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를 품은 달-16화 (16/47)

#16

석강을 위해 경연청에 모인 대신들과 학자들은 서로 간에 눈치만 살피며 학문토론을 했다.

하지만 신경들은 모두 오늘 있었던 전 상선내관의 자결에 쏠려 있었다. 왕의 눈치를 살폈지만

왕은 아무렇지 않게 석강을 하고 있어 먼저 자결한 이유를 묻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석강이 끝나갈 즈음에 대사헌(大司憲:종2품)이 겨우 물을 기회를 잡았다.

“상감마마. 신, 사헌부의 대사헌 아뢰옵니다.······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하지만 힘들게 입을 연 대사헌의 말을 싹둑 자르고 훤이 먼저 말했다.

“전 상선내관의 자결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훤의 태연한 말에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뒤의 말을 기다렸다.

“경들도 들었다시피 전 상선내관이 이유도 모르는 자결을 하였다.”

“상감마마, 천신들이 들은 바로는 전 상선내관이 오늘 오전, 강녕전에 들었다가 퇴궐하였다

들었사옵니다. 헌데 자결한 이유를 상감마마께옵서 모른다 하시오면 어찌 하옵니까?”

훤은 조용히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의금부(義禁府, 왕명(王命)에 의해서만 죄인을 추국하는

사법기관)의 관원과 형조(刑曹, 일반적인 중앙사법기관) 관원, 그리고 각각의 대신들을 훑어보았다.

이 일은 순리대로 한다면 형조에서 조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형조는 친 외척세력이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곳이었다. 자칫 일이 잘못되면 연우의 죽음을 캐보기도 전에 외척들의 귀로 흘러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전 상선내관의 자결을 조사하지 않는 것도 대신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었다. 훤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진정 이유를 모르겠느니. 하여 의금부에 일러 이유를 조사하라 명하겠노라.”

“신, 형조판서 아뢰옵니다. 어이하여 의금부에 조사를 명하시옵니까? 응당 형조 관할이 아니옵니까?

형조에서 조사하겠사옵니다.”

훤은 그러잖아도 머리가 복잡해서 화가 나 있는 것을 힘들게 평안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었는데

형조판서의 개입으로 그만 화가 뻗혔다.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거짓말을 했다.

“오늘 오전 전 상선내관을 부른 이유는 내수사(內需司,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곳으로

주로 내시부의 내관들이 겸직했음. 왕실의 사유재산은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특이한 것으로

태조 이성계의 부친대까지의 막대한 재산-함경도의 3분의 2가량이 이성계 조부의 땅이라 불릴

정도의 재력-을 국고로 편입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을 태종 이방원이 무시하고 왕의 개인재산으로

둔 것인데, 대물림 하면서 그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했을

것이라 추정함. 한마디로 조선의 왕은 대적할 상대 없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재벌. 백성의 세금을

거둬들인 국고(國庫)와는 구분된 전혀 별개의 것. 그리고 조선전·중기까지는 여자에게도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에 왕비의 친정-대부분 부자였음-에서 상속받은 재산도 왕비 개인이 사용하거나

사후에 내수사에 포함되기도 했음)에서 상왕대의 내탕금(內帑金, 왕의 개인자금, 사용했던 용도는

왕의 성격 따라 완전히 달랐음)에 대해 물을 것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아무 대답 없이 퇴궐하여서는

자결을 한 것이었기에 이는 형조 관할이 아니라 응당 의금부 관할이라 여기는 바, 굳이 형조에서

조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

형조판서 이하, 다른 대신들은 왕의 말에 수긍하며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국고라면 몰라도,

자고로 내수사에 관련한 일에 대해서는 대신들은 그 어떤 개입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법이었다.

특히 내탕금은 더욱 그러했다. 훤은 대략 자신의 말이 먹혀든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녕전으로 돌아갔다.

강녕전의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훤은 머리에 쓰고 있던 익선관을 벗어 방바닥에 사정도 없이

패대기를 쳤다. 하루 종일 참고 있던 분노를 침전에 들어서서야 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선내관이 당황하여 익선관을 바쳐 들었다.

“상감마마, 고정하시오소서.”

