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27화 (27/47)

#27

설의 눈에 연우의 뒤와 옆으로 다가오는 검은 무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뒤편으로도

자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설은 얼른 연우의 팔을 잡아 자객들의 틈을 비집고

담장으로 밀쳐 세웠다. 전 방향보다는 담장에 연우를 기대게 하는 것이 훨씬 호위하기

좋기 때문이었다. 눈으로 훑어보니 자객은 모두 5명이었다. 이들의 목적까지 설이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검을 들고 있으니, 검을 꺼내야 했다. 설이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자, 자객들은 영문을 몰라 다가오던 걸음을 주춤했다.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설은 치마 아래에 감춰두었던 환도를 꺼냈다. 자객들은 갑자기 환도를 잡은

여인이 가로막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이내 설이 여자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들이 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설은 환도를 칼집에서 빼내어 자세를 갖추고는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젠장맞을 땡무당 같으니. 무당이랍시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만 중얼거리더니 이럴 땐

예언 비스무리한 것도 해주질 못하는데, 무당은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무당! 도무녀란 것도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었나 보군. 신력 높은 거 좋아하네. 순 사기꾼 땡무당!”

이렇게 중얼거린다는 것은 설이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연우는 칼을 움켜진 설의 손을

차분하게 잡으며 자객들을 향해 말했다.

“누구를 해치려 이리 오셨습니까? 저는 가진 것 하나 없는 무녀입니다. 이렇게 자객들이

노릴 만한 것이 못되지요. 혹여 이유라도 듣고 죽을 수는 없습니까?”

칼날을 눈앞에 둔 여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빨리 돌던 공기의 흐름조차 멈추게 만든 듯했다. 그리고 목소리와 더불어 달빛을 받아

하얀 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마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고 성스러운 기운조차 감돌았기에,

오히려 검을 든 자객들이 긴장하여 검을 고쳐 잡았다.

“이유는 모르고 그냥 죽이라는 명령만 따를 뿐이다!”

일제히 연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객들의 검 날과 설의 검 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밤하늘 위로 잘게 부서져 올라갔다. 다섯 개의 검을 죄다 받아친 설 때문에 그들은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들의 검이 연우가 아닌 설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훈련된

힘 있는 장정 다섯을 상대하기엔 설은 역부족이었다. 뒤에 있는 연우 쪽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설이 그들의 검을 다 방어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서서히 연우에게로 검 날을 돌렸다. 설은 흐트러진 자세를 하고서도 그 모든 검을

막아내려 했지만, 결국 연우에게로 가는 아찔한 검을 겨우 받아치며 그 검객을 베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오는 또 다른 검은 그대로 받았다. 연우의 비명이 성숙청을 뒤덮었고,

동시에 검을 쥔 설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순식간에 설의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젠장! 젠장!”

설은 자신이 다친 것 보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검을 쥐기 힘든 것에 더 화가나 이를

갈았다. 설의 검에 베어진 한명은 쓰러지고 남은 네 명의 시선이 새하얀 연우에게로

집중되었다. 설은 그들의 시선을 알고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팔 때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객들의 검이 연우를 향해 날아들 때였다. 설이 힘겹게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자객들의 눈앞에 있던 새하얀 여인이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알 수 없는 새까만 것이 눈 깜박할 사이에 시선을 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사이도 없었다. 그것보다 먼저 자신들의 동료 중에 한명이 비명조차

없이 쓰러져 죽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두려운 눈길로 다시 새까만 것의 정체를 파악했을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긴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이는 분명 운검이었다.

“으악! 우, 운검이 여긴 어떻게?”

내어 지르는 소리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공포가 담겨 있었다. 눈으로 확인은

못했지만, 아마도 방금 쓰러져 죽은 동료를 벤 검일 것이라 추정되는 별운검이 운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설은 운의 등을 보고는 안심하여 다리에 힘을 풀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를 끌어안고 피가 솟아나는 어깨를 손으로 막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연우

때문에 차마 눈까지 감을 수는 없었다.

검객들이 느닷없는 운검의 출연으로 두려워하느라 정신없을 때, 운은 등에 짊어지고 있는

운검을 오른손으로 서서히 빼내었다. 칼집에서 나오면서 검 날이 우는 소리가 마치 용의

울음소리 인양 검객들을 호령했다. 그들의 뒷목덜미가 죽음을 예감하고 머리털을 바짝

세웠다. 달빛과 하나가 된 운검의 검 날은 운의 오른손에 잡혀 연우를 가로 막았다.

