지 뚫어보는 것 만
같은 그녀의 눈빛을 피하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운을 친 자식처럼 키워준 박씨부인은 무인집안에서 무인의 피를 받아 태어난 여장부였다.
그런 집안의 힘으로 남편을 오위도총관까지 끌어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도총관은 은혜를
버리고 장안 제일의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거느린 여인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지만, 박씨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운을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아들,
하지만 그 아들에게서 결코 들을 수 없는 말 ‘어머니’. 운이 내뱉는 ‘마님’이란 말은
도총관의 계집질보다 더 큰 상처가 되어 가슴 한구석을 부서뜨렸다. 박씨는 눈길만으로도
쓰다듬기 아까운 가엾은 아들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운······, 아깝구나.”
운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박씨를 보았다. 이따금씩 버릇처럼 그녀가 내뱉는 말이었다.
그녀는 눈가 주름 속에 안타까운 눈물을 숨기며 말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이리 나온 것인가 보구나. 상감마마께옵서 너를 총애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여전히 당하관에서 올라가질 않으니, 휴! 이제껏 운검직에 있었던 자들 중에 당하관은 네가
유일할 것이다. 그 서자란 신분이 무어라고 승급도 못해주는 것이냐······.”
“서자의 몸으로 지금 상감마마를 뫼옵고 있는 것이 더 영광입니다.”
“사내란 것들은 참으로 어리석지. 여인이 개가하면 자식이 금고를 당하는 것과 똑같이 첩에게서
보는 서자도 금고를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일진대, 자신들의 손으로 그 법을 만들어 놓았으면서
오히려 여인들 보다 더 그 법을 따르질 않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족속들이야.
······미안하구나, 운아. 내가 널 낳아주지 못해서.”
운은 미동 없이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여인을 보았다. 그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서자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어쩌면 연우란 여인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호기심이란 것을
가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왕보다 먼저 그녀를 알게 되었을 것이고, 좀 더 먼 옛날부터
그녀를 생각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를 향해 당당한 미소를 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들킬세라 혼자만의 감정으로 숨기고 또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박씨를 향해 속으로만 삭이며 불러보지 못했던 어머니란
말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운의 나이 6살, 처음으로 본가에 온 그를 박씨는 차갑게 맞았다. 남편의 애첩에게서 난 자식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어미가 덜렁 아들 하나 두고 덧없이 죽어 오갈 때 없어졌기에,
여인의 덕행이란 강제로 인해 마지못해 데리고 온 아이였을 뿐이었다. 어미가 살아있을 때도
버려진 듯 살아온 아이란 것을 들었지만 연민이란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단지 꾹 다문 입술이
단 한마디의 말도 흘리지 않는 것을 보고 벙어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또릿한 눈빛이
아깝다고 느꼈다.
운은 어미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장안에 이름 높은 명기가 어미였지만
그녀의 냉대 속에 자랐기에 가슴에 들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어미의 인생을 망친,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박씨의 차가운
눈빛조차 운에겐 어미의 눈빛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얼굴도 잘 모르는 아비란 사람의
집에 오게 된 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기껏 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인들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운이 자신의 키보다 더 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박씨가
그것을 보고는 곧장 다가와 운의 뺨을 때렸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운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어미란 여인에게 곧잘 당하던 것이기도 했지만, 박씨의 손은 그녀보다
매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하라더냐!”
“죄송합니다.”
박씨는 처음으로 들은 운의 목소리 때문에 깜짝 놀랐다.
“벙어리가 아니었구나.”
그녀는 뺨을 맞고도 표정 변화가 없는 아이가 가엾어 보였다. 우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 같았다.
“뺨을 맞았으면 눈물을 흘려야 한다. 네 나이의 아이는 그래야 정상이다.”
운은 박씨가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해 눈망울을 굴리며 쳐다보았다. 그녀는 왠지 정이
들것만 같은 아이의 눈빛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할 하인이 부족해서 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비록 반쪽 핏줄이긴 하나, 도총관의 핏줄이 아니냐.