하지만 훤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화를 참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말(襪, 왕의 버선)이 방바닥에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모두가 마음을 졸였다.

왔다 갔다 하던 훤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던 운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어차피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운은 아무 변화 없이 서있기만 했지만 훤은 운이 자신의 말에 긍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연히 주위의 어느 누구도 운의 긍정을 느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운 이외에는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훤은 상전내관(왕명을 전달하는 내시)

에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전은 들으라. 지금 당장 의금부로 가서 모든 의금부관원의 신상이 적혀있는 문부(文簿)를

가져오너라. 일개 나장(羅將, 의금부 소속의 최 하급직 군졸)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라.”

성선내관이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무엇이 그리 조급하시옵니까? 우선 석수라부터 진어하신 연후에 어명을 내리시옵소서.

그리 하시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훤은 머릿속 정리를 위해 우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운에게 말한 것처럼 전 상선내관의 자결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의금부에서 아무리 비밀리에 연우의 죽음을 조사한다고 해도 그

움직임이 대신들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외척들 눈에 당연히 이상하게 보일 것이기에

섣불리 조사를 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전 상선내관의 자결은 좋은 방패가 되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전 상선내관의 자결을 조사하는 것처럼 하고, 안으로는 연우의 죽음을

조사하는 것. 이것이 훤의 현재 계획이었다. 철저히 물밑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믿을만한 자를

의금부에서 골라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운의 두뇌를 투입하고 싶지만 운검은 아주 조금

움직여도 그 움직임의 크기는 다른 자들보다 몇 배는 커 보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의금부라면 형조보다 승산이 있었다. 그래서 믿을만한 자를 골라내는 이일이 어쩌면 가장 큰

위험일지도 모르기에 마음이 조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막막하기만 하던 일에 돌파구가 생긴 것

같아서 어렴풋하게 생기도 돌았다.

석수라를 마치고, 의금부의 문부를 살피던 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놀랍게도 세자빈 간택

당시 자선당으로 불려왔던 성균관 동장의가 의금부의 도사(都寺, 종5품으로 실무관리)로 승진해

있었다. 처음 그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 아직 상왕이 계실 때였다. 그래서 외직으로만 돌던

그를 훤이 등극한 이후에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서 왕의 수족 기능을 담당하는 의금부에 발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현재 문신중월부시법(1년에 4번 치르는 관리들의 승진시험)의

의해서 특진을 한번 했고, 또 그 외에도 단계별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올라 실무자인 도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일을 맡겨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훤은 그 어떤 자보다 반가웠다. 그리고 문부에 기록된 사항들을 유심히 보니 전최(殿最, 관리들의

평상시 근무성적을 매긴 것)의 성적도 좋았고, 외척세력에 기죽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 그를 의금부수장인 판사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물론 의금부판사도

오래전에 훤이 믿을만한 자로 낙점해두었었다. 어쩐지 연우의 한 맺힌 넋이 도와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훤은 안심한 표정으로 상전내관에게 일렀다.

“상전, 승정원으로 가서 의금부에 명일(내일)의 윤대(실무관리들의 업무보고)에 의금부도사를

필히 대령토록 논관을 내리라 전하라.”

“네!”

훤은 상전내관이 나가고 나서야 목욕하러 갔다. 뜨거운 목욕물에 푹 담그고 보니 하루 종일

조급했던 마음이 제법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연우에게 느끼는 죄의식이 조금 덜어진 듯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월에게 아무것도 못해주는 막막한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연우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프면 월에게 미안했고, 월에게 깊어지는 감정 때문에 연우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연우의 죽음을 접했을 때 두 번 다시는 설레는 마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연우만이 마음속 유일한 정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월이란 존재는 그러한 마음을 송두리째

흩어 놓아버렸다. 훤은 두 여인을 마음에 품었기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내놈이라 자조했다.

훤은 하얀 야장의 차림에 긴 머리를 푼 모습으로 월을 맞았다. 의관을 정제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운 훤의 모습에 월은 차마 눈을 들기도 황송했다. 훤은 두 팔을 벌려 월에게 말했다.

“이리 오너라. 너의 자리는 나의 품 안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월은 다소곳하게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훤은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고 말했다.