그리고 오직 왼손의 별운검만으로 남아 있는 세 명의 검객들을 겨누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가 말했다.

“어째서 운검까지 꺼낸 것이냐? 여긴 왕도 없는데!”

오직 왕을 호위하기 위해 존재하는 운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도 했다. 하지만 운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춤사위를 펼치듯 순식간에 그들 쪽으로 파고들어 별운검을 두 번

휘둘렀다. 한 번의 큰 휘두름에 두 명의 목이 동시에 베어졌고, 또 한 번의 휘두름에

나머지 한명의 가슴이 베어졌다. 그들의 검은 운의 별운검과 한번 닿아볼 영광도 누리지

못하고 처참하게 쓰러졌다. 운은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운검을 등의 칼집에 다시 넣으며

이젠 듣지 못하는 시신들을 향해 답했다.

“운검이 움직이는 이유, 운검을 칼집에서 빼내는 이유는 단하나, 어명에 의해서다!”

설이 연우의 품에 안긴 채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시체한테 말해줘 봤자 들을 수나 있습니까? 그리고 왜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내셨습니까?

좋은 눈요기 하나 싶었는데 눈 한번 깜박이고 나니 다 죽어 있어서,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제가 실력이 형편없는 것 같아서 속상한걸요.”

“설아, 설아······.”

연우의 울음소리에 설은 눈길을 연우에게로 돌리고 미소를 보였다.

“울지 마세요. 어깨를 조금 베인 것뿐인데, 이건 된장 한 덩어리만 붙이면 사흘 뒤엔

아물어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설이 네가······.”

“아가씨 덕분에 평생 살아생전 한번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운검의 궁중검술을 보았는걸요.

방금 아가씨는 못 보셨죠? 양 손에 칼을 쥔, 쌍검법. 그런데 쪼잔하게 금방 끝내 버려서

제대로 구경도 못했네요. 조금만 더 보여주시지. 하하하.”

설은 자신이 다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연우가 다쳤다면, 염을 대신해 자신의 마음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었다. 그래서 피가 흘러내리는 자신의 상처가 오히려 고마웠다.

연우의 비명소리에 놀라 나와 있던 성숙청의 무녀들이 그제야 가까이 다가와 설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순찰을 돌던 군사들이 연우의 비명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운검에

새겨진 용의 울음소리를 들어서인지 달려왔다. 그들은 먼저 운검을 향해 인사를 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암호를 대라!”

운은 군사들조차 안심할 수 없었기에 오늘 왕이 힘든 몸으로 정해준 암호를 물었다.

“네? 백일장(白日長, 밝은 해는 영원하다)!”

운은 그들을 향해 별운검의 끝으로 설이 벤 놈과 마지막에 자신이 가슴을 벤 놈을 각각

가리켰다. 군사들이 확인을 해보니 그 둘만 숨이 붙어 있었다.

“심문을 위해 남겨둔 자들이다. 의금부로 넘겨라!”

군사들이 시신들을 정리하는 사이, 무녀와 무노비들이 설을 성숙청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연우도 설을 따라 성숙청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운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연우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운을 보았다. 무슨 일인지 묻는 눈이었지만 운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팔을 잡아 세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우를 걱정한 마음이 앞서 무의식중에 그만

팔부터 잡아버렸긴 했지만 한번 잡은 그 팔을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며 떨고 있는 그녀를 안아줄 수는 더 더욱이나 없었다. 아주 조금의 힘만 주어 팔을

잡아당기면 눈앞의 여인을 품에 안아줄 수 있었지만, 그 욕구를 참느라 연우의 팔을 잡은

운의 손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너무 움켜진 바람에 연우가 팔이 아파 콧잔등을

살짝 찡긋했다. 운은 그제야 놀란 듯 자신의 손을 놓았다.

“흰 옷이 피로 물들었소. 빨리 정리하시오. 상감마마께옵서 기다리시니.”

“그러고 보니 여긴 어떻게······?”

“상감마마께옵서 걱정되시어 나를 보내시었소.”

연우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안절부절 하던 왕이 운에게 뒤를 따라 갔다 오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니 운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다행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설이 다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연우가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미안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들을 자격이 없소.”