하인들과는 몸가짐을 달리 하거라.”
“······네.”
박씨는 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을 멈춰 운을 향해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운은 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답하지 않는 운을
대신해서 박씨가 답을 주었다.
“혹여 글은 아느냐?”
“모릅니다.”
“배우고 싶으냐?”
“네.”
“천자문 정도라면 내가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도 괜찮다면······.”
“감사합니다!”
박씨는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하지만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 실수였다는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도 영리했다. 그래서 언젠가 세상과 만나게 될 서자로 태어난 아이가 가련했다.
가련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운을 탐내는 마음도 길어졌다.
“아깝구나······.”
글을 배울 때마다 이따금씩 박씨가 중얼거리는 말을 운은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서자로 태어난 것이 아깝다란 뜻으로만 이해했다. 운이 천자문을 다 배워갈 때쯤에 본가에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키가 크고 강한 눈매의 검은 옷으로만 무장한 남자였는데,
운은 그의 힘 있는 등 뒤에 메고 있는 긴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다가가 검의 끝을 잡았다. 갑자기 잡혀진 검 때문에 화들짝 놀란 것은 그 사나이였다.
눈 깜박할 사이에 몸을 돌린 그는 손으로 운의 턱을 잡아챘다. 사나이의 큰 손에 잡혀진
운의 얼굴은 절반이상이 가려진 채 눈동자만 보였다. 놀라지도 굴하지도 않는, 아이답지 않은
심지 깊은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매료된 사나이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망각한 채
운의 눈동자만 보고 있었다.
“무엇하는 짓이냐! 운에게서 손 떼지 못하겠느냐?”
화가 난 듯 소리치는 박씨의 목소리에 그 사나이는 정신이 든 듯 운의 턱을 놓아주었다.
“누님!”
박씨는 운을 자신의 치마 뒤로 숨기며 그 사나이를 향해 말했다.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 운에게 손을 댈 수 없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변해있는 박씨를 보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누님이 저를 부르신 연유가 이 아이 때문이었군요.”
그는 그녀의 치마너머에서 고개를 빼고 자신을 보고 있는 운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거친
발걸음으로 흑목화를 벗고 안방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박씨는 운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운아. 저 검이 마음에 드느냐?”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마음에 드느냐?”
“······네.”
처음으로 무언가에 흥미를 가진 운이 박씨에겐 작은 기쁨이 되었다.
“저 검은 운검이란 것이다. 언젠가 꼭 네 손에 쥐어주마.”
운은 운검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박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방안에 들어서는 박씨를 향해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감정을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인 자형의 애첩의 배에서 난 놈입니다!”
박씨는 서글픈 눈매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 놈이 날 배를 지가 골라 났겠느냐? 나에게 오고파도 내 배에 터를 잡을 수 없어 다른
배를 빌어 난 게지.”
“누님! 그러면 왜 저에게 그리 슬픈 눈을 보이십니까?”
“내가 슬퍼 보이느냐? 그러면 그것은 네 자형 때문이 아니라, 저 아이를 내 배로 낳지 못한
슬픔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네가 저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래서다.
도와다오.”
사나이의 짙은 눈썹 사이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누님을 저버린 자형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던 박씨가 미소로 말했다.
“운검대장 자리에 있는 사내의 속이 그리 옹졸해서야, 원. 어차피 네 녀석도 그 놈에게
반하지 않았느냐?”
“······훌륭한 눈빛입니다.”
“훌륭한 것은 비단 눈빛만이 아니다. 그 아이의 골격 또한 더 없이 훌륭하다.
아마도 자라면 다른 놈들 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더 클 것이야.”
“큰 키에 날렵한 몸매로 클 골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검에는 더 없는 체격을······.
설마? 누님!”