“어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지만 어지간히도 왕명을 거역하기만 하는 고약한 여인이로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가 더 좋았느니. 그때는 그나마 알아듣기 힘들긴 했지만 말은 곧잘 하였으니.

지금의 너의 입은 참으로 야속하리만큼 꼭꼭 닫고 있구나.”

어제보다 더 멀어진 거리에 훤은 긴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렸다. 월이라고 어찌 훤의 품으로

달려오고 싶지 않겠냐 만은 그럴 수가 없기에 더 힘겹다는 것을 훤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생떼로

인해 혹시 월이 더 힘겹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훤을 괴롭혔다. 훤은 긴 눈길을 들어

창문에 스며든 달의 흔적을 보았다. 월의 무표정을 보느니 차라리 달그림자를 보는 것이 마음이

덜 아렸다. 훤은 달의 흔적만을 느끼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 성숙청에 갔었다. 혹여 들었느냐?”

월의 입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어제 취로정에서 감정을 보였던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기에,

이젠 두 번 다시 자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연우는 죽어 없어져야했다.

살아나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에 무녀, 월의 표정만을 보여야 했다. 그런데 그런 무녀의 표정이

훤의 마음을 괴롭힌다는 것이 더 힘겨웠다. 훤은 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여겼는지

다시 말했다.

“그곳 무녀들도 모두 너와 같이 흰 소복차림일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더구나. 오직 너만이 하얀

소복이구나. 왜 그런 것이냐? 네가 액받이무녀라 꼭 그 옷만을 입어야 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그 옷을 고집하는 것이냐?”

여전히 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훤은 눈길을 월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애달프게 웃으며 말했다.

“난 하얀 소복이라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세자빈이나 왕비 후보자들 중, 삼간택에서 떨어진

두 여인은 평생을 수절하며 하얀 소복차림으로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 어이가 없는 법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하얀 소복만 보면 그 말이 생각나는구나. 나를 본적이 없어도 나의 여인인······.

원래 왕과 액받이무녀도 만나선 안 되는 것이라던데······.”

훤은 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변화되는 그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어제 무녀가 아닌 여인의 표정을 보았기에 오늘의 갈증을 더욱 심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왠지 낯이 익는 듯도 싶구나. 어디서 너 같이 어여쁜 것을 보았겠는가 만은 낯이 익어.

처음 보았을 때부터 기이하게도 낯설지가 않았으이. 아마도 인연이 닿으려 그랬나 보다.”

훤이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을 운은 날카롭게 주워 새겼다. 운도 그랬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은 건 운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낯익은 근원을 찾고자 했고 그것은 운에게 그리 힘든 것이 아니었다.

허 염! 그와 이목구비뿐만이 아니라 분위기, 심지어 말하는 어투까지 닮아 있었다. 곧이어 오늘

확인한 연우의 몸종이었던 여인이 그 근원을 견고히 했고, 순식간에 운의 머릿속에서 연우와

월이 겹쳐졌다. 하지만 운은 머리를 애써 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연우와 월의 연관성은 짙어졌다. 비록 연우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염을 통해 한 번씩 연우에 대해 들었던 것이 있었다. 그중 일반적인 규방여인이라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학식이었다. 때로는 책을 빌려가고자 하면 염이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그 책을 연우에게서 받아다 줄때가 있었을 만큼 연우는 특이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월도 처음 만나던 날, 방안에 있었던 서책들과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들이 상당한 학식임을

드러내 놓고 있었기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었다. 한양 땅에 그 정도의 책을 읽은 사대부가의

여인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한다면 둘을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연우와 월은 같은 나이였고, 연우가 죽은지 일 년 뒤에 월은 무적에 올랐다. 단 일 년의

시간만이 비어있었다. 도리어 연우에서 월로 가기엔 그 일 년의 시간이란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운의 머릿속은 다시 크게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연우낭자는 분명히 죽었는데······. 그때 연우낭자를 땅에 묻었단 말을 분명히 의빈자가께서

하셨. 아!’