이때 안에서 장씨가 놀란 눈으로 나왔다. 연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설이는 어떻습니까?”

장씨는 운을 힐끔 본 뒤에 말했다.

“나더러 땡무당이라며 설래발 치는 것을 보니 죽진 않겠더군. 그런데 상감마마 곁을

비우고 여긴 왜?”

“침전에서 부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신모님을 불러오란 어명으로 왔습니다.”

“부적?”

장씨의 표정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연우를 보았다.

연우는 옆에 운이 버티고 있어서 왕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것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씨가 연우의 팔을 잡아 성숙청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속삭였다.

“상감마마께오서 아시게 되었소?”

연우의 무거운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나 먼저 강녕전으로 갈 터이니 핏자국을 씻어내고 얼른 오시오.”

장씨가 성숙청을 나오자 바로 문 앞에 운이 서 있었다.

“에구, 놀래라! 뭔 놈의 키가 그리도 크오?”

“무녀는?”

“여긴 무녀 천지요. 방금 전 아이를 묻는 것이라면 여기서 조금 기다리시오. 핏자국은

씻고 상감마마의 곁으로 가도 갈 수 있을 것 아니겠소? 설마 목간통 옆에서 지키겠단 소린

아닐 테고. 다른 무녀들이 옆을 지킬 것이니 뭔 일이 나면 소리칠 것이오.”

장씨는 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운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장씨는 달빛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자, 반대편으로 돌아가 서서 운을 뚫어져라 보았다. 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훑어 내렸다. 조선 제일의 신력이라고 하는 도무녀의

시선은 마치 운의 속내까지 꿰뚫어보는 듯해서 운은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씨는 운을 보며 신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참! 이런 놈을 뽑아 낸 년 밑구녕은 어찌 생겼을꼬. 미끈한 것이 잘났구만.

떡 벌어진 어깨에, 호리낭창하면서도 힘 있는 저 허리 좀 보게나. 하이고, 저 허리가

아래에 계집을 깔고 돌려대면 비명횡사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겠구먼. 죽는 년도 입 꼬리가

귀에 걸린 채 죽을 것이니 퍽도 좋을 것이고. 그런데······쯧쯧, 어지간히도 무거운

허리구먼. 아무 계집년 아래나 찾아들진 않을 인물이야. 저리 아까운 허리를 두고 정조

따위나 지키다니. 별 시덥잖은 허리가 여러 계집을 두는 것도 불행이지만, 저런 허리를

여러 계집이 나눠 갖질 못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이야.’

“허리 무거운 것이 그닥 좋은 것만은 아니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 가는 장씨의 뒷모습을 운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꿰뚫어보는

듯한 도무녀의 시선 끝에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무언가 심오한 속뜻이 있을 것만 같아서

고민에 빠졌지만, 끝내 무슨 뜻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운은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한참 동안 연우를 기다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운 앞에

나타난 그녀는 조금 전의 피투성이가 되었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언제나처럼 단아한

모습 그대로였다.

“괜찮소?”

한마디라도 나누고픈 마음에 기껏 생각해낸 말이었다. 그런데 연우는 자신이 아니라 다친

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다른 무녀님들의 처방으로 어깨에 피도 멎었다고 합니다.

운검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다행이라는 말은 운이 하고 싶었다. 이날까지 손에 잡은 검에 감정을 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객들에 둘러싸인 연우를 본 순간, 운이 잡은 검엔 분노가 실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 죽은 그들의 시신을 보면서도 두려움에 손이 떨렸었다. 왕이 아니었다면 연우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녀의 죽음 자체가 운에겐 공포로 다가왔었다. 아마도 그래서

였을 것이다. 자신의 눈앞에서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그녀가 감사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담은 이유는. 연우는 운검의 궁중검술보다 운의 미소를 구경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그 미소를 받았다.

운이 발걸음을 옮기자 연우가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내를 앞서 걸을 수 없는 여인의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걷다가 운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뒤따르면 위험하오.”