운검대장은 박씨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명확하게 알아차렸다. 운에게 검술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조선에서 검술이 뛰어난 자가 오를 수 있는 곳은 운검이란 자리뿐이었다.
하지만 운검은 당상관의 귀족이 아니면 결코 맡을 수 없는 직책이기도 했다.
“욕심이 과하십니다.”
“넌 그 아이에게 검술만 가르치면 된다. 다른 것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서자입니다! 그 아이에게 욕심을 내시면 누님의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늦었다. 이미 그 아이로 인해 울고 웃게 되었으니. 뱃속에 열 달을 품어야만 지 새끼가
된다더냐? 난 그 아이가 세상에 나가기 전의 수십 달과 수년을 내 품에 품어 그 아이를
낳아갈 것이다.”
“세상은 서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리하면 할수록 더욱 그 아이를 할퀴려 달려들 것입니다.”
“내 몸도 같이 할퀴어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상처도 그 아이 반, 내 반 나눌 수 있을 것이니
그만큼 상처도 빨리 아물지 않겠느냐? 난 내 날개를 뜯어 붙여주더라도 그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구나.”
박씨의 애원에 굴복한 것인지, 아니면 운검대장의 마음도 운의 눈동자에 빼앗겨 버린 탓인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제가 홍문관대제학께 보낼 서찰을 써드리겠습니다. 먼저 그분께 학문을 익히게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검술은 그 다음입니다. 누님은 친히 속수(옛날 제자가 처음으로 스승을 뵐 때
가지고 가던 예물)를 준비하여 주십시오.”
“홍문학대제학이라······. 그의 고매한 인품은 내방에도 들려올 정도니 운이를 맡기기엔
더 없는 것 같구나.”
“인품도 인품이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서자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분의 자제와 좋은 벗이 될 듯해서 입니다.”
박씨는 동생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퉁명스럽게 말하긴 하지만 오히려 자신보다 더 운을
배려해 주고 있는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대제학의 내부(아내)가 신씨부인이라 했던가? 그 여인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기에
그런 분과 연을 맺었을꼬.”
“부럽습니까?”
“그 여인을 부럽다 아니하는 내방 여인이 있는 줄 아느냐?”
“그나저나 누님. 그 다음은 어쩌실 것입니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익힌 검술을 어디다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림위(羽林衛)가 있질 않느냐?”
우림위! 이것은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과 더불어 국왕의 경호부대인 내삼청(內三聽)의
하나로, 내금위와 겸사복이 의관자제들로 구성된 것과는 달리, 우림위는 지배계층의
첩의 자손들을 위해 설치한 부대였다. 이곳에만 들어가게 된다면 왕의 눈에 들게 될
가능성도 높았기에 박씨는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이제껏 운검은 내금위에서만 뽑았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차후에 논할 일이다. 다행히 운이 내가 생각하는대로 자라준다면 고민은
나의 몫이 아니라 국왕의 몫일 것이다.”
운검대장은 실제로 얼마가지 않아 앞으로 왕이 될 세자가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은 눈빛과 골격보다도 자질이 더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에 한번 꼴로 밖에
가르치지 않는데도 전생에도 검을 쥐었던 자가 확실하리라 여겨질 만큼 검술을 흡수하는
속도가 빨랐다.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말이 없어 귀엽지 않다는 점뿐이었다.
운검대장은 운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박씨보다도 운을 운검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운이 운검을 잡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에게
그만큼 위협이 될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별다른 질문이나 말이 없던 운이 검술을 배우고 난 어느 날, 문득 운검대장에게 말했다.
“스승님. 운검이 무엇입니까?”
“어떤 운검을 물어보는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여러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나의 등에 있는 검도 운검이고, 나를 일컬어서도 운검이라 한다. 어느 쪽이 궁금한 것이냐?”
“둘 다 궁금합니다.”
운검대장은 큰 소리로 웃으며 운을 힘껏 끌어안았다. 사람에게 안겨본 적이 없는 운으로서는
그의 포옹이 당황스러웠지만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가슴이란 것이 어쩌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운의 외로움을 알아챈 운검대장은 더욱 힘껏
그를 안았다.