운은 연우가 죽었을 당시가 기억이 나자 알 수 없는 뜨거운 불기둥 하나가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그때 염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연우를 따라 자살이라도 해버릴 것 같아 걱정되어

양명군과 운이 24시간을 따라다녀야 했다. 그때도 분명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연우의 염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보통 살아날 가능성을 위해

최소한 삼일이라는 기간을 두고 염습을 한 뒤에 땅에 묻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다.

그런데 연우가 죽었을 때, 염이 반쯤 미쳐서 웅얼거렸던 말이 있었다. ‘우리 연우를 차가운 땅에

묻어 버렸다. 단 하루도 재우지 않고, 염습도 하지 않고, 죽은 뒤에 바로 땅에 묻어버렸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는 말이었다. 이상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라 장례절차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구나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보니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운의 머리가 자신의 기억과 지금 상황들 사이에서 종횡무진하고 있을

동안에도 훤은 월에게로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었다.

“나에게 아무리 많은 내탕금이 있다한들 무엇하겠느냐? 너의 그 짚신을 비단혜로 바꿔주지 못하고,

너의 무명 소복을 비단당의로 바꿔주지 못하는데. 어찌 입고 신는 것조차 신분의 규제를 둔 것인지······.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의 이 비단야장의가 미안하구나.”

훤의 머릿속은 운과는 달리 월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를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줄 수만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받아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윽고 고개를 상선에게로 돌려 말했다.

“상선, 가서 나의 가야금을 가져오너라. 다른 것은 줄 수 없으니 선율이나마 주고 싶구나.”

월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을 훤은 미처 보지 못했다. 훤의 가야금 솜씨가

탁월하다는 것은 연우였을 때 가슴 설레며 들었던 말이었다. 그 실력은 가야금이 뛰어났다는

세종대왕의 명성을 넘어설 정도라며 오라비인 염이 해준 말이기도 했다. 훤의 서찰에도 간간히

연우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글이 적혀있었고 언젠가 만나는 날이 오면, 그런 꿈같은 날이 오면

듣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비록 무녀의 몸으로서 일망정 그런 꿈같은 날이 왔는데도, 이날이

행복하지가 않았다. 한 날이 가면 그 가는 한 날 만큼 슬픔은 더해져 가고 설움은 곱절로 깊어져

가는 듯 했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이 과한 것이라 스스로를 비난하는 수밖에 없었다.

훤도 상선내관이 가져온 가야금 줄을 고르며 연우를 떠올렸다. 언젠가 만나는 날이 오면,

그런 꿈같은 날이 오면 연우 앞에서 자신의 가야금 소리를 들려주리라 생각했었다. 서체나 글은

연우 앞에서 뽐낼 수가 없었기에 연우가 못한다는 가야금만큼은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 더욱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비록 연우에겐 끝끝내 들려주지 못했지만, 월에게는

들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훤의 손끝아래에서 명주실로

된 가야금 줄이 맑은 음성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 음씩 줄을 뜯을 때 마다 월의 몸은 훤에게서

멀리 앉아 있었지만, 연우의 혼은 그 음에 이끌려 어느새 훤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훤은 연주하던 간간히 월을 힐끔거리며 보았지만 월의 모습은 아무 변동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월이 가야금 선율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한곡을 끝내고

훤은 월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떠하냐?”

월은 훤에게 대답을 해야 했다. 왕의 음악을 듣고 의례적인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감정 없는 ‘뛰어나십니다.’란 답을 올려야 했다. 그것이 무녀로서의 답이었다.

월은 입술을 조그맣게 벌렸다. 그런데 그 작은 틈으로 울컥하는 연우의 울음이 먼저 올라오는

바람에 급하게 입을 앙다물었다. 그것만으로는 올라오는 울음을 막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 감정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아랫입술이 이에 잘려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참아야한다며 힐책했다. 훤은 월의 앙다문

입술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따뜻하게 말했다.