연우는 어쩔 수 없이 운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야 했다. 연우의 머리 위로 달도 따라 걸었지만

운의 눈에는 그녀보다 눈부시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와 닿은 연우의 달빛그림자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조금만 더 같이 있고픈 마음에 의해 긴 다리의 운이 연우의

걸음보다 더 느려졌다. 성숙청은 경복궁 중에서도 북쪽의 외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강녕전과의

거리도 상당히 멀었다. 하지만 연우와 단둘이 걷고 있는 길이 운에겐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지금쯤 강녕전에선 연우를 해치려던 자객들의 소식에 훤의 분노가 하늘을 뒤덮고

있을 것이었고, 어디에선가는 연우와 왕을 해치려는 음모가 오고가고 있을 것이었다.

이 급박한 시간 속에서 운은 연우와 나란히 걷는 이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의 그림자가 닿은 자신의 어깨가 화끈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침전으로 들어가는 향오문을 넘어 설 때였다. 당연히 강녕전 안에서

관상감의 교수 등과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훤이, 내관들과 더불어 뜰에서

조급하게 서성거리며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의 몸 상태까지

잊은 듯했다. 훤은 향오문을 넘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순간, 가슴에 뜨거운 불기둥

하나가 솟아올라 왔다. 이제껏 본적 없는 운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표정은 밝은 빛 아래보다 훨씬 차갑게 보임에도, 지금의 그의 표정은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이내 훤의 머리에서 자신이 의식을 잃기 직전에 연우를 품에 안고

나가던 운의 뒷모습이 떠올랐고, 그동안 간간히 보이던 그의 슬픈 표정들도 떠올랐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그의 혼란들의 정체를 훤은 눈치 채고 말았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와

인사를 올리는 연우를 보란 듯이 끌어안은 것도 운에 대한 훤의 질투였다. 아파서 골골대는

못난 사내의 모습만 연우에게 보이고 있는 것도 화나는데, 보지 않아도 분명 멋진 사내의

모습으로 연우를 구해냈을 운에 대해서 질투가 안날 수가 없었다.

운은 고개를 돌렸다. 왕이 여자를 안았기에 신하로서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에 담긴 여인이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에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고작 그녀의 그림자가 자신의 몸에 닿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조금 전의

길이 초라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슬픈 질투를 감추며 홀로 선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았다. 운의 뒤로 왕의 분노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성숙청이 경복궁의 외진 곳에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궐내다! 그런데 어찌 허락받지

않은 검객들이 궐내에 들어올 수가 있단 말이냐?”

“검술로 단련된 자들이었사옵니다.”

“모두가 다섯이라 들었다. 그런데 모두가 훈련된 자들이었단 말이냐?”

“송구하옵게도 그러하옵니다. 무녀를 지키던 여종도 무예가 뛰어난 편인데, 크게 다쳤습니다.”

훤은 품 안에서 연우를 놓았다. 그리고 경직된 표정으로 운을 보았다.

“혹여 누군가의 돈을 받은 저잣거리의 왈자(깡패)더냐, 아니면······?”

“······왈자들의 검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소신이 운검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운은 달빛에 언 훤을 보았다. 왕이 두려운 입을 열었다.

“사병을 가지고 훈련시키는 것은 역모로 간주하여 금지되어 있는 것이 국법이다.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가 사병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냐!”

운은 대답할 수 없는 민감한 문제였다. 그럴 가능성이 짙었지만, 증거도 없었다. 입을 다문

운에게 왕이 다시 말했다.

“몇 안 되는 사병이나마 가질 수 있는 것은 왕자여야 가능하다.”

왕자라는 말에 운이 완강하게 말했다. 왕자라면 곧 양명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절대, 절대······. 자객들은 무녀를 납치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절대 양명군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형님이라면 납치를 했을 것이란 뜻이냐?”

운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방금 양명군의 무고를 변호하기 위해 내뱉은

말은 무녀가 연우임을 말하는 동시에, 옛날에 양명군이 연우를 마음에 품었던 사실까지

실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운이 다시 자신의 말을 덮기 위해 말했다.

“양명군과는 오랫동안 벗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의 인품은 상감마마께옵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가에는 하인 몇 명만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운아!······너도 알고 있구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운은 왕이 하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알고 있었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한 끝에

두려운 눈길을 왕에게 보냈다. 왕의 말은 곧 왕도 월이 연우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훤은 연우를 바라보며 운의 추측에 쇄기를 박는 말을 던졌다.

“나보다는 먼저 알았군. 그리고 나에게 왜 말을 해주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군.”

운은 변명의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연우의

눈길도 느꼈지만, 마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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