“넌 내가 뭐하는 놈인지도 모르고 검을 배우고 있었느냐?”
“마님의 동생이신 것만으로 저는 충분합니다.”
“성격 나쁜 나의 누님이 좋으냐?”
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씨가 좋지만, 그런 말은 하면 안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승도 좋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운검대장은 운을 품에서 놓으며 그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를 바짝 붙이며 말했다.
“운아! 내가 짊어진 검은 운검. 상감마마의 보검이란다. 그리고 나는 상감마마를 호위하는
무사, 운검이란다. 운검은 나와 더불어 모두 다섯이고 그중에 내가 맡고 있는 것은 운검대장이다.
지금 내가 너에겐 그저 검술만을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 너에게 꼭 운검술을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운검술은 다릅니까?”
“다르다마다. 일반검술은 자신만을 지키는 것이지만 운검술은 왕을 지키기 위한 검술이니
많이 다를 수밖에. 왕은 궁술은 익히지만 검술은 익히지 않기에, 운검들은 유사시에 운검을
잡은 오른 손은 왕의 손이 되어야 하고 별운검을 잡은 왼손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단다.
운검과 별운검은 길이도 다르고 무게도 다르기에 두 검을 이용한 쌍검법은 더욱이 어려운 것이다.
운아! 만약에 나를 좋아한다면, 나의 누님을 좋아한다면 너에게 운검술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다오. 네가 운검이 되지 못하면 가르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단다.”
“제가 운검이 된다면 마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아니! 네가 운검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운검이라면,
그래서 그것을 네가 이룬다면 기뻐하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 검술이 좋은가 하는 것이다.”
운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재미있습니다.”
처음으로 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운검대장은 다시 한 번 운을 힘껏 끌어안았다.
“넌 나의 누님을 많이 닮았구나. 필시 누님에게 오기 위해 다른 배를 빌어 태어난 것일 게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세상은 운을 서자의 신분에 묶어 두었다.
비록 뼈와 살은 다른 이에게 받았으나, 정신과 영혼은 박씨가 만들어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녀에게 어머니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깝구나.”
운은 박씨가 옛날부터 중얼거리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단지 서자로서의
운의 처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운을 낳지 못해 아깝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박씨는
어느덧 청년이 되어있는 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네게 힘든 일이 있는 것이구나.”
“아닙니다. 상감마마의 은혜가 하해와 같아서·····.”
운은 박씨의 걱정 어린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만두고 싶어도 운검직을
내어놓을 수도 없었다. 박씨를 위해서도 상처 난 마음을 얼음으로 꽁꽁 얼려 감각을 무뎌지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왕과 월이 나누는 행복한 미소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제가 상감마마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운이는 죄를 지을 놈이 아니다. 단지 대쪽과도 같은 너의 마음이 틈을 주지 않았을
뿐일 테지. 상감마마께옵선 너의 죄를 탓하시더냐?”
“아닙니다.”
“너를 알아보고 옆에 두었던 분이다. 그분께서 죄를 묻지 않는다면 네 스스로도 너의 죄를
묻지 말아라.”
운은 가만히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박씨를 만나게 되면 절대 운검직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란
계산을 한 왕의 속셈도 알게 되었다. 왕은 운보다도 더 운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씨의 눈에는 운의 상처가 확연히 보였다. 덜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옛날의 마음은
내방에 박힌 여인의 아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운의 상처로 인해 알게 되었다.
“널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는데, 세상의 시름은 나를 속이고 내 눈 뒤로 돌아
널 눈물짓게 하고 있는지 몰랐구나.”
아마도 그녀가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운은 없었을 것이기에, 이제는 자신보다도
더 작아져버린 그녀 앞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운은 어느새 궁궐로 돌아가
부딪히게 될 일들을 머릿속에서 점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