“구슬픈 음을 뜯었는데 아무도 내 가야금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없구나. 이제껏 내 솜씨를

칭찬했던 이들은 모두가 아첨이었단 말인가? 아첨이라도 좋다. 왕의 가야금 소리에 울어주는 것,

그 또한 충정이니라. 지금 이후로 흘리는 눈물은 내 가야금 선율에 의한 것이니 그 눈물의 연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월의 왼쪽 눈에서 굵은 눈물 한 점이 떨어져 내렸다. 아무 변화 없이 오직 눈물 한 점만이

떨어져 훤의 마음에 파문을 그렸다. 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무표정한 표정보다는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덜 서글펐다. 그래서 자신이 덜 서글프기 위해 더 많은 눈물을 흘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가야금 줄을 뜯었다. 눈물은 월이 흘리지만 울음소리는 가야금이 대신

내어 주었다. 그리고 가야금의 울음소리는 훤의 손끝에 의해 만들어졌다.

월은 훤의 잠든 옆을 지키다가 파루의 북소리가 울리는 소리에 훤이 잠에서 깨어나자,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나 성숙청으로 돌아왔다. 설이 나와 월을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어나는

슬픔에 자신의 작은 방으로 몸을 숨겨도 그 슬픔까지 숨겨지지 못했다. 파루의 북소리에 장씨도

일어났는지 월의 방으로 들어왔다. 월이 장씨를 향해 무거운 미소를 보이자 장씨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미소가 징그러워 안 오려하였는데······.”

월은 여전히 무거운 미소로 차분하게 말했다.

“신모님이 말씀하신 죽느니 만도 못한 일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어이하여 보태어지기만 하고 덜어지지 않는 것이온지, 소녀의 미진한

머리로는 알 수가 없음입니다.”

“아직까지 덜어지지 않고 보태어지는 것이라면 더 긴 세월이 남았단 뜻이오. 앞으로 흘릴 눈물이

이제껏 흘려온 눈물보다 많이 남았단 뜻이오. 이 시간이 흐르고 덜어지는 날이 오면 그땐 흘릴

눈물이 흘렸던 눈물보다 적게 남음을 뜻하는 것이니. 그러니 쉬엄쉬엄 서러워하오.”

월의 턱이 서러움에 경련이 일었다. 혹시나 울음이 나올까 한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신모님. 신모님의 주술이 그리도 뛰어나시오면 소녀의 눈을 감게 해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상감마마의 기억 속에 월을 지우고 소녀를 죽여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연우도 가고, 월도 가면

상감마마가 가여우시니 기억이 없어지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소녀의 기억 속에

연우를 지워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설은 자신의 거친 손으로 연우의 여린 손을 잡았다. 옆에 있어도 아가씨의 짐을 덜어줄 수 없기에

같이 서러워졌다.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고 싶지만 연우가 짊어진 짐 덩어리는 온전히 연우의

어깨위에만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짐 덩어리란 것이 솜 덩어리로 된 것인지 물을 흡수한 양

점점 더 지탱하기 힘들어져가고 있는 것이 설에게도 보였다. 그래도 힘들게나마 살아가고 있던

연우가 오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살아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줘

아가씨의 손을 더욱 꽉 쥐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있는 기운을 나눠 갖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연우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같은 한양 땅 아래에서 그리도 보고 싶던 어머니도 못 뵈고, 우리 오라버니도 못 뵙니다.

우리 어머니는 많이 늙으시었는지, 우리 오라버니는 더욱 아름다워지셨는지 소녀의 눈으로

뵈옵지 못합니다. 불초한 이 여식은 아버지 무덤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리 세상을

버리셨을 때 임종조차 뵈옵지 못하였습니다. 소녀가 먼저 가 있는 줄 알고 저 세상에서 소녀를

찾아 헤매이시진 않을까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상감마마께 그리웠노라 말씀 올리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 연우의 기억들이 사라지면 소녀의 감정도 덜어지겠지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워주시면 아니 되올련지요.”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잡것의 머릿속부터 지우고 잡소.”

장씨는 허적허적 일어나 월의 방을 나왔다.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더라도 눕게 두어야 했기에

설도 방을 나왔다. 설은 애꿎은 환도를 꺼내 두어 번 공중을 갈랐다. 설이 환도를 휘두르는 것은

설도 베어야 하는 그리움을 향해서 인 것을 장씨는 알기에 조용히 허공에게 말하듯 뇌까렸다.

“쯧쯧. 눈이 불꽃을 향해 가면 어찌 되간대? 애시당초 혼자만이 품었던 감정. 그러니 그리움이란 것도

혼자만의 것이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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